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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종영 Feb 20. 2021

바람의 노래, 인연, 인생, 그리고 선택

여느 분들과 마찬가지도 우리 부모님께서도 트롯 경연 프로그램을 즐겨보신다. 거의 매일 저녁 식사 시간이면 어김없이 '미스터 트롯'과 '사랑의 콜센터'가 TV 화면에 등장했다. 당연히 요즘 최고 시청률을 자랑하고 있는 '미스 트롯2' 역시 두 분의 주된 대화 소재다. 


의무적(?)으로 나 역시 가끔 이 프로그램을 보게 됐다. 그러던 중 은가은 씨가 '바람의 노래'라는 곡을 부르는 장면을 시청했다. 예전에 '스타킹'에서 봤던 기억이 있는 가수였다. 유명 애니메이션 주제곡을 커버해 화제가 됐어서 은가은 씨가 노래 부른 걸 몇 번 찾아봤던 적도 있었다. 그녀를 오랜만에 TV에서 봤다는 것도 반가웠지만 경연곡으로 부른 '바람의 노래' 가사가 뇌리에 꽂혔다.


어릴 적 한창 노래를 들으며 다닐 때 가사에 집중하는 편이었다. 가사의 내용이 멜로디, 가수의 음색과 잘 버무려졌던 곡들을 좋아했었다. 그 습관 때문이었을까? 노래 가사 하나하나가 참 마음에 와 닿았다. 1년이 넘도록 사람의 온기를 갈망하게 된 이 시기라 더 그랬던 것 같다.


나를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람들. 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코끝이 시큼할 만큼 초반부터 가사가 마음을 적셔왔다. 지난 1년, 모두에게 최악으로 기억될 한 해였을 2020년. 2020년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난 살아왔던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을 만나리라 확신했다. 여기저기 다니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공유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고립이었다.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자 모두가 동참하고 있지만, 사회적 거리두기는 쉬운 게 아니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태초의 성향이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나에겐 더욱 고된 미션이었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묵묵히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가슴 저린 일단 한 번을 제외하곤, 코로나19로 거리두기가 시작된 뒤부터 글을 쓰고 있는 현재까지 만난 사람이 10명이 채 되지 않는 것 같다. 


가끔 메신저를 통해 지인들과 안부를 주고받기도 했지만, 사회성이라는 욕구를 충족시키기엔 한참 부족할 수밖에. 이런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나뿐 아니라 다들 한 번씩은 고민해보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내가 만나온 사람들, 평범한 환경이었다면 2020년에 만났을 사람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마음 편히 만나게 될 새로운 사람들. 그들과의 인연에 대해서 말이다.


적지 않은 세월을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기질이 특이하다 보니 동년생 친구들에 비해 내가 만난 사람이 훨씬 많지 않을까 감히 자부할 만큼. 그들은 지금 안녕할까? 그리고 그들에게 난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따금씩 생각나는 얼굴들, 그 얼굴의 주인들도 날 한 번쯤은 그리워할까? 독수공방 하다 보니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된다. 


최근에는 미투를 넘어 학교 폭력 전력을 폭로하는 열기가 가득하다. 이 역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협화음 아닌가. 난 지금껏 만난 인연들에게 떳떳한가. 확신할 수가 없다. 사람이란 작은 영향에도 쉽게 휘둘리는 존재다. 나 역시 분위기에 휩쓸려, 어긋난 시대적 오류에 현혹돼, 병든 시스템에 굴복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을 것이다.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서 좋은 사람이 되고자 더 노력한다 했지만,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나. 


지금도 나와 대립해 다툼, 갈등을 겪었던 이들과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그 당시에는 여러 어긋남들을 잘 매듭짓고 털어버릴 만큼 그릇이 크지 못했던 것 같다. 혹시 내가 전적으로 잘못한 일이 있었다면, 난 그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했을까? 감정에 휘둘려 엉망으로 끊어버린 인연들도 너무 많은 듯싶다. 주변인에 대한 궁핍함이 커져버린 이 즈음에 그 당시의 선택들을 안타까워하게 된다.


