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진한 명과 암에 대하여
“영업 직군 외 희망하는 부서가 있습니까?”
1년 전 모 기업 이직 면접 때 받았던 질문이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고민했었다. 당시에는 물론 면접용 답변을 성실하게 해서 넘어갔지만, 집에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론은 “그래도 영업 할란다!” 였다.
영업의 최고 장점은 역시나 ‘자유’다.
일반 사무직 동료분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것이 근무시간에 바깥을 다닌다는 것이었다. 날이 좋아서, 혹은 비가 많이 와서, 때론 지난밤 회식자리에서 과음을 해서 등등 수많은 이유로 일을 제낀! 적이 많다. (개방된 화장실이 있는 건물의 무료 지하주차장은 영업사원들의 사랑방과도 같다!)
교과서적인 영업사원이라면,
연간 -> 월간 -> 주간 -> 일간 계획을 짜고 그 계획에 맞춰 근무하는 것이라고들 교육받곤 하지만, 실제 그렇게 FM대로 실행하는 분은 아직 본 적이 없다. 돌이켜보면 나는,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고민이 될 때 해야 하는 일의 마감선이 급하지 않으면 대부분 하고 싶은 일을 선택했다. 거래처를 방문한다 해도 친분이 있는 키맨과는 차를 마시며 세상 사는 이야기들을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막상 중요한 업무 이야기는 없이 헤어졌다. 일찍 퇴근하고 개인 용무로 시간을 보내다 거래처에서 늦게 나왔다는 거짓 보고를 한 적도 있고, 괜스레 장거리 연애를 하던 여자 친구(현 아내)를 보러 훌쩍 떠나기도 했다. 담배 회사에 다니는 영업 사원 형님과 점심을 함께 먹고, 주차장에서 각자 회사의 샘플을 물물 교환하는 쏠쏠한 재미도 있었다. (당시 시세는 담배 한 보루에 라면 한 박스 혹은 즉석밥 한 박스였다.)
하지만 세상 일이 다 그렇듯이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회사마다, 팀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영업사원은 실적에 따라 평가가 좌지우지된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매출이 적으면 수많은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고, 상사의 매서운 눈초리가 하늘을 뒤덮고, 때로는 원색적인 비난도 감수해야 한다. 첫 직장에서는 실제로 재떨이가 눈앞에서 날아갔고, 뺨을 맞은 선배도 있었다. 상황에 따라 자존심은 조금도 남기지 않은 채 거래처 사장님께 납작 엎드려 매출을 구걸한 적도 있다. 빅딜이 걸린 중요한 일 앞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달성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치열한 싸움을 하고, 그럼에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뒤에 따라올 좌절감도 온전히 내 몫이 된다.
B회사를 근무할 당시, 같이 거래처를 방문하던 팀장님이 차에서 하신 말씀이 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매출에 항상 쫓길 수밖에 없어. 그러다 보면 하루하루 앞만 보고 달리게 되지. 근데 매출이란 건, 열심히 해도 안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신경 쓰지 않아도 오른단 말이야. 스스로 자신의 페이스를 조절할 줄 알아야 해. 무작정 열심히 한다 해도 결과가 계속 좋지 않으면 좌절할 수 있어. 한 달에 하루 꼴로 눈치껏 ‘안식일’을 만들어 봐."
아직까지 나는 나만의 안식일을 만든 적은 없다. 아마 스스로 평가하기에 매 순간 최선을 다하지 않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리라. 현재의 나는 스프린터가 아닌 마라토너의 자세를 선택했다. 더 솔직해지자면, 언젠가는 마라토너가 될 것이라 꿈꾸는 그저 한 명의 산책인일 것이라. 이에 대해 옳고 그름이 있을까 싶지만, 뭐 결과도 책임도 나에게 돌아올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