상식의 재구성, 상식의 모자이크 2번 조각
지난해 베를린에서 지낼 때 어느 70대 독일 아주머니 댁에 저녁식사 초대를 받은 적 있다. 벽에는 거센 파도가 그려진 19세기 일본의 유명한 우키요예 그림이 걸려있었고 아주머니는 사진첩을 꺼내 아버지의 일본 시절 이야기를 했다. 그 세대 독일인들이 공유하는 일본 취향에 대해 당시 베를린에 체류하던 어떤 동료에게 이야기했더니 그의 대답. “그 할머니의 손주들은 아마 K팝 뮤비 보고 랜덤 댄스 쫓아다닐껄요.”
1980~1990년대에 구로자와 아키라,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사설 시네마테크나 야매 비디오로 볼 때 일본 영화는 ‘넘사벽’이었는데, 대작을 만들어내는 그들의 스튜디오 시스템과 그들의 영웅서사조차 부럽기만 했는데. 이제는 한국영화가 일본으로선 한동안 따라오기 힘들 넘사벽이 됐고 주로 소소한 사랑 이야기나 가족 이야기를 다루는 작은 영화는 한국이 아니라 일본 쪽 전공이 됐다.
<D.P 개의 날>을 보고 참 잘 찍었네, 했더니 바로 <오징어게임>이 그 모든 입담들을 잠재워버린다. <모가디슈>를 보고는 이제 한국에서 할리우드영화를 찍는구나, 했는데 <오징어게임>을 보니 이제 한국에서 미드도 찍는구나. <기생충>을 보고 봉준호는 천재구나, 했더니 <오징어게임>을 보니 한국에 봉준호가 한 명이 아니었다.
그 창의성과 상상력의 천재들이 다 한국식 입시지옥, 주입식 교육과정을 통과한 세대라는 사실이 미스터리. 초등학교부터 온통 아이 하나하나의 개성과 창의성 길러주는데 집중하는 것이 독일 같은 서유럽 나라들의 교육과정인데 그들의 영화가 존재감을 잃어가는 것도 미스터리다.
<상식의 재구성>에 들어있는 꼭지 중 하나.
‘한국인의 국뽕은 무죄’.
“만일 1950년에 북한군대가 쳐내려왔다가 맥아더 상륙작전에 쫓겨가고 국군이 다시 치밀고 올라가면서 성한 건물 하나 없이 쑥밭이 된 서울 광화문통에서 어떤 무당이 신기 올라 작두를 타면서 방언하기를 앞으로 꼭 70년 후에 우리 조선사람 영화인하고 가수들이 아메리카에 가서 흑인 백인 다 제치고 챔피언 먹겠어, 그랬다면 저 무당이 신 내린 줄 알았더니 폭탄 터지는 소리에 종시 돌아버리고 말았구나, 했을 것이다.
전후 폐허에서 재건한 한국경제, 할리우드영화의 융단폭격에서 살아남은 한국영화의 입지전은 우리가 누구인지 돌아보게 한다. 그것은 정신에 관한, 성품에 관한 이야기이다. 울적하고 험난했던 시대를 통과한 사람들의 발랄함과 창의력에 관한 것이다.
한국영화의 뉴웨이브는 영화에 대한 가위질 심의가 없어지자마자 그게 어느 형편없던 시절 얘기냐는 식으로 대차게 밀려왔다. 그것은 뚜껑이 열리길 기다렸던 활화산 같았고 그 창의력은 구김살 없이 발랄했다.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모순이 되려 분출하는 상상력에 자양분을 보탰다.
유럽과 미국에 68운동과 로큰롤이 풍미하던 10년 동안 군사정권 치하의 한국에서 가령 김지하는 ‘풍자냐 자살이냐’는 절박성으로 풍자시를 썼고 하길종, 이장호나 송창식, 한대수는 장발단속 도망다니고 대마초로 징역살고 방송금지 당하면서 영화를 만들고 통기타 치며 포크송을 불렀다. 개인에게 좋은 교육과 정치라면 최고겠지만 나쁜 교육과 정치라도 개인을 온전히 망쳐놓지는 못한다.
