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영화 비평가 세르주 다네는 1992년, <카포의 트래블링>에서 '영화에서 벌어지는 일이란 감독과 관객의 공모'라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사실 그 표현이 글에서 중대사인 부분은 아니지만, 나는 그 표현으로부터 대단한 감명을 받았기에 앞으로도 그것을 나만의 맥락으로 재해석하여 사용할 생각이다. 영화 혹은 문학에서 벌어지는 '공모'를 나는 만능 측량기구처럼 작품들에게 들이댈 것이다. '감독과 관객의 공모'가 무슨 말이냐하면,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자기 마음대로 찍을 것이고 관객은 자기 마음대로 볼 것이다. 그러나 좋은 영화라면 감독의 의도와 관객의 관람은 어느 한 지점에서 만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공모'이다. 종종 영화나 문학에 대한 어떤 해석들은 지나치게 창작자에게 편의적인 것처럼 보인다. 평론가에게 '꿈보다 해몽'이라는 비아냥을 하기도 한다. 그런 좋은 해설들은 그렇게 평가한 이가 감독이나 작가와 기꺼이 공모하고 때문이 아닐까. 감독이 그 전에 보여준 모습이 너무도 매력적이고 훌륭하기 때문에. 즉 공모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영화에서 드러나는 감독의 의도들이 존중받고 이해받는 것인데, 감독이 관객을 기쁘게 할 뿐 아니라 관객이 감독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내가 '공모'라는 표현을 들고 온 것은, 이 글의 주제인 영화 <서브스턴스>가 여러 의미에서 과격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고어하고 폭력적이며 불쾌감을 조성할 뿐 아니라, 감독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말 그대로 '과격하게' 스크린에 투영하고 있다. 그 과격함에 누군가는 '도저히 못 봐줄 영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현재까지 꽤 좋은 평가를 전문가들과 일반관객 양쪽으로부터 받고 있다. 그러니까, 잔인성과 폭력성, 선정성 등은 영화를 평가할 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공모'의 여부이다. '이 모든 장면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와 공모할 수 있는가?' '이 장면을 이해할 수 있는가?' 서브스턴스를 관람한 대다수의 관객은 "그렇다"고 연호하고 있다.
(이 리뷰는 영화를 시청한 것을 전제로 작성하였다. 따라서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바란다.)
이 영화가 늙음을 주제로 삼고 있다고 얘기하는 것은 하나도 특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좌우간에 그렇다. 주인공 '스파클'은 자신의 노쇠화를 견디지 못하고 '서브스턴스' 약물을 주입해 젊은 클론 '수'를 만들고 그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반대로 스파클은 집 안에 처박히며, 유일한 외출은 서브스턴스를 사용하기 위한 보급품을 받는 것이다. 사회적인 삶과 은폐된 삶의 구분은 서브스턴스를 통한 모체와 클론을 오가는 삶의 실폐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듯하다. 영화 중간, 스파클이 만나는 또 다른 약물 사용자는 모체의 삶 역시 돌보아야 한다는 힌트를 주지만 이미 광증에 사로잡힌 스파클은 밖으로 나가 사람과 교류하는 것에 실패한다. 그녀를 계속해서 붙드는 것은 젊고 매력적인 수의 모습과 그로 인한 자기혐오이다.
엄밀히 말해, 스파클 스스로 자신의 클론에 수라는 이름을 붙인 순간부터 공존은 실패를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서브스턴스 사용 규칙을 고지하고 그것과 관련된 스파클의 전화를 받는 의문의 남성은 '당신은 하나다(you are one)'라고 그들이 동일한 존재임을 강조하지 않았는가. 이름을 새로 만들어 붙이는 순간, 스파클과 수는 독립적인 주체들이 되고만다. 이미 수에게 스파클은 돌아가야만 하는 모체가 아니며, 스파클에게 수는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이 아닌 것이다. 그들에겐 각자의 욕구와 사정이 쥐어진다. 더 이상 그들은 하나가 아니라 둘, 스파클과 수이다. 하나가 아닌 그들이 서로의 사정을 봐줄 필요는 없으므로, 수는 스파클에게서 척수액(안정제)를 착취하고 스파클은 마구 폭식하며 광증으로 집을 엉망으로 만든다. 그리고 자신이 한 행동임을 잊은 듯 울부짖고 괴로워한다.
