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에서 돌아온 날, 집은 여전히 조용했다.
달라진 건 집이 아니라, 내가 그 조용함을 듣는 쪽이었다.
예전에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마음이 먼저 주저앉았다.
불도 켜기 전에 한숨이 나왔고, 신발을 벗는 일조차 오래 걸렸다.
누가 기다리는 집이 아니라는 사실이, 저녁마다 처음처럼 낯설었다.
조용한 집은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자꾸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 같았다.
그런데 저수지에 다녀온 날에는 이상하게 순서가 생겼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신발을 벗고, 손을 씻고, 물을 올리고, 잠깐 앉는다. 특별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그 평범한 동작들이, 무너진 하루를 다시 이어 붙이는 실처럼 느껴졌다.
상실 이후의 시간은 감정보다 생활이 먼저 무너진다.
슬픔은 눈에 보이지만, 더 오래 사람을 흔드는 건 생활의 모서리들이다.
잠드는 시간, 밥 먹는 시간, 설거지를 미루는 습관, 커튼을 닫지 않는 저녁 같은 것들.
마음이 무너지면 생활도 무너진다고 생각했지만, 지나고 보니 반대인 날도 많았다.
생활이 무너지면 내 마음은 더 빨리 무너졌다.
그래서 저수지에서 돌아온 뒤에는 마음을 다독이기보다, 순서를 먼저 붙잡기로 했다.
감정을 정리하는 일은 어렵지만, 순서는 내가 만들 수 있기에, 내 편이 었다.
처음 만든 순서는 아주 단순했다.
집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물을 끓인다.
차를 마시려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주전자의 작은 소리를 듣고 있으면 집 안의 적막이 조금씩 깨져간다.
물이 끓는 동안 손을 씻고, 식탁 위를 한 번 닦고, 컵을 꺼낸다.
그러는 사이에 마음이 따라온다. 천천히, 아주 조금씩.
그다음은 밥이다.
혼자 먹는 밥은 생각보다 어렵다.
누군가와 함께 먹을 때는 그냥 식사였는데, 혼자가 되고 나면 단순한 식사가 아닌 밥이 라는 의미가 커진다.
‘잘 챙겨 먹어야지’라는 말은 맞지만, 그런 다짐은 오래 가지 못 한다. 그래서 다짐 대신 기준을 바꿨다.
잘 먹는 게 아니라, 끼니를 끊지 않는 것. 제대로 차리는 날이 있으면 좋고, 아니어도 한 그릇은 먹는 것.
상실 이후의 식사는 정성보다 지속이 먼저였다.
집안일도 비슷했다.
예전에는 한꺼번에 해치우려다가 며칠씩 손을 놓았다.
지금은 하나만 한다. 설거지 한 번, 빨래 한 번, 바닥 한 군데 닦기.
집 전체를 살리는 건 어렵지만, 한 자리만 살리는 건 가능하다.
이상하게도 한 자리가 정리되면 집 전체가 조금 덜 무너져 보인다. 그 작은 변화가 다음 동작을 부른다.
저수지에서 배우는 건 기다림만이 아니었다.
기다리는 동안 마음이 가라앉는 속도를 보게 되고, 그 속도를 집으로 가져오게 된다.
저수지에서는 찌를 오래 바라본다. 집에서는 물이 끓는 주전자를 본다. 저수지에서는 바람이 방향을 바꾸는 걸 본다. 집에서는 커튼이 조금 흔들리는 걸 본다.
달라진 건 장소뿐인데, 그 시간의 결이 비슷하다.
서두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물론 늘 잘되는 건 아니다.
저수지에 다녀와도 문을 열자마자 다시 무너지는 날이 있다. 신발도 못 벗고 한참 서 있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예전 같으면 스스로를 더 몰아붙였을 것이다. 요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늘은 그런 날”이라고 말하고, 순서를 더 줄인다.
물만 끓이고 끝내도 된다. 컵만 씻고 끝내도 된다.
하루를 완벽하게 세우지 못해도, 완전히 놓지 않는 쪽을 택한다.
저수지에서 돌아오면 집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여전히 같은 현관이고, 같은 식탁이고, 같은 저녁이다.
다만 내가 집 안에서 취하는 첫 번째 동작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동작이 달라지면, 이상하게도 그날의 끝이 달라진다.
예전에는 저녁이 무너지는 시간이었다.
지금은 저녁이 하루를 다시 묶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매번은 아니더라도, 가끔은 분명히 그렇다.
그 ‘가끔’을 만드는 힘이 생활에 있다는 걸, 저수지에서 돌아온 날들 덕분에 알게 됐다.
아직도 집은 조용하다.
하지만 이제 그 조용함이 나를 삼키기만 하지는 않는다.
어떤 날에는 그 조용함 속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나고, 컵을 내려놓는 소리가 나고,
내가 밥숟가락을 드는 소리가 난다. 그 소리들은 작지만 분명하다.
그 것은 살아 있는 쪽에서 나는 소리들이다.
다음 글에서는 병실의 마지막 장면이 갑자기 떠오를 때,
그 기억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내가 하는 일을 적어보려 한다.
저수지에서 배운 건 잊는 법이 아니라, 숨을 하나 더 고르는 법에 가까웠으니까.
오늘의 최소치: 집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물을 끓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