물론 평범한 인간이라면 겪을 수 있는 일들이겠지. 성인(聖人)이 아니고서야, 아니 성인도 인간관계는 완벽하지 않았다. 제자와 의견 차이로 대립하거나 부모를 등지기도 했으니 말이다. 인연으로 말미암아 겪는 희로애락은 인간의 숙명일 거다. 가사에서 알려주듯이 그저 살아가는 방법뿐이겠지. 그러다 보면 인연을 더 돈독히 하고, 그들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을 깨달을 수 있겠지. 그 신념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경험했으면서도 아직 답을 찾지 못한 것도 있다. 이 역시 더 살아가면 알 수 있을까? 잠깐 언급했던 단 한 번의 일. 작년 말 대학 동기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어떤 눈치도 채지 못했는데, 허무하게 가버리고 말았다. 대학 졸업하고 각자의 인생을 걷다 보면, 그리고 누군가 결혼을 하면 자연스럽게 소원해질 수 있는 관계라곤 하지만 함께 한 추억 많았던 동생이 그렇게 가버렸다.


열정 넘치던 꽃다운 시절을 함께 하고, 장래에 대한 고민 많던 시기에는 이를 이겨내고자 함께 도심을 떠나기도 했던 녀석이었는데. 이후 각자의 갈림길에서 헤어져 수년간 서로 생일 때마다 안부 정도 주고받기만 했다. 만약 지난해 그 녀석의 생일 즈음 얼굴조차 보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뼈아프게 후회했을 것이다. 


보통 장례식장을 가면 생각과는 다르게 조문객들 분위기가 무겁지 않다. 가늠했던 이별이었기에 그게 가능했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자연스레 서로 안부를 묻고 떠난 이를 기리는 게 자연스러운 조문 경험이었다.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그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따듯한 육개장 먹으며 서로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해야 하는 타이밍인데, 모두가 굳은 얼굴을 펴지 못했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을 만큼 어색한 기류는 장례식장을 나와서도 내 몸을 한참이나 짓눌렀다.


장례식장에서도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이 존재했다. 그래서 최대한 지키고자 했지만 그곳에서 발걸음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학 다닐 때 과대표를 했었기에 동기들을 대표해서라도 남고 싶었을까? 최대한 동생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그 녀석의 가는 길 놓치지 않고 모두 담아두고 싶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뒤돌아선 뒤 발인하는 날 다시 찾아갔다. 더 후회하고 싶지 않았기에, 동기 서넛과 동생의 가는 길을 배웅했다.


그 녀석의 형님과 아버님께서 눈물과 함께 우리에게 전하셨던 말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먼저 그렇게 가버린 녀석의 인생을 원통해하시던 그 모습을 보며 난 참회의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겠다고 선뜻 먼저 만나자고 하지 못했을까. 가볍게 만나 커피 한 잔 하면서 보통의 시간을 나눌 기회가 수없이 많았을 텐데. 그리고 다른 지인들과도 왜 그러지 못하고 있을까. 그냥 연락 한 번 하면 될 것을.


이 암흑의 시기가 지나면 분주히 예전의 모습을 찾아야겠다. 소중한 이들과의 인연보다 중요한 게 뭐 있을까. 충분히 챙길 기회가 있을 때 놓치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동기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래도 어렴풋이 이해는 간다. 나 역시 해서는 안 되는 생각에 몰입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누구나 저마다의 이유로 실패와 고뇌의 순간을 겪는다. 금전 문제, 인생에의 회의, 신념의 붕괴 등 형이하학적인 것부터 형이상학적인 데에 이르기까지 충동으로 향하는 뇌관이 될 거리는 많다. 이를 극복해내느냐 못하느냐의 선택이 인생을 또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코로나가 급습하기 전까지는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 열심히 돈을 벌려고 했다는 게 맞을지도. 이제는 가물가물한 고등학교 3학년 수능 시험이 끝난 직후부터 돈 벌기를 쉰 적이 없었다. 난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험이라는 수능을 망쳤지만, 우습게도 결과에 낙심하기보다는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앞섰다.