수가 일주일이라는 규칙을 어긴 대가로 스파클이 완전한 노파의 모습이 되며, 작품의 주제는 젊음과 늙음에서 세대 사이의 갈등으로 나아가는 듯하다. 그들이 각각 의문의 남성에게 전화를 걸어 쏟아내는 불만이 대표적이다. 집 안으로 밀려나 삶에 대한 정열을 빼앗긴 노인들은 활발하고 젊은 세대(혹은 기성 세대)들이 이기적이며 어리석다고 한탄하고, 노인 세대(혹은 부모 세대)가 등에 달린 짐이나 다름 없는 젊은이들은 그들의 무능을 비난한다. 그들이 서로에게 족쇄가 되는 방식은 이런 면에서 매우 적절한 비유이다. 수의 스파클을 향한 갈취는 일방적이다. 스파클의 등은 척수액을 뽑아가려는 수에게 무방비하게 열려있으며, 그녀의 세상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은 스파클을 지치고 병들게 한다. 철부지 젊은이들이 그들의 부모나 조부모에게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동시에, 수는 스파클이 결정적인 때마다 장애물이 된다고 느낀다. 스파클의 존재로 인해 수는 세상을 그녀 앞에 놓인 만큼 누릴 수가 없다. 그녀의 욕구(집에 데려온 남성)가 한창이거나 그녀의 꿈(새해 전야제 진행)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스파클은 그녀가 자신을 위해 봉사하기를 원한다. 스파클이 벌인 난장판의 뒤치다꺼리는 수의 몫이다. 부모와 조부모세대가 물려준 세상에 대해 젊은 세대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모체인 스파클이 서브스턴스 사용의 중단을 결심하지만, 종료 약물을 전부 투여하지 못하고 젊은 클론이 다시 깨어나기를 바란다. 그녀의 젊음에 대한 욕망은 불가항력적이다. 그러나 투여하다 만 약물의 부작용인지 수와 스파클이 동시에 깨어있게 되고, '너는 하나다'라는 명제는 완전히 어겨지게 되며 세대 사이의 극렬한 갈등이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격렬한 난투 끝에 수는 스파클을 살해하고 주도권을 얻지만, '너는 하나다'라는 명제가 말하듯 둘 사이의 갈등은 자해일 뿐이며 수는 자신의 승리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새해 전야제라는 가장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그녀의 육체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결국 서브스턴스의 두 번째 사용을 감행하지만, 규칙을 조목조목 어기고 남용한 약물의 결과는 괴물이 되어버린 육체 뿐이다. 그녀가 쇼에 나가기 위해 몸부림치며 영화는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차라리 환상이라고 믿고 싶은) 다소 난잡한 형태를 띄기 시작한다.
어쨌거나 모체는 스파클이다. 수가 스파클을 죽이더라도 클론인 수가 죽지 않는 한 스파클은 죽을 수 없다. 괴물이 된 그녀의 주도권은 아마도 모체인 스파클이 가졌을 것이다. 그 살덩어리 괴물에겐 스파클의 얼굴이 감추어져 있으며, 그녀는 이제 수가 아닌 스파클이 대중으로부터 사랑받기를 갈망한다. 스파클이 환대받는 환영을 볼 뿐 아니라 스파클의 얼굴을 오려 가면으로 쓴다. 스파클의 명명 행위-클론에 '수'라는 이름을 붙인-는 '우리는 하나다'라는 전제를 어기는 결과를 도출했을 뿐 아니라, 젊음이라는 자신의 욕망마저 성취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의문이 이 대목에서 제기된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젊음이었다. 아니, 젊음을 통한 명예와 인정이다. 그러나 수라는 클론을 세워 다른 인격을 부여한 순간, 젊음을 자신이 아닌 수의 것으로 만든 순간, 젊음과 명예와 사랑은 그녀의 것이 아니게 된다. 노년이 된 스파클을 그렇기에 수가 아니라 스파클에 대한 세상의 사랑을 갈구하며 스파클의 액자를 다시 거실로 끌고왔다. 괴물이 된 그녀는 이제 수가 아닌 스파클이 사랑받기를 바란다.
