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이 일하고, 더 바쁘게 사는 게 정답일까
껐다 켰다 해봐도,
부서진 액정 뒤에는 지글지글한 회색 선만 가득했다.
당장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였다.
'아..... 나 이제 ㅈ됐네...'
모르는 게 있으면 바로 검색하고...
뉴스를 보고,
유튜브로 공부하고,
중요한 사람과 연락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일상도 슬쩍 엿보고...)
내 하루의 상당 부분은 스마트폰 위에서 굴러가고 있었다.
'이 녀석 없이 내 일상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처음에는 막막했고, 무엇보다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의 속도에서 뒤처질까 두려웠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내가 직장인이 아니라 휴학 중인 학생이라는 사실이었다...)
폰이 없어진 첫 이틀 동안, 나는 길 잃은 사람처럼 방황했다;
습관적으로 폰 전원을 눌렀다가, '지지직' 거리는 화면을 보고 허탈해하는 일들의 반복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비어버린 하루의 틈을 다른 것으로 채우기로 했다;
가장 먼저 시도해 본 것은 라디오였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김이나의 목소리를 배경 삼았고,
가끔 가슴에 콕 박히는 말이 등장하면 조용히 수첩에 끄적여 보았다.
곧 '공부를 손에서 아예 놓을 순 없다'는 조바심도 올라왔고,
의학 논문을 정리해 주는 팟캐스트를 듣기 시작했다;
처음엔 의심스러웠다 -
'청각'에만 의존해 논문을 소화할 수 있을까?',
스스로도 긴가민가했다.
그런데, 시도해 보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팟캐스트에서 궁금한 부분이 나오면
노트북을 켜서 원문을 검색하고,
마음에 드는 논문은
태블릿에 받아 책처럼 읽었다.
그렇게, 기존에 스마트폰 하나로 해결하던 일들은
각기 다른 기기와 장소로 분산됐다;
검색은 노트북 앞에서,
라디오는 조용한 방 안에서,
논문은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태블릿으로.
이 번거로운 과정들이, 처음엔 불편하기만 했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 덕에, 내 생활은 차분해졌다.
논문 하나, 뉴스 하나를 더디게 읽게 되었지만, 오히려 머릿속은 또렷해졌다.
왜 그랬던 걸까.
나는 늘 '생산적'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 '스마트폰'을 선택했다;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걸 한 호흡에 처리할 수 있었으니까.
좋은 강의, 양질의 기사, 논문들....
처음에는 의욕에 불타올라
유익한 자료들을 닥치는 대로 소비했다.
그러나, 어느새 내 하루는 '잡음'으로 가득해졌다;
쉬는 시간에는 유튜브에서 유익한 강의를 찾아보다가
곧 알고리즘이 던져주는 쇼츠에 빠지곤 했다.
궁금한 내용을 검색하기 위해 구글 앱을 열면,
추천 목록의 뉴스에 주의를 뺏겨 수십 분을 허비했다.
낭비한 시간을 보완하기 위해
더 많은 정보를 소화하려 했지만,
머릿속에 남는 건 없었다.
(논문을 보이는 대로 저장하던 내 폰의 폴더엔,
읽지 않은 문서만 쌓여갔었다.)
어디 이뿐인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SNS에 들어가,
친구들의 일상과 나의 현재를 비교하는 데
몇 시간을 흘러 보냈다.
(그나마 SNS를 들여다보지 않을 때에는 배달앱을 켜서,
시키지 않을 메뉴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니면서...)
초심을 되찾기 위해 앱을 지워봐도 소용없었다.
다시 깔면 되니까.
지우면 다시 깔고,
멍하게 화면을 넘기는 일들이 반복되며
내 자제력은 점차 형체 없이 흐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폰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는 달랐다;
처음으로 화면이 아닌 창밖을 바라보게 되었고,
소중한 사람들의 표정을 눈여겨보게 됐으며,
어질러진 방을 정돈하거나 짧은 낮잠을 즐김으로써
진짜 '쉼'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꼭 필요한 논문만 골라서, 정해진 시간에 집중해 읽는다.
양은 줄었지만, 질은 높아졌다.
내가 폰 없이 지낸 시간은 거의 3주였다.
처음엔 불안했지만, 나중엔 오히려 마음이 안정됐다.
'문명의 이기'로만 생각했던 스마트폰이,
삶을 잡음으로 가득 채우는, '주의력 착취기'였던 것이다.
스마트폰 속 세상은 끝없는 자극의 연속이다.
수많은 정보와 광고, 포스트들이 우리의 관심을 끌기 위해 다투고,
그 모든 것을 처리해야 하는 건 결국 우리의 뇌다.
뇌에는 전두엽과 RAS(Reticular Activating System)라는 필터링 시스템이 있다.
이 시스템은 헛된 자극은 걸러내고,
중요한 정보만을 선별해서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
특히, RAS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솔'에 의존해
일시적으로 집중력을 끌어올린다.
하지만 자극이 과도하면,
뇌는 끊임없는 필터링에 에너지를 소모하고,
코티솔의 지속적인 분비는
오히려 뇌의 기능 저하를 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집중력은 고갈되며,
과열된 뇌는 서서히 무너진다.
(과도한 스트레스 호르몬은 전두엽을 억제하고, '편도체(amygdala)'를 활성화시킨다;
편도체는 감정과 분노를 담당하는 영역이다.
우리가 스마트폰을 쓰면 쓸수록
스스로를 스트레스에 노출시키고,
그럴수록 뇌는 더욱 '감정'에 취약해진다.)
이와 맞닿아 있는 개념이 '가짜 생산성(pseudo-productivity)'이다.
우리는 최대한 많은 일을 하고, 바쁘게 사는 게
더 많은 성과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하지만, 많이 한다고 해서, 바쁘다고 해서, 진짜 생산적인 건 아니다.
반복 작업과 무한 자극은 오히려 뇌를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며 알게 됐다.
내 집중력은 유한하고, 나의 시간은 내가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이제 새로운 폰이 생겼지만, 예전처럼 쓰고 싶지 않다.
꼭 필요할 때만 꺼내고,
자극 대신 맥락을,
속도 대신 방향을 선택하기로 했다.
스마트폰은 내 손 안의 지름길 같아 보여도,
가장 빠른 길이 늘 정답은 아니니까.
나의 좁은 세상을, 더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들로 채워보자...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별첨)
우리는 흔히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어쩌면.... 뇌는 기계와 꽤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
기계도 연료가 있어야 돌아가고, 지나친 과부하에는 결국 고장이 난다.
뇌도 마찬가지다.
의지력만으로 버티라는 말은 환상일 뿐이다.
뇌는 적당한 휴식과 자신에게 맞는 템포를 통해,
진짜 생산성을 만들어내니까.
더욱 가치 있고, 밀도 높은 현재를 살아내기 위해,
나만의 '생산성'을 찾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