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봄을 준비하는 우리들의 '스토브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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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운

야구, 특히 우리나라 프로야구는 엄연히 계절 스포츠라 할 수 있다. 3월 말, 봄이 되어 날씨가 따스해지면 프로야구 정규리그가 시작된다. 10개 구단이 온 힘을 다해 맹렬하게 부딪히는 뜨거운 여름이 지나가면, 상위 성적 팀들의 진검승부, ‘가을’ 야구 토너먼트가 펼쳐진다. 마지막으로 가을 야구의 우승 팀을 가리면서, 세 계절에 걸친 시즌이 끝나고 나면, 경기장을 가득 채우던 팬들의 응원과 함성은 사라지고, 야구장은 차가운 정적에 잠긴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고요한 정적 뒤에 숨어, 경기장의 다음 함성을 준비한다. 바로 ‘스토브리그’다.

[스토브리그] 포스터. 공식 홈페이지 출처 (2019, SBS)

스포츠 드라마의 전개는 어느 정도 정해진 공식을 따른다. 만년 꼴찌였던 약체팀이 강팀으로 성장해 나가는 언더독의 반란, 초심자였던 주인공이 우연한 계기로 운동을 시작해 어엿한 선수로 성장하는 이야기, 그리고 오합지졸 팀의 화합과 단결. 스포츠 드라마는 주로 이런 흐름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그 과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정과 우정을 통해 관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주인공은 경기장 위에서 뛰는 선수 혹은, 그들을 지휘하는 감독의 시선을 선택하게 된다.


하지만, 드라마 ‘스토브리그’는 조금 다르다. 이 드라마의 시선은 그라운드 위가 아니라, 그 뒤편, 구단 사무실을 비춘다. 신임 단장 ‘백승수(남궁민 배우)’를 중심으로 마케팅팀, 운영팀, 스카우트팀 등, ‘스토브리그’는 구단이라는 거대한 집단을 운영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프런트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 드라마에서 선수들은 주연이 아니라, 스토리를 전개하기 위한 매개체에 가깝다. ‘스토브리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승리를 설계해 나가는 자들의 치열한 기록이다.

왼쪽부터 백승수(남궁민 배우), 이세영(박은빈 배우), 유경택(김도현 배우), 임미선(김수진 배우)

백승수 단장이 부임한 뒤로, 만년 꼴지 팀 ‘드림즈’는 곪아있던 부분들을 하나둘씩 도려내기 시작한다. 그의 판단력과 결단력은 시릴 정도로 냉정하고 단호하다. 처음에는 직원들도 그런 백승수의 모습에 반발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과정을 통해 드림즈의 우승을 향한 불꽃은 다시 타오른다. 선수 개인의 기량과 팀워크가 승리의 핵심인 것은 맞지만, 그 기량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방해물을 치우며, 팬들의 사랑을 다시 불러 모으는 이들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한지를 드라마는 증명해 나간다.


사실, ‘스토브리그’는 스포츠의 탈을 쓴 ‘오피스 드라마’이기도 하다. 이해되지 않는 요구를 하는 상사, 파벌을 나누어 싸우는 동료들, 매너리즘에 빠져 무기력하게 시간만 보내는 조직의 모습은 우리의 직장 생활과 일견 닮아 있다. 우리는 드림즈의 프런트를 보며 내 옆자리에 앉은 동료를 떠올리고, 그들의 고군분투에 나의 직장생활을 투영한다. 이제는 한 사람의 직장인으로 살고 있는 나 또한 그러하다. 결국 내가 드라마를 보면서 백승수라는 인물의 활약에 열광한 건, “나도 저런 상사 밑에서 일해보고 싶다.”라는 갈망 때문이다. (물론, 엄청나게 힘들겠지만) 시스템의 부조리를 걷어내고, 오직 실력과 논리로 팀원들을 설득하며, 조직이 나아가야 할 목표를 확고히 정해주고 앞장서는 리더. 그런 리더를 따라가며 무기력했던 동료들은 활기를 되찾고, 팀은 앞으로 조금씩 나아간다.


‘드림즈’라는 화로를 둘러싸고 앉아, 고민하는 그들의 겨울은 어떤 면에서 정규 리그보다 더 뜨겁고 열정적이다. 화려한 조명도, 승리의 함성도 없는 경기장의 뒤편에서 누구보다 치열한 겨울을 보내는 이들을 보며, 우리는 그들에게 공감하고 위로를 받는다. 우리 역시 각자의 직장에서 자신만의 스토브리그를, 혹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정규 리그를 묵묵하게 버텨내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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