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래동화 신장군과 억만네/구향순
충청남도 문산 지방에는 천방산이라는 높은 산이 있다.
천방산에는 바윗골에서 솟아나는 약수를 먹고 힘이 생겼다는 신 장군이 호랑이를 타고 다니며 살았고, 천방산 아래에는 억만이라는 털이 하얀 개 한 마리를 키우는 억만네가 살았다.
억만네는 새벽 일찍부터 일어나 밤늦게까지 밭을 일구며 농사를 지었다.
“아유 힘들어, 이럴 때는 이웃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나 혼자서는 안 되는 게 너무 많아.”
가끔은 투덜거리기도 하지만 억만네는 자갈밭에서 돌을 골라내며 참깨와 콩을 심고 부지런히 일했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잠에서 일찍 깨어난 신 장군이 안개가 자욱한 천방산 골짜기를 내려보다가 혼자 중얼거렸다.
“천방산 자락을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마을로 만들어야겠어. 나 혼자 사는 것은 정말 심심하거든, 잠에서 깨면 같이 밥을 먹을 사람도 없고, 얘기를 나누며 놀아줄 사람도 없으니 이렇게 심심해서야 이게 사는 거라고 할 수 없지.”
신 장군은 아침밥을 든든히 차려 먹고 일을 시작했다.
“누구든지 이곳에 오면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멋지게 만들어야 해. 우선 산 밑에 사는 억만네가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밭도 만들고 논도 만들어 주어야지. 억만네가 보면 정말 깜짝 놀랄걸, 어이구 기절이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신 장군은 알통이 툭 튀어나온 굵은 팔과 발자국을 뗄 때마다 땅이 쿵쿵 울리는 튼튼한 다리에 힘을 주어 바위를 한쪽으로 치웠다.
“영차, 이영차, 이 바위는 이쪽으로 돌려놓는 게 좋겠군. 바람이 많이 불거나 장마철에 산사태를 막아줄 만큼 튼튼해야 하니까, 아하, 이 나무는 베어서 잘 말렸다가 집을 짓게 될 때 써야겠는 걸, 너무 빽빽하면 나무들은 잘 자랄 수 없으니 한 그루씩 베어 주자. 이야 이 나무는 아주 똑 고르게 잘 자랐구나,”
신 장군은 나무를 베어 집 짓는 재목과 땔감을 만들고, 집 짓고 농사지을 만한 평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루에 100평씩 땅을 일구었더니 꽤 넓은 들이 만들어져 신 장군이 보기에도 마음이 흡족했다.
“이만하면 이웃 마을 서천보다는 작아도 천방산과 잘 어울리는걸.”
이웃 마을 서천은 넓은 들이 있는가 하면 마을 가까이 바다도 있었다. 사람들은 산성 안에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바다의 물고기도 풍족하였다. 그러나 신 장군이 사는 천방산은 높고 험해서 사나운 짐승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산짐승이 무섭기도 하고 평지가 없어 농사지을 만한 터가 없으니 사람들은 당연히 이곳을 멀리하게 되었다.
어느 날 억만네가 밭을 일구고 있는데 산이 쿵쿵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람? 산에 지진이라도 났나?”
억만네는 몹시 궁금하여 산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어머나 세상에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전에 없었던 넓고 커다란 밭이 만들어져 있는 게 아닌가?
억만네는 너무도 놀라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이고 하나님 이게 다 무슨 일이래요? 여기에 누가 이렇게 큰 밭을 만들어 놓았을까요?”
그때였다. 저 멀리서 어떤 남자가 호랑이를 타고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억만네는 호랑이를 타고 오는 남자를 보고 너무도 놀란 나머지 그만 기절을 하고 말았다.
얼마가 지났을까? 정신이 들어 눈을 떴는데, 아주 멋지고 잘 생긴 남자가 호랑이 등에 앉아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억만네는 또 한 번 깜짝 놀라 아예 두 눈을 꼭 감고 말았다.