(괴물이 스파클의 인격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에 대해 이러한 가설을 세워볼 수도 있겠다. 육체는 정신을 담는 그릇이며 정신에 충분히 영향을 행사할 수 있다. 수의 인격과 스파클의 인격이 나뉘는 것은 둘의 상이한 육체를 생각하였을 때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괴물이 되고 만 육체는 젊으며 만인에게 사랑받는 수의 정신보다는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며 볼품 없고 스스로를 혐오하는 스파클의 정신에 가까우며 스파클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괴물이 된 스파클이 사방에 피를 내뿜어, 쇼 출연자들과 쇼를 구경하기 위해 온 관객들을 자신의 피로 물들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의미심장한 메타포로 보아야 하겠다. 이 괴물이 혐오스럽고 끔찍하며 고개를 돌리게 싶게 만든다면, 이 괴물을 창조한 것은 누구인가? 물론 스파클에게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겠다. 영화는 여러 방법으로 스파클이 가졌을지도 모르는, 보다 건실하고 건강한 삶에 대한 은유를 관객에게 제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첫 번째는 그녀의 으리으리한 집이라고 생각한다. 쇼에서 쫓겨난 이후에도 그녀가 유지하고 있는, 아름다운 전망의 커다랗고 아름다운 집. 쇼에서 쫓겨난 것을 만족스러운 삶의 종말이라고 볼 이유는 없었다. 그녀는 얼마든지 은퇴 이후에도 행복할 수 있었다. 쌓아놓은 부로 여생을 즐기거나, 다른 직업을 구하거나, 역할을 바꾸어 연예계에서 커리어를 이어갈 수도 있었다. 언제까지고 에어로빅 쇼 진행자일수는 없지 않겠는가. 결국 육체의 젊음에 대한 갈망으로 매몰되어 들어간 것은 그녀 자신이다. 두 번째는 그녀에게 호감을 보이는 동창이다. 그녀가 육체미를 과시하는 에어로빅 쇼 진행자로서 수요가 없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녀의 보다 내밀하고 개인적인 삶을 아는 이들은 여전히 그녀에게 호의를 표하지 않는가. 그녀는 불가능한 욕구를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었다. 세 번째는, (내가 제대로 본 것인가 하는 의문이 약간은 남아있는데) 얼굴 조각만 남은 그녀가 끙끙대며 기어가 최후를 맞이하는 '명예의 거리' 보도 블럭 자신의 자리이다. 그녀가 피 웅덩이가 되어 최후를 맞이하고 아침이 되자 청소부가 그 핏자국을 지우는데, 그는 '엘리자베스 스파클'의 이름이 새겨진 그 별모양 기념물을 밟지 않고 지나간다. 하찮은 인부가 그녀에게 존중을 표하는 것이다. 즉, 그녀는 얼마든지 세상으로부터 존중받을 것이었으며 그녀 자신이 하기에 따라 앞으로도 TV에 등장하여 존중받을 수도 있었다. 엄밀히 말해 '젊음'은 개인이 다시 이룰 수 없다는 점에서 욕망이 될 수 없다. 그녀가 대중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었다면, 꼭 젊어야만 하는 이유는 없지 않나.