한국이 3만달러 선진국 중에서 유일하게 식민지 운영의 경험이 없는 나라라 한다. 세계시장에서 아무런 기득권이 없었다는 얘기다. 유럽 나라들은 2~3백년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착취로 쌓은 물적 토대가 있고 한때 세계 전체가 자기네 놀이터여서 어딜 가나 저들이 깔아놓은 언어와 문화와 비즈니스의 인프라가 있다. 영어가 세계공용어이고 달러가 기축통화이고 전세계에 주둔군을 거느린 미국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들에게 시장개척이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면 한국의 기업들은 ‘맨땅에 헤딩하기’였다. 국가 브랜드의 도움을 등에 업지 않고 오직 자력으로 언어의 장벽, 인종의 장벽과 싸워야 했다. 세계시장의 마이노리티로 출발해 메이저가 된 것이다.
가령, 삼성은 과거 50년 포스트식민시대 경제전쟁에서 승리해 식민지와 분단으로 상처 입은 한국인의 자존심을 달래준다. 다만 삼성이 보여준 탈법, 초법적인 태도들은 우리를 딜레마에 빠뜨린다. 우리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 땄으나 도핑테스트에 걸렸으니 박수를 칠 것인가 말 것인가.
월드컵에서 올림픽에서 자국 대표팀에 열광하는 건 큰 나라나 작은 나라나 마찬가지고, 유럽에선 국가 대표팀 축구에서 양국 응원단끼리 패싸움이 붙어 수십명이 죽기도 하고, 월드컵에서 자책골을 넣은 남미 선수는 귀국해서 살해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의 ‘국뽕’은 다른 선진국들에는 별로 없는 ‘증상’, 특별한 국민감정이다.
한국인의 ‘국뽕’은 무엇인가.
첫째는 약소국 스트레스, 저개발국 시절의 열등감에서 오는 보상심리다. 19~20세기에 걸친 제국주의 시대엔 이웃 강대국들에게 축구공처럼 걷어차이다 식민지가 됐고, ‘포스트 식민’시대에도 미국 보수 정부의 네오콘 집단은 한국을 ‘보호국’ 취급하며 외교권을 대리하려 들었다. 한국은 오직 초강대국들만을 이웃으로 갖고있는 나라다. 그런 한국의 포지션을 ‘고래 사이에 낀 새우’라거나 ‘맹수들에 둘러싸인 토끼’라고도 한다. 그것은 한국이 부자가 되고 선진국 스펙을 두루 갖춘 다음에도 약소국 정체성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 이른바 ‘이웃 효과’다.
둘째는 한국인이 순도 높은 핏줄 공동체라는 점. 한국이 ‘단일민족’ 국가임은 자랑일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는 사실 그 자체다. <신한국론>의 저자 김영명은 한국이 세계적으로 드문 단일민족국가라면서 “동질성의 신화를 내세우는 일본도 한국인 중국인 등 외국인과 아이누, 오키나와 종족이 섞여 이민족 2~3%가 존재한다.”고 했다. 한국인들이 ‘국민배우’ ‘국민가수’ ‘국민여동생’ 같은 네이밍을 즐기는 데는 가족애에 버금가는 끈끈한 집단주의 정서가 깔려있다. 한국인 선수가 국제무대에서 활약할 때 그의 국적과 태극마크는 ‘국위 선양’을 하고 있지만 나와 공유하는 피부색 머리빛깔 생김새는 어떤 ‘가문의 영광’을 구현하는 것이다. 수천년에 걸쳐 피가 섞이고 또 섞이면서 민족 정체성이 묽어진 유럽이나 미국에서 ‘정부를 공유하는 국가 공동체’의 개념이 민족 공동체를 대체하고 있는 것과 아주 다르다.
‘국뽕’에는 ‘국가주의 정책’의 흔적도 묻어있다. ‘체력은 국력’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올림픽 메달 레이스에 자존심을 거는 오랜 습관이 무의식의 바닥에 ‘국뽕’ 장치를 깔아놓은 것이다.