그때 쩌렁쩌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라실 것 없소이다. 나는 천방산에 사는 신 장군이라 하오. 내가 산에서 내려다보니 억만네가 혼자서 자갈밭을 일구며 고생하길래 내 힘을 잠시 보탠 것뿐이오. 이제부터 여기에 농사를 짓도록 하시오.”
억만네는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믿어지지 않았다.
“저 정말입니까? 정말 이곳에 제가 농사를 지어도 되는 건가요?”
“그렇소 억만네가 이곳에 농사를 지으시오. 저쪽에도 이만한 땅을 만들어 놓을 테니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 주어도 좋을 거요. 나는 여기가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되었으면 좋겠소.”
억만네는 너무 기뻐서 벌떡 일어났다. 새로운 힘이 마구마구 생겨 까마득하게 보이는 밭 끝을 눈으로 재며, 수확을 앞둔 곡식들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집으로 돌아온 억만네는 그날 밤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어머 이게 꿈이야 생시야? 이것은 하늘이 도와주신 게 틀림없어. 저렇게 힘세고 멋진 장군을 보내주시다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
억만네는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것 같고,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신 장군은 참 좋은 사람인 것 같아, 저렇게 공들여 땅을 일구어 놓았는데 나는 무엇으로 보답하지?”
억만네는 고민이 되었다. 무언가 도울만한 일이 있을 텐데, 머리를 긁적거리며 생각하느라 목이 마를 지경이었다. 그때 억만네는 무릎을 탁! 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래 바로 그거야, 물이 있어야 해,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밥을 해 먹고 농사도 짓고 사람이 사는데 물이 많이 있어야지,”
억만네는 아침 일찍 일어나 물을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마침 금복리에서 흐르는 작은 물줄기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신농리에서 흘러오는 물줄기, 또 문장리로 졸졸졸 흘러가는 가느다란 물줄기를 발견했다.
“물이 천방산 밑으로 모이게 물길을 내야겠어. 그러면 쉽게 물을 모을 수 있을 거야.”
억만네는 여자였지만 힘든 일도 척척하다 보니 여장부가 부럽지 않을 만큼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쉬는 날 없이 일만 한 탓인지, 땀을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그만 병이 나고 말았다.
“아이고 어지러워,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속이 메스껍네. 천방산 바윗골에서 솟는 약수 한 모금만 먹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그 약수를 누가 떠온담?”
억만네는 혼잣말을 하며 끙끙 앓았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뱃속은 우르르 우르르 여름날 소나기를 부르는 천둥소리처럼 부글거렸다.
“아이고 나 죽네, 아이고 배 아파. 사람 살려요. 사람.”
억만네는 데굴데굴 구르며 사람 살리라고 외쳤지만, 사람은 아무도 없는 곳이다.
더는 참을 수 없게 된 억만네는 자기가 키우던 개를 부르기 시작했다.
“억만아! 억만아? 이리 좀 와봐 억만아!”
아무리 불러도 억만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녀석이 도대체 어디를 간 거야, 내가 이렇게 아픈데 코빼기도 안 보이니 에이 나쁜 녀석, 혼을 내줄 테다. 아이고 나 죽네 억만아 아이고 어 억,”
한편 억만이는 있는 힘을 다해 산으로 뛰어갔다.
“멍멍 멍멍멍, 장군님 큰일 났어요. 우리 주인님이 쓰러졌어요.
살려주세요. 빨리요. 빨리, 제발요, 엉엉, 엉엉”
신 장군은 숨이 턱까지 차오른 억만이를 안은 채 호랑이를 타고 달리며 다급하게 억만네를 불렀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크게 울렸던지 천방산 짐승들이 벌벌 떨었다.
“이봐요 억만네, 억만네 정신 차리시오. 정신 좀 차려보란 말이오.”
신 장군은 천방산 바윗골에서 떠온 약수를 떠먹여 주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꼭꼭 누르며 닦아 주었다. 그때까지 숨을 헐떡이던 억만이도 혀로 주인의 손등을 핥아주었다.
잠시 후 억만네가 정신이 드는지 눈을 떴다.
“이보시오 억만네 정신이 드는 것이오? 이제까지 한 번도 앓아 본 적 없는 사람이 이게 무슨 일이오?
