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윈스타 사이클론 런어웨이 1』을 읽고
SF, 백합, 라노벨. 단언컨대 쉽지 않은 장르의 조합이다.
각각의 장르(SF, 백합, 라노벨)는 자기만의 개성이 뚜렷하여 어우러지기 힘들다는 것이 흔한 인식일 터다. 하지만 과연 그 통념이 유효한가?
예를 들어 「최후이자 최초의 아이돌(最後にして最初の アイドル)」 작가로 유명한 쿠사노 겐겐(草野原々) 작가는 SF와 백합의 조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백합과 하드 SF라는 장르는 제 지론에서는 굉장히 친화성이 높다. (중략) 하드 백합 SF로 만들면 과학적인 설명 장면이 여자들끼리 대화하는 장면이 됩니다. 이게 곧 여러분이 좋아하는 백합 묘사입니다.”
출처: https://www.hayakawabooks.com/n/n71228eb75bb0
쿠사노 겐겐은 SF적 세계관 구축에 서사(백합)를 부여한다. 이러한 특징은 그의 단편 「최후이자 최초의 아이돌」에서 잘 드러난다. 작중 ‘희소돌기아교세포’ 등 낯선 과학 용어들이 나타나지만, 이 어려운 과학 서술은 백합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그렇기에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면서 동시에 재밌는 SF 소설이 된다.
이러한 SF-백합 구조는 쿠사노 겐겐만 가능한 것인가? 겐겐의 SF-백합 지론을 비틀어, 반대로 백합의 서사에 SF로 당위성을 불어넣는 작품이 있다. 바로 『트윈스타 사이클론 런어웨이 1』이다. 작가는 오가와 잇스이(小川一水)이고, 국내에는 《부활의 땅》 시리즈 이후 오랜만에 소개되었다.
『트윈스타 사이클론 런어웨이 1』은 한마디로 SF-백합-라노벨이라는 세 장르가 융합된 작품이다. 작품의 세계관은 정교히 구축된 SF적 설정에 기반한다.
그렇다, 이곳은 직경 14만 킬로미터의 가스 행성, 팻 비치 볼의 대기권이다. 우주 공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농밀한 기체 분자가 가득 차 있고, 거기에 더해 바람도 태풍도 몰아치고 있다.
인체에 해가 없는 물로 이루어진 구름, 맹독인 하이드라진 구름, 아무튼 꺼끌꺼끌한 유황과 적린의 구름. 그 외에는 평범한 호흡이 불가능한 수소와 헬륨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그 바람이 시속 400킬로미터로 소용돌이치는 마경이다.
작품의 주 무대는 거대한 가스 행성. 그곳에는 대기 속을 떠다니며 사는 물고기 형상의 에너지원인 베쉬가 존재한다. 사람들은 베쉬를 포획하는 ‘우주 어업’을 통해 삶을 이어가고, ‘서크스’란 도시형 우주선 사회를 구성한다. 포획된 베쉬는 에너지원이자 우주선의 질료로 사용되며 사회의 원동력이 된다.
우주 어업에는 두 명이 필요하다. 첫째는 ‘디컴퍼’ 역할로, 상상력으로 우주선을 자유롭게 조형한다. 이는 마법이 아니라, 뇌파와 베쉬 재료를 통한 과학적 방법에 기반한다. 둘째는 ‘트위스터’ 역할로, 디컴퍼가 구현한 형태의 우주선을 조종한다. 일종의 조타사라 할 수 있다.
한편, 단일 업종 중심의 밀집 사회는, 미래 우주가 배경이더라도 폐쇄성을 피할 수 없다. 서크스 내에선 디컴퍼는 여성, 트위스터는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규범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으며, 대를 잇기 위해 이 한 쌍은 결혼해야 한다는 사회 규약이 존재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딱딱한(하드한) SF 정합성이 오히려 백합 감정선을 자극하는 점이다.
별들이 쏟아 내려지는 우주, 구름 속에 숨어 다니는 물고기―베쉬. 이 광활한 공간은, 작중 서크스 사회가 얼마나 좁고 폐쇄적인 공간인지 부각한다. 디컴퍼와 트위스터 모두 젠더 구분 없이 수행 가능한 역할로 묘사된다. 기술적으로는 해체된 젠더 구분이 사회에서는 존재한다는 이 아이러니는, 역설적으로 여성 간의 감정이 싹틀 수 있는 서사를 만든다. 결국 소설 속 엄중한 SF적 정합성은, 백합 감성을 자연스럽게 정당화한다.
이곳은 좁은 세계다. 광역 문명과 동떨어졌고, 인구도 고작 30만밖에 안 되는 작은 세계. 인습에 얽매인, 오래된 씨족 사회. 맞선을 보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인생. ──인생의 길을 남이 정해주고, 그걸 거부하면 또 다른 걸 강요당하고, 자유는 언제나 다른 누군가가 쥐여주거나 허락을 받아야 하고, 도망치면 총에 맞는다.
그리고 자신도, 그녀도, 이런 위험천만한 장소에 오게 될 때까지 진짜 속마음을 말하지 못했다. 여기 와서 처음 깨달았다. 자신들은 망설일 필요도 없는 걸 망설이고 있다는 걸.
좋아하는 사람에게, 곁으로 와 달라고 말하는 것을.
소설에서는 두 여성 주인공 테라와 다이오드가 등장한다. 테라는 마치 남성처럼 거대한 체격의 여성 디컴퍼로, 남성 트위스터 맞선에 계속 실패한다. 반대로 다이오드는 만화에 나올 법한 조그마한 은발 소녀로 전형적인 여성상이지만, 기존의 규범을 정면으로 무시하고 여성 트위스터를 자처한다.