한국인의 ‘국뽕’은 충분히 이유 있다. 이민족에 점령돼 치욕을 겪고 같은 민족이 갈라져 서로 총질했던 역사를 가진 우리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 광포한 역사의 난동이 남겨놓은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힐링 샤워가 필요하다. 고단한 근육과 피로한 정서의 마사지가 필요한 것이다.
적당량의 ‘국뽕’은 영혼의 종합비타민제다. 국수주의라는 혐의는 적절치 않다. 유치하다거나 정신승리라거나 하는 자기검열도 당치 않다. 한국인의 애국심은 외국을 침략하는데 쓰인 적 없다. 강대국의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는 자신을 망가뜨리고 이웃에게 해롭지만, 식민침략을 겪었고 탐욕스런 이웃들 사이에 끼어있는 나라의 민족주의는 때때로 정신건강에 이롭다. 식민통치자의 언어, 타자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폄하하고 동족을 매도하는 매판 지식인이 활보하는 가운데서는 더더욱 그렇다. ‘민족개조론’으로부터 ‘어글리 코리안’, ‘한국병’, ‘코리안 타임’을 거쳐 ‘반일종족주의’까지 우리 사회에 면면하게 내려오는 자기비하의 내력은 손 볼 필요가 있다.
우리 글로벌 기업들에 대해 ‘아류 제국주의’라 한다면 그 비판은 ‘나이브’하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이미 21세기 국제사회의 규칙이 돼버렸다. 그것은 강대국과 약소국,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리지 않고 과거 공산권 나라들까지도 무차별 포섭해버렸다. 이 규칙의 열외로 남은 지역은 아시아에서는 부탄과 북한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1980년대 이후, IMF 사태 이후에 그것은 한국사회로선, 한국기업으로선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적응의 문제가 되었다.
2004년, 대표적인 여행사이트 론리플래닛(www.lonelyplanet.com)의 한국 소개글 중에 “한국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기적이다.”(It's amiracle that South Korea still exists.)라는 문장이 우리 언론에서 논란이 됐고 네티즌들의 반발을 샀다. 한국을 비하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후에 소개글이 바뀌었지만, 이 소동은 쉽게 상처받고 쉽게 깨지는 우리 자존감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한국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기적이다.”에 이어지는 다음 문장이다. “중국은 서쪽에서 다가오고, 일본은 동쪽에서 찌르고. 이 나라가 수세기 동안 원치 않는 전쟁에 휘말려온 게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주변국이 아무리 삼키려했어도, 한국은 손상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With China looming to its west and Japan nudging it from the east, it's no wonder the country has played unwilling host to centuries of war games. But no matter how many times its neighbours try to swallow it, South Korea manages to survive intact.)
비교적 정확한 서술이다. 실제로 한국이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면서 살아남은 것, 침략을 물리치기도 침략에 굴복하기도 하고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는 타협으로 자신을 방어하기도 하면서 살아남은 것, 그렇게 해서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유지하면서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다. 그 ‘기적’을 조롱으로 받아들일지 찬사로 받아들일지는 그 ‘기적’의 주인공들 마음이다.
식민지 시대와 저개발 시대에 우리를 주눅 들게 한 ‘가스라이팅’의 독성은 해독에 시간이 걸린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인데도 옆집에 공부를 더 잘하는 아이가 있으면 주눅 들고 집에서 구박받기 쉽다. 이른바 엄친아 현상인 셈이다. 강대국들을 이웃으로 둔 탓에 발생하는 이른바 ‘이웃효과’가 한국인들의 정당한 자기평가를 방해하고 있다.”고 강준만은 <미국사산책> 17권의 맺음말에 썼다. 한국인은 자신들의 매력을 몰라서 손해 본다는 페스트라이쉬의 말은 한국인의 ‘자기애’가 아직 기준치 미달이라는 얘기다. 스스로에게 국뽕을 마음껏 허(許)하라.“
상식의 재구성–한국인이라는 이 신나고 괴로운 신분
(한빛비즈 펴냄, 2021)
1장, 불평등 퍼즐
2장, 미디어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3장, 민주주의 멀미
4장, 독일의 경우
5장, 이념 트라우마
6장, 일본 딜레마
7장, 한국인은 누구인가.
= 8, 한국인의 국뽕은 무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