억만네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도 있었구려, 당신 때문에 내 심장이 멎을 뻔했소이다.”
“아, 예 장군님 어떻게 알고 오셨는지요?”
“허허 참 천방산 자락에 당신 혼자 사는 줄 알았소? 나도 있고, 당신이 키우는 영리한 억만이가 있질 않소.
오늘 억만이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어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오.”
신 장군은 눈물이 글썽글썽한 억만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구나, 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너는 이미 장군님께 달려가고 있었구나.
그런 것도 모르고 너를 잠시 원망했었다, 억만아 미안하고 고맙다. 네가 나를 살렸어,”
그제야 한숨을 놓은 신 장군은 억만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며칠 뒤 건강을 회복한 억만네가 밭에 나가 보았다. 그런데 또 놀랍고 신기한 일을 발견했다. 억만네가 천방산 아래로 모았던 물길이 하나의 내를 이루어 맑게 흐르는 것이 아닌가?
더 놀라운 것은 간지럽게 부는 봄바람에 찰랑찰랑 물결치는 논이었다.
억만네는 금방이라도 모내기를 할 수 있게 준비된 논을 보고 너무 기뻐 소리쳤다.
“와, 놀라워라, 언제 이렇게 넓은 논까지 만들어 놓으셨을까?”
그때였다. 언제 와 있었던지 신 장군이 말했다.
“억만네 이제 혼자서는 일을 하지 마시오. 당신이 또 아프면 내가 견디지 못할 것 같소.”
“이제부터 내가 가까이 있을 테니 힘쓸 일이 생기면 내게 말을 하시오.
그리고 당신이 사는 오두막집 대신 내가 크고 튼튼한 새집을 지어 주고 싶은데 허락하시겠소?”
억만네는 하도 황송하고 고마운 마음에 깊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장군님께서 그리해 주신다면 사양하지 않고 받겠어요.”
신 장군은 억만네의 오두막을 헐고 산에 베어두었던 나무로 집을 짓기 시작했다.
쓱싹쓱싹 톱으로 자른 나무를 스르륵스르륵 대패로 곱게 다듬었다. 그리고 홈을 만든 나무에 다른 나무를 끼워 탕탕탕, 통통통. 망치로 두들기자 멋진 지붕이 만들어졌다.
억만네는 신 장군의 빠르고 신기한 손놀림에 홀딱 반해서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어허 이만하면 집은 다 지어진 것 같군요,
마을이 생긴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면 머물 수 있는 손님방도 만들었으니 넉넉할 거요.
이제는 소달구지가 다닐 넓은 길을 만들 차례요.”
신 장군은 울퉁불퉁 한 길을 삽으로 깎아 고르게 만들었다. 신장군이 있어 일이 수월해진 억만네는 신 장군을 도우며 집 주변에 꽃씨를 뿌리고 나무도 심었다.
그때 신 장군이 말했다.
“억만네가 모아놓은 물은 억만 사람이 먹고도 남겠소. 그러니 이 마을을 억 만촌이라 이름 지읍시다. 앞으로 이 땅에 태어날 후손 또한 억만 명은 될 테니, 대대로 이어가며 당신을 억만네라 부를 것이오.”
“별말씀을요. 장군께서는 마을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돌무더기 땅을 혼자서 다 일구고 사람들에게 나눠주신다니 존경할 따름입니다.”
“어유 그렇게 말하니 쑥스럽소만 그 마음은 고맙게 받겠소. 이제 나는 산으로 가야 하오.
산을 오래 비우면 짐승들이 제멋대로 굴어서 말이오.
앞으로 마을의 위험한 일이나 경사스러운 일이 있으면 알려주시오. 내 마음은 늘 억만네와 함께 있겠소.”
문산 마을 사람들은 신 장군과 억만네가 일군 터전에서 농사를 지어 배부르게 살 수 있었다.
천방산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은 신 장군과 억만네를 마음으로 만난다.
보고 싶었던 아버지 어머니를 만난 것처럼, 그리고 다시 활기차고 행복하게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