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잠을 읽다/구향순

영상문학

by 향순

옥잠을 읽다



얼마나 많이 가두어 두었으면

갇힌 눈물이 살을 뚫고 밀려 나오는 걸까

투명한 비닐 물통처럼 부은 노파의 몸


가장 깊어, 비밀스러웠던 통증의 밤

앙다물었던 빗장을 뜯고 갸륵한 꽃이 핀다


주삿바늘이 꼽혔던 자리들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꽃이 피다니, 꽃이 피다니

꽃은 필 때도 질 때도 참 아프다니까


사고로 죽은 남편과 자식들이 묻힌 곳여

다 썩은 가슴 헤집어 열고

자기들도 한번 피고 싶었다고

바깥바람에 얼굴 한번 내밀어 보는 거여


무늬져 검붉게 젖은 눈시울 아래

차마 못다 한 말들이 종알종알

못다 산 생을 밀고 둥실 떠올라야만 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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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 창밖엔 머뭇거리는 낮의 여운이 붉게 번진다. (로우 앵글 샷)

멀리서 들리는 희미한 병원 소음과 함께 간호사들의 바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창밖의 노을을 바라보는 노파의 쓸쓸한 등이 클로즈업된다.

고독하고 답답한 노파의 마음처럼 한없이 느리게 떨어지는 수액과

변화무쌍하게 번지는 노을을 쫓아가는 노파의 눈빛이 교차한다. (틸트 샷)

앙상한 가지 끝에 종종종 매달린 한줄기 옥잠 봉오리가 병실 침대 옆에 꼽혀있다. (하이 앵글 샷)

조심스럽게 꽃봉오리를 어루만지는 노파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풀샷)

노파가 무슨 말인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힘겹게 팔을 늘어트린다.

플래시 백을 이용하여 서해의 노을을 바라보는 젊은 부부를 불러온다.

달콤하면서도 다이내믹한 음악이 어우러지며 노파는 한없이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핸드헬드 샷)

잠시 후 현실로 돌아온 노파가 괴로운 표정을 짓다가 다시 옥잠화를 바라본다.

노파의 입가에 희미하게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진다. (슬로 모션)

한 번도 꺼져본 적 없는 LED 등이 대낮처럼 병실을 밝히고 있다.

빛이 투과되고 무거워서 들어 올리기조차 힘든 노파의 손이 시퍼렇게 부은 모습과

아슬하게 링거줄이 꼽혀있는 노파의 발을 클로즈업시킨다.

“이렇게 꽃이 피다니, 꽃이 피다니

꽃은 필 때도 질 때도 참 아프다니께,”

중얼중얼 주삿바늘이 꼽혔던 시퍼런 자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노파를 배경으로

애잔한 음악이 잔잔하게 흐른다.

이어서 노파의 눈에 이슬처럼 눈물이 번지는 것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시킨다.

타임랩스로 어디선가 들리는 솔바람 소리와 풀잎 스치는 바람 소리를 불러온다.

풀들이 눕고 다시 일어나는 한적한 산이 있고

키 작은 묘비명 앞에 시든 꽃다발이 놓여있다. (롱 샷)

플래시 백을 이용하여 묘비명 뒤로 노파의 젊은 시절 가족의 모습을 불러온다.

흰색 반바지에 짙은 하늘색 셔츠 차림을 한 40대 중반의 남자가 손을 잡고 걷는 아내의 얼굴을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다.

(청명한 햇살 아래 화이트, 핑크, 붉은색의 배롱나무꽃이 어우러져 한들거린다. 여름의 한복판에서 들리는 상쾌한 매미 울음소리와 더불어 희망찬 음악이 흐른다.)

짧은 머리를 단정하게 빗은 여자가 무릎까지 닿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가볍게 발걸음을 옮긴다.

두 보쯤 떨어진 곳에 청소년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웃으며 따라간다. (줌 인/ 줌 아웃)

(약한 바람 소리와 더불어 야외에서의 행복했던 음악이 잠시 들렸다 사라진다.)

사고로 죽은 남편과 아들이 묻힌 곳을 떠올리며 다시 검붉게 젖은 눈시울로 옥잠화를 바라보는 노파를 클로즈업한다.

(보고 싶어 그리움이 가득 담긴 애잔한 음악이 낮게 깔린다.)

그때 굳게 닫혀있던 옥잠의 꽃봉오리가 열린다. (슬로 모션)

(바람이 불고 새가 지저귀는 자연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꽃이 핀 것을 바라보는 노파의 눈빛이 반짝 빛난다. (클로즈업)

손등에서 투명한 물이 삐져나오는 것과 옥잠화를 번갈아 바라보는 노파의 중얼거림이 들린다. (더치 앵글)

“다 썩은 가슴 헤집어 열고

자기들도 한번 피고 싶었다고

바깥바람에 얼굴 한번 내밀어 보는 거야”

(약간 밝고 희망적인 음악과 함께 침침하던 조명이 꽃과 노파를 향해 밝아진다 )

활짝 피어있는 옥잠화가 보이고

꽃을 바라보는 노파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익스트림 클로즈업)

따뜻하고 부드러운 빛이 병실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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