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는 두 번째 방법

#에세이 #멜로가체질 #드라마 #천우희 #전여빈 #한지은

by 해운

"드라마를 왜 봐? 그것도 취미가 되나?"


대학생 때까지만 해도 “취미가 무엇이냐?”는 말에 “드라마 보는 것을 좋아한다”라고 대답하면 열에 일곱은 이런 반응을 보였었다.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의 표정에 주눅 들어 어느 새부터인가 드라마를 즐겨 본다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게 되었는데, 돌이켜보면 그들도 나를 공격하려고 꺼낸 말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들도 종종 드라마를 봤을 테니까. 다만, 드라마를 보는 게 취미라는 말에는 공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사실 드라마는 취미라 하기에는 각박한 부분들이 있다. 하나의 드라마를 완주하기까지는 평균 영화 상영 시간의 여덟 배에 달하는 시간을 들여야 하고, 그마저도 일주일에 두 편씩 보면서 다음 화가 나오기를 매주 기다려야 하니까. 바쁜 일이 생겨 보지 못한 날이면 꼼짝없이 재방송을 기다려야만 했고, 그럴 때면 다음 화를 기다리던 설렘보다는 놓쳐버린 이전 화에 대한 답답함이 더 커지고는 했다. 그만큼 하나의 드라마를 완주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와 애정을 요구하기 때문에 드라마는 ‘챙겨본다’고 하는 거 아닐까.


언제부터인가 드라마가 취미라는 말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는데, 이건 다 넷플릭스와 티빙, 디즈니플러스 덕이라고 생각한다. 정기권을 끊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든 원할 때마다 시청할 수 있고, 원할 때마다 끊어볼 수 있게 되었으며, 방영하는지조차 몰랐던 지난 드라마들도 찾아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심지어 어떤 드라마는 오픈 첫날에 전편을 모두 올려주기도 한다. 정말 정주행하기 좋은 세상이 아닐 수 없다.


나 또한 이런 세상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놓쳐버린 드라마를 몰아보고, 쏟아지는 신작들을 감상하기도 하고.

그중에서도 최고는 재밌게 보았던 드라마들을 다시 정주행하는 것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도 봤던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이라고 하지 않은가.

[멜로가 체질] 포스터, 공식 홈페이지 출처 (2019, JTBC) 왼쪽부터 은정(전여빈 배우), 진주(천우희 배우), 한주(한지은 배우)

[멜로가 체질]은 이번 달까지 포함해 벌써 열한 번을 사랑한 작품이다. [극한직업]으로 유명한 이병헌 감독이 연출한 이 드라마는 서른에 도달한 세 여자와 주변인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하나 내용들을 들추어보면 진중하고 어두운 내용들이 꽤 섞여 있는데, 극을 이끌어가는 특유의 분위기와 음악, 위트들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어준다. 한 번은 영상을 보지 못한 채 소리로 나오는 인물들의 대사만 들은 적이 있는데, 일상적인 티키타카와 농담의 온도가 내 마음에 들어서인지 라디오처럼 편하게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만큼 이 드라마의 대사들과 내레이션이 하나같이 내 취향을 저격한다.


이 드라마의 또 다른 매력 포인트는 황당한 신선함이다. 이제껏 한국 드라마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일상다움이 녹아있다는 점은 물론이고, 불편한 간접 광고를 재미있게 담아내는 방식이나 모니터를 뚫고 현실을 넘나드는 연출들은 드라마를 보고 있던 나를 종종 멍하게 만들었다. 대체 대본에 어떻게 쓰여있길래 저런 연출과 연기를 할 수 있는 걸까. [멜로가 체질]은 내가 처음으로 대본을 구매하고 싶어 찾아본 드라마였다.


2019년, 처음 이 드라마를 봤을 때 나는 공명 배우가 맡았던 재훈에게 이입했었다. 유튜브에 떠도는 클립들에 달린 댓글을 보면 가장 이해받지 못하는 서사를 가진 인물 중 한 사람인데, 나는 오히려 그런 재훈의 말과 행동이 아리게 와닿았었다. 사회 초년생인 그의 빠릿빠릿함과 어설픔에 공감하기보다는, 아프고 답답한 재훈의 어린 연애를 보며 그런 고통스러운 감정의 존재를 눈치채고 담아낸 감독을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저런 연애를 해봤나. 어떻게 안 거지. 질타와 후회가 두려워 숨기고 있던 마음을 들켜 도리어 웃음이 났었다.


그다음에는 정혜정 작가(백지원 배우)를 보며 나를 괴롭히던 상사의 마음을 헤아리려 했고, 이소진 대표(김영아 배우)를 보며 저런 선배가 어딘가에는 있겠지 하며 희망을 품었다. 네 번을 완주하고 나서야 나는 나에게 모질게 굴던 상사의 마음을 아주 조금은 이해하고 다독일 수 있게 되었고, 동료들의 좋은 점을 더 빠르게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최근에 보았을 때는 임진주 작가(천우희 배우)와 황한주 실장(한지은 배우)을 보면서 불합리한 세상에서 버텨나갈 재치 있는 변명을 얻어가고자 했다. 벌써 열한 번을 반복해서 보고 있는데도 이 드라마는 여전히 나에게 상황에 맞는 의견들과 공감을 던져내고 있다. 드라마를 본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다만 나란 사람은 세상을 대하는 일이 늘 미숙했고, [멜로가 체질]은 그런 나에게 힌트를 던져주는 황금카드였다.

왼쪽부터 추재훈(공명 배우), 정혜정(백지원 배우), 소진(김영아 배우), 홍대(한준우 배우)

돌이켜보면 자그마치 오 년이다. 그 시간 동안 나도, 내가 겪고 있는 상황들도, 주변 사람들도 많이 달라졌을 텐데 이 드라마는 아직도 나에게 메시지를 건네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예전의 나는 어떤 마음으로 이 드라마를 봤었을까. 당시의 상황이나 감정은 어렴풋하게 떠올랐지만, 세밀한 마음가짐까지는 기억날 리가 없었다. 이 드라마가 좋았던 것도, 뭔가 얻어냈던 것도 같은데. 그때의 내가 너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래서 글을 남기기로 하였다. 그날의 나는 어땠는지, 무슨 일들을 겪었는지, 어떤 것들을 보았는지, 얼마나 행복했고 아팠는지. 홍대가 남긴 사랑의 기록들이 은정을 위로했던 것처럼. 지금 내가 하는 생각들이 미래의 나를 토닥일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