그러나 괴물이 되고 만 스파클을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겠다. 자신의 늙음을 긍정적으로 보지 못하게 만든 것은 그녀 이전에 그녀를 대하는 세상의 시선이다. 대중들은 그녀의 인간됨보다는 육체적인 매력에 관심이 많으며, 방송사의 임원은 50세에 접어든 몸이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다며 그녀를 쇼에서 쫓아낸다. 그가 새우를 씹는 소리를 불쾌하게 키우고 입 안의 음식물을 얼핏얼핏 보여줌으로써, 연출상으로도 그는 혐오스럽게 보여진다. 그녀가 놓인 상황은 얼마나 이성적이었는가? 그녀의 어리석음들을 그녀의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쇼 비즈니스 세계에서 퇴물 취급을 받은 여성의 머리에 떠오를 수 있는 생각이 몇가지나 되겠는가. 비단 스파클만 그런 것이 아니다. 누구나 노화를 두려워하며 자신의 늙은 모습을 좀처럼 그려내지 못한다. 외형이 곧 자신의 가치이자 생계 수단이 되는 여성 연예인에겐 더욱 그럴 것이며, 그런 면에서 남성보다는 여성 관객이 스파클의 공포에 더 맞닿아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자신의 나이 앞에서 좀처럼 이지적일 수가 없다. 겁에 질리고, 자책하고, 스스로를 혐오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책임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괴물이 된 그녀는 자신의 피를 그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묻힘으로써, 자신에게 가해진 추하고 역겹다는 시선을 되돌려준다. 진정 추하고 역겨운 것은 스파클이 도저히 자신의 노쇠를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 사회, 문화적인 시선이며, 그것에 일조한 모든 대중들이다. 스파클 자신도 마찬가지이며, 그러므로 서브스턴스를 사용한 이후부터 자신을 파괴해왔다. 이젠 스파클이 그들을 더럽힐 차례이다.
서브스턴스는 대단한 과학력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가상적이지만 하나의 물질(substance)에 불과하다. 누구나 곁에 있었다면 유혹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평범하고 보편적인 욕망(젊음)을 성취시킬 수 있는 물질. 그 약물에 '물질'이라는 무채색의 이름을 붙였을 때 두드러지는 것은 그것을 원하는 인간의 총천연색 욕망이다. 결과적으로 영화가 서브스턴스라는 물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젊음 역시 인간이 자신을 독립적이고 건강한 주체로 내세우는 것에 활용할 수 있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젊음이 떠나간다면, 다른 도구를 쥐어야만 한다. 떠나간 젊음을 한탄하고 좌절에 빠지는 것은 생산적이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는 우리 사회의 문제이다. 현재 우리 문화를 주도하는 큰 축인 sns가 자주 사람에게 자괴감을 심는 것은, 그곳에 업로드되는 게시물들은 거의 대부분이 누군가의 가장 찬란한 순간만을 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늙음은 그러한 사회 담론에서 다뤄지지 못하고 터부시되는 어떤 것인데, 웃기게도 늙지 않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달라지는 자신의 모습을 긍정하고 포용하는 법을 길러야만 하겠다. (일단 나부터 잘 하자⋯)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것을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사실 나는 이 영화의 어느 시점에서 관람이 너무도 피곤하다고 느꼈는데, 나라는 인간을 고려하였을 때 이는 매우 놀라운 사건이다⋯. 나는 폭력과 고어를 보는 것에 어떠한 거리낌도 없는 사람이다. 가령 나는 한니발 드라마를 보며, 한니발이 사람을 썰고 시신을 전시하거나 요리하는 것을 보며 라면에 밥을 말아먹는 사람이다. 이런 말을 하면 고어한 것을 좋아하냐는 오해를 자주 받는데, 보는 것을 괴롭게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앞서 영화에서 벌어지는 것이 공모라고 이야기하며, 장면을 찍은 감독과 장면을 보는 관객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즉 영화는 무엇이든 찍을 수 있지만, 정말 아무거나 찍을 수는 없다. 그 장면이 존재하는 이유, 이것을 감독이 관객에게 보여줘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야 공모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고어한 장면들, 폭력적인 장면들, 성적인 장면들이 영화 전체를 위해 봉사하는 것을 보는 것을 즐긴다. 그 뿐이다. (정말로!)
