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전환』을 읽고
* 본 서평은 출판사의 서적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오늘날 SF 장르에 있어 단순히 “하드”와 “소프트”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는 효력을 잃고 있다. 『대전환(Eversion)』 역시도 현대 하드 SF 작가로 알려진 앨러스테어 레이놀즈의 작품임에도, 하드 SF라고 단언할 수 없다. 본 작품의 성격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퍼즐-SF”가 가장 정확한 표현이다.
작품은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제시하고, 이를 과학적 상상력과 설정으로 해명하는 구조를 취한다. 책 뒤편에 수록된 해설 제목 “얼음과 해골의 퍼즐”인 것 역시 이러한 작품의 성격을 뒷받침한다.
퍼즐이라니! 혹시 하드 SF처럼 어려워서 머리가 아파질까? 더불어 원제의 Eversion은 위상수학의 ‘구면 뒤집기(sphere eversion)’ 용어에서 따왔다. 그럼에도 작품을 읽어보면, 소프트 SF를 좋아하는 독자들도 쉽게 읽을 수 있다. 작중 과학 및 수학 용어에 관한 직접적인 설명은 등장하지 않고, 등장한 개념은 철학적 은유로만 확장된다. 이를 통해 저자는 하드 SF 느낌을 주지만, 동시에 본 작품의 접근성을 크게 높인다.
실제로 책을 읽으면서, 이쯤에서 「루미너스」(그렉 이건)식의 강력한 수학-펀치를 날릴 것 같은 부분이 있었다. 바로 제목의 의미인 Eversion와 연결하여 수학자 뒤팽이 작품 속 미스터리를 밝혀내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작품 속에서 밝혀냈다고만 언급만 한 후, 곧바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이런 점에서 호불호가 약간 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읽는 내내 가장 강렬했던 인상은 고전 SF 및 고딕 소설의 변주였다. 초반부의 항해와 탐사는 19세기와 20세기의 고딕 및 고전 SF 소설을 환기시킨다. 특히 크툴루 신화로 유명한 러브크래프트 저자를 연상하게 만든다. 「외부자 The Outsider」나 「크툴루의 부름」을 위시한 러브크래프트-풍 (건축적) 풍경 묘사의 디테일과 미지의 공포감이 전반부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절벽의 높이와 질량이 주는 인상에 압도된 나머지, 나는 그 순간 목재와 돛으로 이뤄진 우리의 작은 감옥이 얼마나 하찮은지 실감하고 말았다. 소름 끼칠 정도로 관점이 역전되면서, 우리의 배는 우주의 중심부에 고정된 존재고, 절벽은 무자비하게 움직이는 지구 표면 또는 영원한 것 같은 바위로 이뤄진 진격하는 방패처럼 보였다. 우리는 그 절벽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진 채 축축하고 너털너털해진 피투성이 인간 파편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 같았다. - 88p
고딕적 공포와 SF적 합리주의가 교차한 분위기는 독자와 작중 인물 모두가 미지를 찾게 되는 원동력으로 전환된다. 작중 데메테르호 원정대가 발견한 미지의 구조물은 거대하고 기괴하여, 정체를 규명할 수 없었다. 이 구조물에 대하여 각기 다른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갈등과 긴장을 첨예화한다.
하지만 이곳에 굉장히 흥미로운 수수께끼가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굉장히 중요할지도 모르죠. 이제 내 눈으로 보고 나니, 저 구조물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누가 보낸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질 기본적인 궁금증이죠. - 219p
[여기서부터는 강한 스포]
고전의 재현은 단순히 분위기 차용으로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루프 구조가 도입하여, 모험을 실패할 시 새로운 시간대에서 사건을 재시작한다. 시대‧장소‧기술 등 구체적인 디테일은 달라진다. 하지만 인물 간의 관계 및 핵심 사건의 틀은 유지되며, 그 중심에는 거대한 구조물이 항상 존재한다.
“지나간 일은 지나갔으니까. 다음 시간대에서 만나요, 사일러스 코드 박사님, 그렇게 될 때까지 망자의 잠을 즐기도록 해요.” - 185p
저자는 시간대마다 상이한 과학기술을 섬세하게 배치한다. 그렇기에 저자가 지금이 어느 때인지 명시하지 않았어도, 독자는 자연스레 시간대가 다르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고, 또 해당 시간대가 언제인지 추측할 수 있다.
