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은 걸까, 길 위인 걸까
능숙하지 않은 무언가를 간만에 하게 되면 늘 느끼는 감각이 있다. 맞다, 나 이거 잘 못했었지!
최근에 공무원 교육원에서 낯선 사람들과 부대끼며 다시금 이 감각을 느끼곤 했다. 맞다, 나 새로운 사람들이 좀 어려웠지!
길진 않았지만 길게 느껴졌던 수험기간 동안은 아주 익숙하고 편안한 이들만 만났다. 가족과 애인, 그리고 가끔 소수의 친구들 정도. 내가 죽상으로 앉아있어도 얘 성격이 왜 이 모냥이 됐지, 하고 흘겨보는 게 아니라 공부가 많이 힘드냐며 걱정해 줄 사람들만 만난 셈이다.
나를 시험하지 않는 환경에서는 나를 평가할 수 없거늘, 이 간단한 진리를 망각하고 요상한 자신감을 가졌었다. 오호, 이제 사람과 있어도 기가 빨리지 않네! 사회성 업데이트 완료!
하지만 교육원에서 끊임없이 다채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나의 근거가 부족한 자신감은 금방 쨍그랑- 하고 산산조각났다. 나는 여전히 낯을 많이 가렸으며 새로운 사람이 여전히 불편했고, 나만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결이 잘 맞는 사람과 1:1로 만날 때는 그래도 편안한 마음으로 친해질 수 있었지만, 낯선 불특정 다수 사이에선 기가 아주 쪽쪽- 빨렸다.
그래서 학창 시절부터 이어져온 '사교적이고 낯가림 없으며 외향적인 이들'에 대한 역사 깊은 동경을 다시금 마주하게 되었다. 나이가 이십대 후반인데 십대 중반에 했던 생각을 다시 소환하다니, 아주 강산보다 더 우직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각설하고, 어린 시절부터 조용하고 얌전한 모범생이었던 나는 친하지 않은 사람과도 편하게 대화하며 에너제틱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분위기를 주도하는 이들이 매우매우매우 부러웠다. 반마다 꼭 있는 목소리 크고 털털하고 성격 좋은 그 친구들.
신뢰받는 공무원 인재양성을 표방하는 교육원도 실상은 동기들과 안면을 트고 가까워지는 것이 비공식적 목표인 곳이기에, 소위 말하는 슈퍼 E 친구들이 아주 돋보였다. 아니, 우리 오늘 처음 봤는데...아직 별로 안 친한데 어쩜 그리 신나게 이야기를 잘 이어나가니? 비결이 뭐냐고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특히나 소위 말하는 '텐션', 즉 에너지 넘치는 모습이 차분한 내겐 없는 모습이라 닮고 싶었다.
아무튼 교육원을 수료하는 그날까지, 내적으로 꽤 많은 고민이 있었다. 그냥 나답게,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적당히 낯가리고 적당히 얌전히 지내다 그중 마음 맞는 일부와 깊어질 것인가, 아니면 나를 아예 뜯어고치는 심정으로 에너지 넘치며 사교적인 새로운 자아를 연출해야 할까.
...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해답 없는 고민에 대한 답을 찾기 전에 교육과정이 끝났다! 사실 후자의 시도를 해보고자 낯선 사람들 앞에서 호탕하게 웃고 텐션을 높이고자 노력했지만 살아오던 방식이 있기에 사람이 크게 바뀌진 않았다. 그냥 내 기력만 잔뜩 빨리고 살만 쪽 빠졌다... 그리고 지금 내린 결론(보다는 중간풀이에 가까운 무언가)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변화가 아닌 성장을 지향하자' 정도가 될 듯하다.
갖지 못한 무언가를 동경할 때에는 가진 것은 안 보인다. 그래서일까, 처음 본 이들이 들려준 진실한 칭찬보다는 내가 발견한 스스로의 부족함의 부피가 더 커 보였던 순간이 많았다. 하지만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갖게 된다면, 아마 지금의 내 장점들은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다. 활달하고 시원시원한 목소리를 지닌, 매사 빠릿한 누군가가 된다면 아마 지금처럼 차분하게 앉아 글을 쓰며 즐거워하는, 내가 사랑하는 나의 조각들을 잃게 되겠지.
영화 '어바웃 타임'의 장면들이 문득 떠오른다. 주인공은 여동생 킷캣을 위해 시간여행을 하지만 그 결과 본인과 아내 사이의 사랑스러운 딸이 웬 다른 아이로 바뀌어 있는 장면을 목도한다. 사람도 세상도, 심지어 미립자의 물질들까지 서로 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법이라, 하나를 바꾸면 연결되어 있는 다른 것들도 연쇄적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변화보다는 성장이 좋다. 어릴 적 닌텐도로 포켓몬을 하며 얻은 깨달음을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풀 속성 포켓몬인 치릴리를 키우면서 왜 불속성 녀석에게 지는지 분해하면 답도 없다...(치릴리가 낯설다면 이상해씨나 치코리타를 떠올리면 될 듯 하다.) 그것이 풀속성이니깐. 하지만 레벨을 열심히 올려놓으면 불리한 상성 관계에서도 쉽게 이기곤 한다. 연약하던 나의 치릴리는 드레디어로 진화한 후에는 이것저것 재미난 기술들을 배우더니 이제는 꽤나 힘을 쓰곤 한다!
재밌는 건 어떤 포켓몬을 택해도 본인에게 불리한 매치와 유리한 매치가 생긴다는 것이다. 풀속성을 금방 쓰러트리는 불속성 포켓몬은 물속성 공격에는 순식간에 기절한다. 그러니 각자 타고난 성향을 개조하려 들기보다는, 직장이든 인간관계든 본인에게 편안하게 맞는 환경을 찾는 것이 빠를 듯하다. 물론 동시에 본인의 역량을 높이는 노력, 살아가는 데에 도움되는 소소한 스킬들을 습득하려는 노력이 필연적이리라. 내 치릴리가 진화 전에는 얼마나 미덥지 못하게 매번 뻗어버렸는지 생각하며, 나답게 살되 답지 않은 노력들을 시도해야겠다.
마지막으로 오늘 글에 어울리는 니버의 기도문을 덧붙인다.
주여, 제게 허락해 주소서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정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