작중 이 두 조합은 뜻하지 않게 우주선에 함께 타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내부(사회) 혹은 외부(우주)로부터 위기를 겪게 된다. 처음엔 두 소녀는 단순한 디컴퍼와 트위스터 계약 관계였지만, 점차 서로를 믿게 되고 비밀을 터놓고 진실한 관계가 된다.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주선을 타고 가는 “운명 공동체”로서 둘의 관계가 깊어진다.
전술한 쿠사노 겐겐의 SF-백합 지론은 SF적 세계관 구축을 백합 서사를 통해 지루하지 않게 만든다. 반대로 오가와 잇스이의 백합-SF 소설은 SF적 세계관 구축을 통해 백합 서사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딱딱한(하드한) SF로 비롯된 구조는 이야기 전반을 한없이 진중하게 만들 수 있다. 그렇기에 오가와 잇스이는 라노벨 형식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안─했─거─든─요─!』
“했잖아요, 그러고는 틈만 나면 만져댔잖아요! 게다가 셀 수 없이 물었잖아요, 혹시 시집갈 거냐고! 그거 틀림없는 어필이었죠? 제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는 생각에 은근슬쩍 치근댔던 거죠? 다 안다고요, 지식이 없어도! 다이 씨 분명 경험자 맞죠? 저를 시험했던 거죠? 전부 알거든요? 뭔가 제가 모르는 짓을 하려고 했다는 걸!”
작가는 라노벨식 묘사는 크게 두 방향으로 사용한다. 첫째는 신체 접촉과 과장된 감정 표현을 활용한 코믹한 연출이다. 가슴을 만진다거나, 과장된 행동은 인물 간 긴장을 유쾌하게 해소하며 서사의 분위기를 전환한다. 둘째는 사건 후반부를 과감히 생략하고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는 구성이다. 이러한 서사 압축은 작품의 템포를 지연시키지 않으며, 독자가 이야기 따라가기를 지치지 않게 만든다. 이처럼 라노벨식 묘사는 백합-SF 사이에서 조율하는 장르적 완충 장치로 기능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의 백합-SF(라노벨) 구조가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다. 특히, 백합 장르의 본질을 놓쳐 아쉬운 지점이 존재한다. 백합의 감정선은 여성 간 유대의 정서에서 말미암아 시작된다. “여성 간의 성관계가 나타나면 백합이 아니라 GL이다”라는 식의 논의는 너무나 오래된 논의이니, 본고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라노벨식으로 표출된 여성 간의 첫 유대 장면―가슴 만지기―이 남성으로 인한 성적 트라우마의 반발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백합 장르의 진정성에 의문을 던진다.
“학창 시절에 엄청 많이 만져졌거든요.”
“…………네?”
“남자애들한테, 가슴이나 허벅지를. 툭툭―하고.”
(중략)
“제가 만지는 건 싫지 않으신 거네요. 테라 씨.”
“아. ──네, 넷. 그런 것 같아요. 다이 씨는 만져도 돼요.”
“다행이다.”
이 장면을 보면 가슴을 만지는 것은 단순한 신뢰의 증표가 아니다. 과거 트라우마의 반작용으로 두 소녀 사이의 거리가 좁혀짐으로써, 백합 서사의 기반 자체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안돼! 이건 백합이 아냐!”라고 모든 백합 독자는 외쳐야 한다.
백합 장르의 효시―소위 에스 문학이라 불리는―인 『물망초』(요시야 노부코)를 떠올려 보자. 이 책에서도 분명 근대의 사회상으로 비롯된 여성 억압이 드러나지만, 소설의 핵심은 사춘기 소녀들 간의 미묘하면서 섬세한 심리에 집중하고 있다. 『트윈스타 사이클론 런어웨이』 역시 SF 설정 속에 사회적 억압을 포함하고 있지만. 백합 서사는 단순히 억압에 대한 반발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즉, 백합 장르를 단순히 페미니즘으로 환원, 혹은 상처의 쓰라림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자유로운 감정의 선택과 교류 속에서 완성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백합 장르라고 부를 수 있다.
『트윈스타 사이클론 런어웨이』는 SF적 정합성과 백합의 감정 서사, 라노벨의 유희성을 조화롭게 엮어낸 작품이다. 각 장르는 그 개성이 뚜렷하나, 서로를 침식하지 않고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며 서사의 밀도를 높인다. SF 세계관은 백합 장르의 당위성을 제공하고, 라노벨 형식은 서사의 무게를 유쾌하게 탈바꿈한다. 다만 이 구조 속에서 백합 장르가 요구하는 주체성이 불안정해지는 아쉬움을 남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SF 장르가 타 장르와 어떻게 긴밀하게 융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뛰어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훌륭한 작품이 라노벨 레이블로 나와서 많은 잠재적 SF 독자들에게 닿지 않으리라는 걱정이 든다. 그럼에도 어느 독자가 이 작품을 우연히 조우한다면, 마치 소설 속 테라와 다이오드가 만난 것처럼, 예상치 못한 새롭고 재밌는 이야기가 찾아오리라 장담한다.
『트윈스타 사이클론 런어웨이 1』
저자: 오가와 잇스이 / 역자: 정백송 / 출판사: 데이즈엔터
한줄평: 무한한 SF적 상상력 속에서 도망치듯 피어난, 두 소녀 간의 감정
별점: ★★★★ (4.0 /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