내가 문제시하는 장면을 직접 언급하자면 스파클과 수가 난투를 벌이는 장면, 그 중에서도 수가 스파클의 머리를 붙잡아 거울에 무자비하게 내리찍기를 반복하고는 거실로 장소를 옮겨 그녀의 옆구리를 수차례 걷어차는 장면이다. 장면 자체의 의도는 이해하겠다. 나는 이 영화에서 세대 간의 갈등이라는 키워드를 붙잡았고, 스파클과 수가 동시에 존재하는 장면은 그에 대한 직접적인 비유라고 보았으니 그들이 싸우고 수가 스파클을 살해한다하여도 아무 문제가 없으며, 그 과정은 잔혹할수록 갈등이라는 키워드는 더욱 빛이 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만큼은 너무나도 과했다고 생각한다. 카메라는 스파클의 머리가 거울과충돌하며 피가 튀기고 상처가 새겨지는 것을 찍기 위해 탐욕적으로 굴고 있었다. 옆구리를 걷어차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내가 목격한 것은, 폭력이 영화 하나를 찍기 위한 도구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이 유일한 목적이 된 순간이었다. 나는 내가 그 장면들을 그렇게 자세하게 관람해야하는 이유를 느끼지 못하겠다. 얼마든지 간접적인 방식으로 폭력을 언급할 수 있었을 것이고(가령,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금이 가고 피가 묻는 거울에 포커스를 맞추고 거울에 비친 수와 스파클의 모습을 블러처리 한다던가, 연달아 가해지는 폭행을 한 두 차례만 촬영하고 그 이후엔 소리만 들려준다거나), 감독이 열과 성을 다하여 그렇게까지 자세하고 길게 그 장면을 잡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촬영된 것이 폭력적인 행위의 일종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폭력의 촬영은 결국 그것의 전시와 다를 바 없지 않는가. 그것을 촬영한다면, 전시한다면, 다룬다면, 보여주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하며 그렇지 못하다면 비판을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비슷하게 불쾌감을 느낀다면, 아마 수의 에어로빅 쇼('Pump it up') 장면을 길고 상세하게 찍은 것과 괴물이 된 스파클이 벌인 소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 카메라는 수의 다리 사이를 수차례 드나들며 그녀의 가슴과 엉덩이를 집요하게 찍는다. 이 장면이 (에어로빅 쇼를 시청한 바는 없어서 그쪽은 잘 모르겠지만) 여러 영상물에서 여성을 대하는 카메라의 시선과 다를 바 없다고 느꼈기에, 그리고 촬영해낸 결과물이 실제 그런 방식으로 업로드된 컨텐츠와 동일하다는 점에서, 노골적이고 추한 그런 영상물들 혹은 그러한 텔레비전 쇼에 대한 직접적인 풍자라고 보았다. 후자의 경우는 보다 감독과 관객의 공모가 필요한 지점이다. 즉, 이를 불필요하고 과도한 장면이라고 볼 것인가, 감독의 의도를 고려하고 그에 수긍할 것인가?
