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헤일메리, '박사'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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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운

나는 박사도 아니다. 라일랜드 그레이스 같은 사람이 ‘박사’라면 말이다.


어느 날, 태양의 밝기가 조금씩 약해지는 현상이 관측된다. 태양은 지구라는 거대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에너지원이다. 즉, 태양이 어두워진다는 것은 균형의 붕괴를 의미한다. 온도는 낮아지고, 식물들의 성장은 느려지며, 인류의 식량 생산량이 처참하게 줄어들 것이다. 일단 영화에서 언급되는 문제들은 이 정도이지만, 이로부터 도미노처럼 이어질 재앙들은 말할 것도 없이 심각하다.


이 절망적인 인류의 멸종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그레이스 박사(라이언 고슬링 배우)’는 ‘타우 세티’라는 항성으로 향한다. 긴 수면에서 깨어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지금 있는 곳은 어디인지, 심지어 왜 자신이 여기에 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일반인이라면 혼란에 잠식당할 상황이지만, 그는 그 대신 질문을 던지면서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서서히 돌아오는 그레이스의 기억과, 죽어가는 태양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현재를 교차하며 진행된다.

[프로젝트 헤일메리] 포스터. 라이언 고슬링 배우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그레이스라는 인물에게 거대한 벽을 느꼈다. 그는 중학교 교사로 일하는 평범한 과학자로 자신을 포장하지만, 그의 지적 능력은 말 그대로 엄청나다. 일단 그는 ‘분자생물학’ 박사이다. 그것도 전 세계에 500명이 채 되지 않는 ‘외계 생물 추정학’ 전문가. 이런 소규모 분야에서 주류에 반대되는 자신만의 독창적 이론을 주장한다는 것은 그가 괴짜이거나, 천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날고 기는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꽤 비범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심지어 학계의 연구자들은 그를 인정하고 있다-원작)


가만히 보면 그레이스는 모르는 과학 분야가 거의 없다. 전공인 분자생물학은 기본이고, 미생물학에도 소양이 있다. 천문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살았으며, 자연스럽게 중력가속도를 계산해 낼 정도로 물리학에 익숙하다. 외계 존재인 로키가 내는 소리를 분석하고, 곧장 그것을 번역하는 프로그램을 뚝딱 구현해 낸다. 게다가 그는 조종사가 아님에도, 고난도 우주선 조종을 곧잘 해내기까지 한다. 어떤 분야에 통달한 과학자에게 더 이상 분야라는 구분은 의미가 없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아마 나라면 로키와 소통은커녕, 우주 미아가 되어 지구보다 먼저 먼지로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진짜 벽을 느낀 지점은 그의 지능이 아닌, ‘문제를 대하는 태도’에 있었다. 그는 결코 본인 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동료들의 시신 곁에 홀로 남겨진 참담한 상황에서도, 기억의 파편을 붙잡고 자신이 아는 지식들을 총동원해 답을 찾아낸다. 그리고 마침내 문제를 해결했을 때, 그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웃는다. 그 미소를 볼 때마다 나는 왠지 그가 사명감이라는 무거운 짐보다, 눈앞의 호기심을 해소하는 기쁨에 더 깊이 매료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위부터 차례대로 평범한 중학교 교사인 척 하는 그레이스, 미생물을 연구하는 그레이스, 우주선을 운전하는 그레이스 (Thumbs up!)

어느 순간, 내 머릿속에서도, 이제는 흐릿해져 버린 기억 하나가 그레이스의 그것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박사 과정을 마칠 무렵, 학과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연구는 타고난 사람들이 하는 것 같아.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일부 말이야.”

그때는 교수님이 말한 그 사람들이 단순히 머리가 좋은 사람들을 뜻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영화를 보니 이제야 알 것 같다. 교수님이 말씀하신 ‘재능’이란 그레이스 박사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문제를 마주하고 행복해할 줄 아는, 어떤 상황에서도 연구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잃지 않는, 누가 봐도 천생 과학자가 어울리는 저 남자처럼 말이다. 나는 그 긴 시간 연구를 하면서 저렇게 행복해했던가. 언제 나는 저 들뜬 미소를 잃었던가. 나는 그에게 경외심을 느끼는 동시에, 마음 한편에서는 질투가 일어나기도 했다.


비상한 머리와 멈추지 않는 열정, 엉망으로 쓴 안경이 어색하지 않은 잘생긴 얼굴에, 다부진 몸과 유머 감각. 그리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선한 마음까지. 그가 허구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신은 가끔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프로젝트 헤일메리] 공식 예고편. 스트라트 (산드라 휠러 배우)

하지만 ‘용기’나 ‘지혜’라는 단어만으로는 그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원작에서 지구의 위기를 알게 된 그레이스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자문한다.

“이 세계를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지 못한다면, 세계가 존재하는 의미가 뭐겠는가?”

결국 그레이스를 떠밀고 지탱하는 것은 거창한 영웅주의가 아니라, 과학과 아이들을 포함한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고 싶어 하는 ‘다정함’이었다.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을 외면하지 못하는 그 다정한 성정이, 결국 인류를 외면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 그를 선별해 우주로 보낸 에바 스트라트(산드라 휠러 배우)의 안목에, 그리고 그레이스의 따뜻한 마음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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