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에서 잽을 날린다는 것은 상대에게 가벼운 펀치를 날리면서 상대가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경계하는 행위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행동을 반복하는 것 같습니다. 상대에게 작은 신호를 보내며 나와 상대 사이의 거리를 끊임없이 조절하고 확인합니다.
사회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다 보면 관계의 깊이는 결국 서로에게 얼마나 마음을 열 수 있는지, 즉 신뢰의 범위에 따라 달라진다고 느끼게 됩니다. 어떤 관계에서는 사회적인 모습만 보여주고 싶을 때가 있고 또 어떤 관계에서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꺼내 보이기 어려운 나의 깊은 부분까지도 편안하게 받아줄 것 같다는 확신이 들기도 합니다. 이러한 차이가 관계의 깊이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관계를 나누는 방식과 기준은 모두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관계를 편한 사람과 불편한 사람, 두 가지로 단순하게 나누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편안함의 정도에 따라 여러 단계로 세분화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관계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결국 사람을 대하는 태도 전반에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관계의 단계가 비교적 세분화된 편이라고 느낍니다. 명확하게 선을 긋는다기보다는 하나의 그라데이션처럼 느껴질 때가 많고 어떤 경우에는 사람 한 명 한 명이 각기 다른 단계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단계의 많고 적음은 관계의 유연성에도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단계가 비교적 단순한 경우에는 관계가 쉽게 고정되곤 합니다. 회사에서 만난 사람은 늘 회사 사람으로만
대학교에서 만난 친구는 대학교 동기라는 틀 안에서만 인식되기 쉽습니다. 그 틀에서 벗어나는 교류에 대해서는 의도치 않게 거리감을 두거나 조심스러워지는 경우도 생깁니다. 사실 더 가까워질수록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새로운 기회나 가능성을 만들어갈 수 있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단계에 갇혀 그 잠재력을 충분히 끌어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관계의 단계가 많을수록, 관계를 유연하게 확장하기가 비교적 수월해집니다. 회사 동료이지만 인생의 소중한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이름만 알고 지내던 대학 동기가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기도 합니다. 상황과 필요에 따라 가까운 정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은 큰 장점입니다. 다만 그만큼 인간관계에 쏟아야 하는 에너지가 커져 피로를 느낄 수 있다는 점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관계가 가진 잠재력을 비교적 믿는 편입니다. 지금은 다소 소원하고 형식적인 연결에 불과하더라도 어느 순간 둘도 없는 가까운 사이로 발전할 수 있고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제게 중요한 기회를 안겨줄 소중한 인연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복싱에서 잽은 중요하지만, 잽만으로는 상대에게 유효한 펀치를 날리기 어렵습니다. 계속해서 거리를 유지하기만 한다면 스스로를 지킬 수는 있겠지만 경기의 흐름을 만들거나 의미 있는 순간을 만들어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필요한 순간에는 한 발 더 가까이 들어가 유효한 펀치를 날리고 다시 거리를 회복하며 흐름을 조절하는 선택이 필요합니다.
인간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관계를 멀찍이 유지하며 살아가는 삶에도 분명 장점은 있지만 때로는 관계의 단계를 잠시 낮추고 평소보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야만 얻을 수 있는 신뢰와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중요한 것은 항상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거리를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는 여지를 스스로에게 남겨두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은 인간관계를 넓히거나 깊게 맺으라고 권유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관계를 비교적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유지해 오신 분들께 ‘이렇게도 살아볼 수 있다’는 하나의 관점을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잽으로 거리를 지키되 필요할 때는 한 발 더 들어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삶. 그 역시 나를 지키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제 경험을 통해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이 글이 각자의 인간관계를 다시 정의해 보는 작은 계기가 된다면 충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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