나의 경우부터 말하자면, 나는 영화를 관람한 직후엔 공모하지 못하였다. 그 앞에 등장한 스파클과 수의 난투극이 원인이었다. 영화의 전반부터 중반까지는 매우 훌륭하였으나, 후반부에 접어드는 입구에서 마주한 '이 길고 상세한 폭력을 담아내야만 의도를 전달할 수 있었는가? 내가 이것을 꼭 봐야만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긍정을 하기가 어려웠고 그 지점에서 나의 공모는 틀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그 뒤로 이어지는 영화에 대해서도 공모에 실패한 관객의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괴물이 된 수의 난동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 예로, 그 장면은 앞선 장면들과 톤이 너무도 다르지 않은가? 영화는 서브스턴스가 존재하는 영화의 세계를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 세계와 떨어뜨리려 하지 않았다. 현실감을 유지하며 우리와의 거리를 좁혀두고 있었다. 그러나 괴물이 된 스파클이 거리를 활보하여, 어떤 제지도 받지 못하고 무대에 선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녀가 무대에 오를 때 울려퍼지는 음악,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오프닝으로도 유명한 클래식,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너무 유치하지 않았는가. 피를 사방에 묻히는 것을 괴물성의 공유와 전이로 보는 것, 그 난장판을 그렇게 보는 것은 너무 감독을 위한 해석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영화가 후반에 가 완전히 망쳐졌다고 생각했고, 극장을 나서며 별점을 검색하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존경하는 평론가들이 높은 별점과 좋은 후기를 남겼기 때문에. 고민 끝에 나는 마지막 장면에 대한 약간의 호의, 감독과의 조금의 공모는 충분히 할만 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무튼간에 영화의 초중반은 손꼽힐 만큼 훌륭하지 않았는가. 장면 하나로 영화를 망작이라고 매도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부끄럽지만, 나의 예시가 공모에 실패한 관객의 삐딱해진 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경우는 그 어긋난 지점이 영화에 대한 신념과도 관련되어 있었기에 더욱 뼈아팠다. 내가 생각하기에, 영화는 자신이 찍는 것에 대해 충분히 숙고해야만 한다. 영화란 모든 장면마다 이유가 있어야 하며 필요 없는 장면, 전체 영화로부터 주의를 흩뜨리는 장면이란 없어야 한다. 어쨌거나 감독은 그것을 찍어내고야 말았다. 특히나 카메라가 포착한 것이 폭력이나 전쟁이나 섹스라면,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없다면 감독은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내가 자주 참고하며 동경하는 이동진 평론가, 별점이 짜기로 유명한 박평식 평론가는 별 3.5개를 주었다. 나 따위가 영화에 별을 매기는 것이 우스워 나는 시도하지 않을 것이지만, 나는 그들에 대한 무구한 존경에도 불구하고 그들보다 낮은 별점을 주고 싶다. 순전히 그 장면 하나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시의적절한 영화였다. 물론 나는 누군가가 보기엔 새파랗게 어린 27세에 불과하지만 감히 의견을 얹자면, 노년이란 더 이상 비참하게 다뤄져서는 안된다. 노인 인구가 늘기 때문이고, 그들에 대한 처우와 정책이 사회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며, 누구나 반드시 노년에 접어들기 때문이다. 또한 이 영화는 미디어가 비추는 정상적이고 활력있는 일반인과, 그렇지 못하고 변두리로 밀려난 집단 사이의 갈등을 다루는 것에 있어서도 의미를 산출하는 것에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노인 뿐만 아니라 다양한 소수자들이 혐오와 멸시의 대상이며, 사회는 그들이 그들 스스로 혐오하도록 방관할 뿐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몰아가고 있다. 스파클이 서브스턴스를 사용한 것을 마냥 비난하기가 힘들지 않은가. 수의 육체를 감상하는 것을 즐기고 괴물이 된 스파클을 비웃기보다는, 그저 현실에는 서브스턴스가 없으며 나는 동일한 유혹에 빠질 수 없음에 대해 안도할 수밖에 없지 않았는가.
극장에 갈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였지만, 마지막까지 나는 그 길고 디테일한 폭행 장면 만큼은 동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충분히 용기있는 자들만 시청하기를. 생각해보니,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은 당신이라면 이미 영화를 본 이후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감독과 충분히 공모하여 극장에서의 2시간 30분을 온전히 즐겼기를 바란다.
<서브스턴스> 한줄평
'물질(substance)'을 쥔 인간의 평범한 욕망이 끌고 간 심상찮은 비극, 혹은 촌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