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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나'와 화해하기_1

기억 속,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마주하기

by cogito
나는 나에게 일어난 일들의 결정체가 아니다.
나는 내가 선택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분석 심리학의 창시자인 '카를 융 (Carl Joung)' 이 남긴 말이다.


처음에는 이 말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겪었던 고통과 상처들을 깔끔하게 잊으라는 건가?"

"과거의 경험들이 쌓여 지금의 '나'가 된 것인데, 그걸 부정하라는건가?"

- 머릿속에서 반박만이 연이어 떠올랐다.


하지만 곰곰이 되새겨보니, 그 속의 진정한 메시지가 서서히 다가왔다;


융은 지난 일들을 잊어버리라는 의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선택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은, 과거에 얽매이는 대신 과거를 '이해'하라는 말이자,

그 이해를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동력으로 삼으라는 당부였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과거의 기억에 나름의 내러티브 (narrative)를 부여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내러티브는, 내 생각과 선택들에 은밀한 영향을 미친다;


과거의 상처에 사로잡혀 부정적인 내러티브만을 반복한다면, 과거에 발목 잡힌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거를 이해하고, 그 경험을 발판 삼아 지금의 나를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어간다면,

진정한 '나'에게 다가서는 성숙한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



솔직히 말해, 내게 과거는 '불안'의 원천이었다;


'예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어떡하지?'

'그때처럼 실패하면 어떡하지?'

'내 단점 때문에 인정받을 수 없을거야...'


불행했던 기억들을 되새기며 나는 스스로를 옭아맸고,

어느새 과거는 현재의 나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융의 말을 받아들인 지금, 나는 과거와 화해하기로 마음 먹었다;


예전의 기억들을 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과거에 얽매이는 대신, 미래를 선택해나가는 사람이 되자.


위의 다짐과 함께,

켜켜히 먼지가 쌓인 기억의 파편들을

하나씩 들춰보기 시작했다.


memory lane.jpg 기억의 길 (Memory Lane) 을 따라, 과거와 화해하기 위한 여정을 떠나본다.


기억 에피소드1:

남들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돼야만 해



"도... 레... 미..."


다섯 살의 내게 피아노는 너무 어려운 존재였다.

손가락 힘이 약했던 나는 건반을 누르는 것조차 버거웠고, 서로 붙어 있는 ‘도레미’조차 제대로 치기 힘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가장 힘들었던 건 악보를 읽는 일이었다 - 정신이 산만했던 나는 악보를 보다 금세 딴생각에 빠지기 일쑤였고, 한 마디를 치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그렇게 건반과 씨름하며 쩔쩔매고 있을 때, 곁눈질로 본 다른 아이는 이미 체르니를 치고 있는 것 아닌가.

건반 위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아이의 손을 보며,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 그 감정의 정체는 부러움, 그리고 감당하기 힘든 열등감이었다.


'나는 아직 ‘도레미’에서 허우적대고 있는데, 저 친구는 저 멀리 앞서가고 있네.'

- 그 차이를 받아들이기가 너무도 싫었던 거다.


결국, 난 울면서 선언했다;


피아노 안 칠 거야!!


그때부터 피아노는 내 '숙적'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수학, 체육 등...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들은 열등감에 취약했던 나를 수시로 괴롭혔다.


난 왜 이토록 '잘하는 것'에 집착하며,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싫어했을까.






내 열등감의 뿌리는, 일본에서의 경험에 있었다 -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간 나는 철저히 '외부인'이었다.

서툰 일본어 때문에 또래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고, 때로는 놀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때 느낀 거절감과 열등감은 어린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았고,

나의 자존감은 점점 움츠러들었다.


그런 나에게 스스로를 증명할 유일한 무기는 '능력'이었다.

사회성이 부족하고, 외모도 평범했던 나는 공부, 노래, 운동, 외국어 등.... 무언가에 뛰어난 '실력'을 갖춰야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만 열등감을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끊임없이 '뛰어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 이 목표는 나에게 노력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오히려 나를 열등감의 감옥에 가두었다;


피아노를 잘 치는 아이,

수학 문제를 척척 풀어내는 친구,

조금이라도 앞서가는 사람이 보일 때마다 나는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하고 못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때마다 더 깊은 불안과 좌절의 구렁으로 빠져들었다.

(때로는 실제의 나보다 더 능력 있어 보이기 위해, 잘 알지 못하는 것에도 아는 척을 하며 애써 자신을 포장하기도 했다.)


학창 시절을 지나 20대가 된 지금까지도 공부나 연습 그 자체보다 '잘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자기 비난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결국, 나를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던 열등감과 불안은 '우울증''식이장애'로도 이어졌다.




이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내 과거를 딛고 일어서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 기억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는 없을까?’


그리고 깨달았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그 기억들을 회상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지금의 '나'라는 것을.




관점을 바꿔서 바라보니,

내 기억 속에 왜곡된 내러티브가 숨어 있었다;


'일본에서 항상 소외되었다'고만 생각했지만,

그 기억 속에는 나를 놀리던 아이들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능력을 뽐내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좀 일본어에 서툴더라도, 내 곁에 머물러 준 친구들이 분명 존재했다.


이 사실을 직시하고 나니, 문득 궁금해졌다;

"난 왜 지금까지 나를 놀리던 아이들만 마음에 담아두었을까?"

"왜 '뛰어남'만이 인정받는 길이라 여겼을까?"

그리고 그 순간, 지금껏 직면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외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눈에 띄고 싶고, 인정 받고 싶은 욕구.


그동안의 나는 이 감정들을 억누른 채, '뛰어나지 못한 나 자신'에게 채찍질하기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오히려 스스로 '나는 못난 사람이야'라고 단정지으며, 다가오던 사람들을 내가 먼저 밀쳐낸 적도 많다; 능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건 아닌데 말이다.)


물론, 실력을 쌓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열등감, 두려움과 욕심에서 비롯된 왜곡된 생각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옭아매며 불안한 삶을 살아온 것 아닐까.


그래서 이제는 결심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나는 잘하고 싶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하며 소외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겁이 많고 서툰 사람이다.

하지만, 남들보다 느리다고 해서 기죽을 필요는 없다.
내 페이스대로 앞으로 나아가면 되니까.
잘하지 못하더라도 즐기면 되니까.
잘하지 않아도, 나를 아껴줄 사람들이 분명 존재하니까.
그리고, 1등만이 행복한 세상이 아니니까.


내 생각과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융의 말처럼, 나는 과거의 결정체가 아니다;

과거는 내가 지닌 일부일뿐,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지금의 선택에 달려있으니 말이다.


이제 내 목표는 '뛰어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 붙잡히는 대신, 과거를 딛고 앞을 보며 나아가는 사람.

진취적이면서 유연한 사람이 되는 것


- 그것이 내가 향할 새로운 지향점이다.



하지만 과거와 완전히 화해하기까지는, 아직 해결해야 할 감정들이 남아 있으며,

내 삶을 바꾸기 위해 실천해야 할 일들도 적지 않다.


이를 향한 여정이 나의 새로운 정상 (normal) 이 되도록,

과거의 기억들을 새로운 의미로 쌓아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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