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의 마지막 장면이 떠 오를때...
저수지에 앉아 있으면, 잊고 있던 장면이 불쑥 올라올 때가 있다.
미끼를 갈아 끼우다가, 찌를 다시 맞추다가, 해가 수면 가까이 내려앉는 순간에.
아무 예고도 없이 병실의 공기가 먼저 떠오른다.
냄새가 먼저 온다.
약 냄새인지 소독약 냄새인지 분간되지 않는, 오래 남는 냄새.
그다음에는 소리다. 낮게 울리던 기계음, 복도에서 지나가던 발소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면이 온다. 침대, 흰 시트, 잡고 있던 손, 끝내 제대로 하지 못했던 말.
예전에는 그 장면이 떠오르면 하루가 그대로 끌려갔다.
몸은 집에 있는데 마음은 병실에 남아 있었다. 한 번 붙잡히면 빠져나오는 데 오래 걸렸다.
그날은 밥도 대충 먹고, 불도 늦게 켜고, 그냥 앉아만 있다가 밤이 왔다.
기억이 아픈 것보다, 기억에 붙잡힌 채 하루를 잃는 일이 더 무서웠다.
저수지에서는 그 장면이 조금 다르게 찾아온다.
아픈 건 여전히 아프다. 그런데 전부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내 앞에는 찌가 서 있고, 바람은 방향을 바꾸고, 물은 계속 흔들린다.
과거가 올라오는 동안에도 현재가 사라지지 않는다. 그걸 몇 번 겪고 나서야 알았다.
기억을 없앨 수는 없어도, 기억에 끌려가는 속도는 늦출 수 있다는 것.
내가 하는 일은 단순하다.
숨을 하나 더 고르는 일.
장면이 올라오면, 예전처럼 바로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한다.
대신 숨부터 본다. 숨이 짧아졌는지, 어깨가 올라갔는지,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그리고 천천히 한 번 더 들이마시고, 조금 길게 내쉰다.
거창한 방법은 아니다. 다만 그 한 번의 호흡이,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 알려준다.
병실이 아니라 저수지에 있다는 것. 그날이 아니라 오늘이라는 것.
그다음에는 눈앞의 사실을 하나씩 확인한다.
찌가 조금 기울었는지, 줄이 팽팽한지, 손끝에 묻은 물기가 마르는지.
물가에서 들리는 소리도 듣는다. 바람이 갈대를 스치는 소리, 멀리서 나는 작은 인기척,
내가 옷깃을 고쳐 잡는 소리.
기억은 과거에서 오지만, 사실은 늘 현재에 있다.
나는 사실 쪽에 발을 하나 더 두려고 한다.
그래도 어떤 날은 병실의 장면이 유난히 선명하다.
아내의 눈빛이 떠오르고, 마지막으로 손을 놓던 순간이 다시 온몸에 번진다.
그런 날에는 낚시를 잘할 생각을 버린다. 잡히지 않아도 괜찮고, 줄이 꼬여도 괜찮다.
그날의 목표는 물고기가 아니라 버티는 일이다. 예전에는 이런 날을 실패라고 불렀다.
지금은 그냥 “오늘은 기억이 가까운 날”이라고 부른다.
이름을 바꾸면 내 마음도 조금 달라진다.
실패라고 부르면 나의 하루 전체가 무너진다.
하지만 “기억이 가까운 날”이라고 부르면, 그날 해야 할 일이 선명해진다.
더 천천히 움직이고, 더 적게 하고, 숨을 한 번 더 고르는 것. 그 정도면 충분한 날이 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길게 붙잡지 않는다.
2편에서 말한 것처럼, 집에 들어오면 순서를 만든다.
물을 끓이고, 컵을 꺼내고, 식탁에 잠깐 앉는다.
그리고 가능하면 한 줄만 적는다. 길게 쓰면 다시 그 장면 안으로 들어가기 쉽다. 한 줄이면 된다.
오늘은 병실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그래도 나는 저수지에 앉아 있었고, 걸어서 집에 돌아왔다.
그 문장을 적고 나면, 기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기억과 내 하루 사이에 아주 얇은 간격이 생긴다. 예전에는 그 간격이 없어서 한꺼번에 무너졌다.
지금은 그 간격 덕분에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 수 있다.
상실 이후의 생활은 대단한 극복보다 이런 간격을 만드는 일에 가깝다.
나는 아직도 병실의 마지막 장면 앞에서 자주 멈춘다.
하지만 예전처럼 그 자리에서 오래 주저앉지는 않는다.
숨을 하나 더 고르고, 눈앞의 사실을 확인하고, 오늘의 순서로 돌아온다.
저수지가 내게 가르쳐준 건 잊는 방법이 아니라, 돌아오는 방법이었다.
다음 글에서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날이 왜 오히려 오래 남는지,
기다림이 내 마음을 어떻게 바꿨는지 적어보려 한다.
요즘의 나는 결과보다, 버틴 시간 쪽에 더 마음이 간다.
오늘의 최소치: 기억이 갑자기 올라오면, 결론 내리기 전에 숨을 한 번 더 고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