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은 오답, 장항준이 끓인 설렁탕 한 그릇

#에세이 #왕과 사는 남자 #영화 #박지훈 #유해진 #유지태

by 해운

잠들 준비를 마치고 침대 위에서 뒹굴뒹굴하던 여느 날, 영화를 보러 가자는 연락을 받았다. 무슨 영화냐 되물었더니, 최근에 나온 사극 영화가 꽤 재미있다는 것이었다. 제목만 들었을 때는 왕을 보좌하는 내시나 호위무사에 관한 내용인 줄 알았는데, 영화는 단종에 관한 이야기라 했다. 그때부터 흥미가 조금 생겼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나온 영화나 드라마 중에서 단종만을 다룬 작품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숙부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유폐되어, 가장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왕. 그의 비극적 생애가 그대로 담긴 듯한 묘호, 단종은 이름만 들어도 왠지 처연함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미디어에서 소모되는 단종의 이미지도 늘 비슷하다. 핏기도 빠지지 않은 앳된 얼굴로 용상에 무력하게 앉아 있다가 조용히 극에서 사라지는 역할. 그의 퇴장과 함께 극의 스포트라이트는 자연스럽게 숙부인 세조에게로 넘어간다.


사극은 징검다리와도 같다. 수면 위로 드러난 돌들처럼 띄엄띄엄 놓인 역사적 사실들을, 작가는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이어 나간다. 그 과정은 야사에 근거하기도 하고, 때로는 작가 본인의 상상력에 기반하기도 한다. 그런 관점에서 단종은 굉장히 어려운 소재라 생각한다. 징검다리를 만들 돌이 많은 것도 아니거니와, 돌 하나하나가 너무 크고 애처로워 쉽사리 두드리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저 수면 아래에 어떤 이야기가 흐르고 있을까 상상하는 사이, 좁은 강은 그의 생애만큼 빨리 끝나버리고 만다. 변명이지만, 그런 이유로 나는 이 영화가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제목 외에 들은 정보가 한 가지 더 있었다. 유해진, 박지훈 그리고 유지태 배우가 주연으로 출연한다는 것이었다. 명단을 듣자마자 박지훈 배우가 단종이라는 것을 알았다. ‘약한 영웅’에서 보여주었던 연기와 그의 눈매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문제는 유해진과 유지태 배우였다. 두 사람은 이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맡은 것일까.


단종에서 세조로 이어지는 역사적 배경에서 단종 외에 극에 등장할 만한 인물에는 누가 있을까.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세조와 그의 책사 한명회이다. 그러하다면 당연히 유지태 배우는 세조를, 유해진 배우가 한명회를 맡았을 것이 틀림없었다. 남들보다 작은 덩치에 거무접접한 얼굴, 그러나 그런 외형이 얕보이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계략과 현란한 말솜씨. 그것이 내가 가지고 있던 칠삭둥이 한명회에 대한 이미지였고, 유해진 배우는 그런 한명회에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왕과 사는 남자] 포스터. 왼쪽부터 유해진 배우, 박지훈 배우


확신에 찬 나는 더 이상 정보를 찾아보지 않고 영화를 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대망의 약속 당일, 나는 영화관 건물 로비에서 커다란 포스터를 마주했다. 포스터 속 유해진 배우는 남루한 차림으로 곤룡포를 입은 박지훈 배우 옆에 서 있었다. 내가 예상했던 그림과는 조금 달랐다. 한명회는 왜 저기에 저렇게 서 있을까. 대체 어떤 심계를 부리려고 하기에 본인이 폐위에 일조한 왕 옆에 서서 저리 살가운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일까.


단종이 누구인가. 어린 나이라고는 하나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왕 아닌가. 육백 년이 지난 지금도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였다고 욕을 먹는 세조인데, 그 당시에는 여론이 더 안 좋았을지도 모른다. 여론을 잠재우고, 세조 즉위의 정당성을 가져가기 위해 단종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어내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책사 한명회가 단종과 함께 사는 것이다. 어쩌면 단종이 유배된 마을도, 마을 사람들도 모두 한명회가 만들어낸 무대일지 모른다. 그 무대 안에서 한명회는 끝내 단종의 목숨을 거둘지도 모르고, 어쩌면 함께 지내면서 그에게 감화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 머릿속에는 내가 알고 있던 단종의 이야기들이 나만의 돌다리로 이어지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영화는 절대 이런 내용이 아니다. 사실,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지태 배우가 한명회로 등장한다. 내 돌다리는 처음부터 엉망이었다는 이야기다. 밀려오는 머쓱함에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혼자 상상하기 좋아하는 나에게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고, 도리어 이런 빗나감은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박지훈 배우와 대비되는 날카로운 눈초리에 기왓장 네다섯 개는 쉽게 부숴 버릴 듯한 거구의 한명회는 나라면 상상하지 못했을 인물이었다. 그가 풍기는 위압적인 분위기는 어린 왕의 예정된 죽음을 더 처절하게 만들었고, 우리를 극에 더 몰입하게 만들었다. 저런 남자를 부하로 둔 세조는 대체 얼마나 무서운 인물일까, 하는 생각도 들면서 단종의 무력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유해진 배우가 연기했던 엄흥도도 내 예상을 빗겨간 인물이었다. 그는 유배지를 지키는 보수주인으로, 제목이 의미하는 '왕과 사는 남자'이자,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영화는 주인공인 엄흥도를 마냥 정의롭거나 착한 사람으로 그려내진 않는다. 그는 대의나 명분보다는 그날의 끼니를 걱정하기 바쁜 흔한 백성이다. 마을 사람들은 없어서 못 먹는 쌀밥을 애써 거부하고 물리라는 저 어린 왕이 이해되지도 않는다. 다시 왕이 될 수 없는 어린 왕은 유배지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니 성가시기 짝이 없는데, 밥까지 물려대며 생의 의지까지 없으니 혹여나 죽을까 봐 무시할 수도 없는 존재이다. 그리고 엄흥도는 이런 마음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단종에게 모두 드러낸다. 폐위된 왕보다는 당장 내 곤장을 때릴 영월 군수와 한명회가 더 두렵기 때문이다.


사실 엄흥도는 단종과 가까워진 이후에도, 단종보다는 마을 사람들과 자신의 삶을 먼저 생각했다. 신하들이 단종에게 바친 선물들을 보자마자 마을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생각을 했고, 그 선물들로 단종에게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그의 마지막 선택이 이해되지 않는다. 내가 이해한 엄흥도라면, 분명 단종이 길을 떠나지 못하도록 막았을 것이다. 가게 두었더라도 절대 길을 안내해 주었을 리가 없다. 그의 아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어린 왕의 목숨이 내 아들의 목숨보다 중요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장항준 감독은 끝내 엄흥도가 단종의 도주를 돕는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의 속내나 감정선이 온전히 이해되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엄흥도는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기에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더욱 대단하고 의미 있게 느껴지기도 하고, 덕분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더 아프게 느껴져, 여운이 길게 남는 연출이 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이번 장항준 감독의 작품도 엄흥도와 비슷한 면이 있다. 그의 영화는 요즘 나오는 영상들처럼 자극적이거나 중독적이지는 않다. 그 대신 평범하면서도 인간적인 따스함이 담겨 있는 것 같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불안하지 않다. 마라탕보다는 설렁탕 같달까. 발품을 팔아 다시 찾아 먹지는 않겠지만, 가끔 마주하면 기분 좋게 먹을 만한, 조금은 예스럽지만, 오랜만에 마주해 반가운 느낌의 영화였다.

작가의 이전글나를 사랑하는 두 번째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