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간소음이 주고 간 선물
근무지 아파트는 700여 세대. 일상에서 늘 마주하는 이웃들이 살고 있다. 서울 도심에서 동북 방향으로 경기도와 맞닿고, 봉화산, 망우산 등 도시 외곽의 산들이 가까이 있어 도심보다 공기도 한결 맑고 차다. 촘촘한 버스 노선 외 지하철 4개 노선과 강릉 선이 연결되는 역이 도보거리에 있어 사통팔달의 교통망을 갖추었다. 아파트 주변에 할인점만 열 곳이고, 오십 년 전통의 우림시장도 가까이 있어 알뜰주부의 발걸음이 늘 바쁘다. 코로나로 인해 하루 두 차례 방역작업을 해온 지 2년이다. 주민 이용률이 가장 많은 승강기 내외부는 꼼꼼한 미화 팀, 현관 입구 계단, 주차장 계단 손잡이, 주 통로, 노인정 등의 시설 주변은 힘 좋은 경비대원이 담당하고 놀이터, 운동기구, 쉼터는 점검을 겸하여 시설관리팀, 입주민 출입이 잦은 관리소 주변은 소장, 과장의 몫이다.
준공 30년이 넘은 아파트라 주차와 층간소음과 관련한 민원이 많다. 허용 주차면의 두 배에 이르는 등록 차량으로 주차 문제는 근본적 해결방안이 마땅치 않으나 층간소음 문제는 다르다. 아파트 층간의 두께가 얇다는 건물 구조적인 하드웨어적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는 소프트웨어적 접근이 필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이었다. 층간소음 민원이 전화로 접수된 다음 날 민원인이 관리소를 찾아와 하소연 겸 민원을 제기한 배경에 관해 설명하였다. 남편이 3교대 근무자라 야간근무 때는 낮에 잠을 자고 저녁에 출근한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아래층에서 무시로 들려오는 악기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이룬다며 악기 소리의 주범은 트럼펫과 피아노라고 했다.
트럼펫과 피아노라. 트럼펫이라면 고교 시절 밴드부 트럼펫 주자였던 형님 덕분에 익히 경험한 바 있어 그 고충이 짐작되었다. 이왕 소리가 나더라도 그 단말마의 비명 같은 소리의 트럼펫이 아닌 색소폰이면 한결 덜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랫집 방문한 후 연락드리겠노라 하고 면담을 종료했다.
다음 날 아랫집을 방문했다. 윗집 사정이 이러저러하니 집에서 악기 연주는 좀 자제해 줬으면 한다는 취지로 민원 내용을 전달했다. 얘기를 듣고 난 아랫집 주민은 마뜩잖은 표정과 볼멘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항변했다. “고교생 아들이 음악 쪽으로 진로를 정해 일주일에 두 번 방과 후 음악학원에 다니고 있다. 수업이 있는 날은 학원에서 두어 시간 연습하고, 수업이 없는 날은 집에서 연습한다. 그래서 아들 방에 방음공사를 했다. 피아노는 본인이 취미생활을 위한 것으로 피아노 내부에 음 소거 장치까지 달았다. 일주일에 두세 번 낮에 연습한다. 이웃에 피해가 없도록 적지 않은 돈을 들여 방음공사며 음 소거 장치까지 했어도 새어나가는 소리까지야 어떡하느냐. 그 정도는 양해해야 하는 것 아니냐.” 양측의 입장 모두 이해할 만했다. “그리 전달하겠으나 그래도 신경 좀 써주셨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관리소로 돌아오며 대화 내용을 되짚어 보았다. 경험상 민원당사자는 본인의 관점에서 주장하기에 대부분 언성이 높다. 그런데 두 분의 경우 본인의 상황과 입장을 차분히 설명하고 동의를 구한다. 어쩌면 잘 해결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날, 아래층 방문 결과를 위층의 민원인에게 전달하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아래층을 만나보니 대화가 될만한 분으로 판단됨에 한 번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면 어떻겠냐. 우리 아파트 층간소음 관리위원회 간사가 마침 이 동의 대표자이니 괜찮다면 자리를 주선해 드리겠다고 했다. 잠깐의 침묵 후 ‘언제쯤 보느냐’고 물었다. 속으로 됐구나 싶었다. 다음 날 회의실에서 처음 대면한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예상보다 길었으나 원만히 해결되었고 드라마 같은 반전도 있었다고 전해오는 간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참 톤이 높아 있었다. 동아리 교육장으로 사용하는 노인정 지하층을 주 2회 트럼펫 연습실로 이용하도록 배려하고 남편이 낮에 집에 있는 날은 미리 알려줘 그 시간에 피아노 연습은 자제하기로 합의하였다고 했다. 그런 합의 후 차를 함께 나누다 위층 주민이 본인도 음악을 전공했다며 원한다면 피아노 연습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아래층 주민은 반색하며 앞으로 언니라 부르겠다고 화답했다고 한다.
서로 이해하고 배려할 줄 아는 두 사람에 대한 층간소음이 주고 간 선물이었다. 동아리 활동이 없는 날 노인정 지하에선 트럼펫 소리가 간간이 흘러나오고, 위층 언니의 족집게 지도에 탄력 받은 아래층 동생의 피아노 실력은 일취월장하여 조만간 체르니 100번으로 넘어가리라. 음악도를 꿈꾸는 고교생 아들의 멋들어진 트럼펫연주를 기대해 본다. 이왕이면 젊은 시절 애청곡이던 트럼펫 명곡 니니 루쏘(Nini Rosso)의 ‘밤하늘의 트럼펫’(Il Silenzio)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