그래서 곧장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입시 원서도 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합격보다는 월급을 간절히 바라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재수를 결심했을 때에도 독서실 총무를 하며 돈을 벌었다. 그때 인생 첫 방황을 했던 것 같다. 교복을 입고도 해본 적 없었던 가출을 해 부모님 속을 태웠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에는 그 비를 전부 맞으며 무작정 서울역으로 향하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힘들 수 없었다. 한 달여의 방황 끝에 진로를 결정했고, 운 좋게 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내 세상인 듯 3년을 보냈다. 방심하고 있던 찰나에 또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인간관계를 최우선 가치로 삼았던 내가 그 관계 속에서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받은 순간이었다. 


이 때는 거의 패인처럼 지냈다. PC방에 들어가 거의 2박 3일을 나오지 않고 한 자리에서 멍하니 보냈던 순간이 압권이었다. 퀴퀴한 몰골에 거뭇거뭇 수염도 자랐다. 건장한 20대 청년이라고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통학을 하다 당시 상황 때문에 1년간 머물렀던 옥탑방에서 두문불출한 날도 많았다. 불도 켜지 않고 어두운 방 안에 스스로를 가뒀다. 잘못된 선택도 이 시점에 할 뻔했다.


다행스럽게 이 역시 잘 넘겼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바랐다. 이제는 그만 힘들고 싶다고. 끔찍한 순간을 감당할 자신이 더는 없다고.


아픔을 겪고 나면 성장한다고 하지 않던가. 몇몇 순간을 이겨낸 덕에 사회로 나와서는 거침없이 질주했다. 나를 더 믿게 됐고,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충만했다. 어떤 선택을 하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내가 가고자 점찍었던 방향만 보고 나아갔다.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지인들이나 부모님은 걱정도 많으셨다. 그래도 전진했고 여러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다 2020년을 더 높이 도약하기 위한 해로 삼고 2019년에 많은 준비를 했다. 여러 계획도 세웠다. 희망과 의욕 가득 안은 채 연말을 보냈다.


속절없이 수포로 돌아갈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 해왔던 게 모두 포맷된 느낌이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었고, 거의 백수가 됐다. 이런 무기력감은 느껴본 적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이 나이에 이렇게 빈손일 수가 있나? 앞으로는 어찌해야 하는 거지? 급기야 고민 자체를 포기했다. 잡념조차 들지 않을 만큼 삶의 열정이라는 것이 증발했다.


헬조선을 돌파해보려던 청년들, 큰 꿈을 안고 자신의 사업장을 꾸렸던 소상공인들이 나와 비슷한 심정이지 않을까. 언제 극복할 수 있을지 기약 없는, 겪어본 적 없는 일생의 공백에 모두가 힘겨워하는 시기다. 나 역시 동시대를 살아가는 똑같은 한 사람일 뿐.


실패와 고뇌는 예고 없이 찾아오곤 한다. 그리고 간절히 바랐지만 실제로 눈앞에 닥쳐왔다. 미리 알고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을 텐데 그럴 수가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아직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답을 내리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집 나간 자신감을 수소문하는 것밖에 없다.


코로나 사태를 겪기 전까지 경험했던 암울한 시기들을 극복하면서 내가 깨달은 건 딱 하나다. 그리고 이 깨달음이 주저앉아있던 날 일으켜 세웠다. '내가 나이기에 맞은 굴곡이다. 오직 나만이 극복할 수 있다. 나니까 할 수 있다.' 이번에도 그러려고 한다. 힘겨워하고 있는 내 자아를 나부터 따스히 보듬어주고, 흔들어 깨워보려 한다. 그리고 물어보려 한다. '다시 한번만 더 힘 내볼까?'


그럼에도 실패와 고뇌는 찾아오겠지만 우선 지금 눈앞에 어질러진 것들부터 치워내 보자. 작은 잡념부터 훌훌 털어 버리고 나면 저 멀리서 빛이 들어오는 구멍 하나쯤 볼 수 있지 않을까? 포기는 조금만 더 뒤에 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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