추가로 저자는 주인공 사일러스가 취미로 쓰는 작품 속 소설을 통해 다음 시간대를 독자에게 예고하는 메타픽션적인 장치를 배치한다. 이러한 반복적 구조는 단순한 줄거리로 흘러갈 고전 느낌의 전개에서 리듬을 만들고, 미스터리의 매력 한층 높인다.
작품 속 시도는 오늘날 현대 SF가 고전, 특히 하드 SF를 어떻게 새롭게 다룰 수 있는지 하나의 방안을 보여준다. 고전 (하드) SF는 시쳇말로 “지루하고 현학적”이라 할 수 있다. SF작가 정소연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쪽 넘게 이어지는 저자의 장광설, 시간 패러독스에 관한 불필요한 유사 과학적 용어 남발 같은 그 시대 과학 소설의 한계(이자 아시모프의 한계)가 남아 있”다.* 이에 대하여, 앨러스테어 레이놀즈는 고전의 묘사를 저자는 적극적으로 차용하면서, 동시에 루프적 구조를 도입해 서사적 재미를 더한다.
*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67985
그럼에도 이 시도는 온전한 성공이라 할 수는 없을 터이다.
작중에서 가장 큰 미스터리인 루프의 진실이 밝혀진 후, 루프는 또다시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루프가 들어간 전개는 더 이상의 긴장감을 잃어버렸다. 또한, 후반부로 갈수록 너무 평탄한 SF적 해명으로 이어져 결말로 다가간다. 훌륭한 미스터리물이라면 응당 있는 후반부의 반전은, 본 작품에는 부재한다는 아쉬움 역시 존재한다. 이 부분이 계속 마음 한 편에 머무는 것은 그만큼 전반부의 과정이 흥미로웠기 때문일 것이다.
더불어 초반에서 비중을 차지하는 메타픽션적 요소 역시 아쉬운 점이 존재한다. 주인공이 쓰는 소설은, 자신이 창조한 허구(소설)의 세계에 스스로 들어간다는 흥미로운 설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루프가 존재한다는 것이 명확히 밝혀지고 메타픽션의 역할은 극도로 축소된다.
정체성의 위기에 처한 0과 1로 구성된 존재일 뿐이지. 그리고 지금도 당신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이 너무 강한 나머지 또 다른 허구의 우화를 만들어 내고 있어. 당신의 과거를 완전한 거짓으로 구축하는 거라고. - 330p
이 메타픽션적 요소를 더 강화해서 미스터리의 해결 요소로 활용할 수 없었을까? 서로 다른 시간대의 간이 통신 수단 등 더 입체적인 요소로 활용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단순히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만 그친다.
기대감이 컸는지 아쉬움을 많이 토로한 것 같다. “그렉 이건, 테드 창을 잇는 매력적인 저자”라는 출판사의 소개가 만든 기대치에 의해, 그 여느 때보다 집중하며 읽었지 않았나 싶다.
그럼에도 본 작품은 정말 재밌게 읽었고, 흥미로운 독서 경험을 선사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고딕 스타일의 변주가 만들어 낸 서사는 SF의 매력은 한껏 느끼게 해 줬다. SF의 근본이 펄프 픽션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이렇게 순수하게 장르적 재미로 읽은 적은 오랜만이었다.
아직 앨러스테어 레이놀즈의 대표작인 거대한 스케일 하드 SF 《Revelation Space》 시리즈가 번역되지 않았기에, 작가의 진면목을 평가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작품만으로 작가의 다른 작품을 기대하게 한다. 더 기대되는 점은 앨러스테어 레이놀즈가 데이비드 브린처럼 천체물리학자라고 한다. 이공계의 매력을 적극적으로 발산하는 작품들은 얼마나 재밌을까? 글을 쓰던 도중 본 작품이 2쇄에 들어갔다는 희소식이 들린다. 하루빨리 이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이 소개되기를 기대해 보자.
『대전환』
저자: 앨러스테어 레이놀즈 / 역자: 이동윤 / 출판사: 푸른숲
한줄평: 고전 SF의 분위기 속에서 맞춰가는 현대 퍼즐
별점: ★★★★ (4.0 /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