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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관람에 대하여

환희에 젖은 예언자가 되는 일에 대하여

by 김사자



지난 2024년 12월 17일. 나는 재개봉한 <인터스텔라>와 <덩케르크>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갔다.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영화들이다. <인터스텔라>가 개봉했을 때 나는 중학생이었고, 이후 TV 방영이나 OTT로 대여섯번 정도 더 본 것 같다. 매번 만족스러웠다. <덩케르크>는 2024년 가을에 처음 봤다. <덩케르크>가 개봉했던 때에 나는 고3이었기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는데다가 전쟁영화에 대한 염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그 영화를 긴 시간 있고 있었다가 올해 2학기에 수강한 영화 수업에서 자유롭게 영화를 선택하여 비평을 작성하는 과제를 받았는데, 바로 <덩케르크>가 생각이 났다. 익히 들어온 대로 너무나 훌륭했다.

<인터스텔라>는 수 차례나 보았고, <덩케르크> 역시 과제를 하느라 장면 단위로 세세히 뜯어보았다. 정신을 빼앗겨 시청하는 이유를 잊고 영화가 흘러가도록 놔두기를 여러번 반복했다. 두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들을 세세히 기억함에도 나는 또 다시 표값을 치루고 극장으로 향했다.

나는 눈물을 모르는 사람이다. ...하드보일드 멋쟁이처럼 나를 묘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내가 울고 싶을 때도 눈물을 흘리기를 어려워하는 사람이다. 왜 나오지 않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래서 내가 눈물을 한 방울이라도 또르르 흘린다면 남들이 오열하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는데, 17일에 나는 두 영화로 인해 자주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울기도 했다. 나에게도 이 사실이 놀라웠음은 물론이다. 물론 울었던 장면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었다.

이 글은 내가 영화라는 장르에 애정을 가진 사람으로서 재관람이라는 경험과 극장이라는 환경에 대해 간략히 말해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여러가지 방법으로 후기를 남겨온 두 영화를 극장에서 재관람했다는 사실과 그것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는 것은 (그 경험을 토대로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더욱) 결코 부차적인 사담은 아니겠으나, 지면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것이 사실이므로 분리를 하고자 한다. <인터스텔라>와 <덩케르크>의 그 장면들에 대한 서술은 아래에 링크로 첨부될 것이다. 번거롭더라도 꼭 읽어주시기를 공손하고 간절히... 부탁드린다...



<인터스텔라>

https://brunch.co.kr/@e5b863de253e423/16

<덩케르크>

https://brunch.co.kr/@e5b863de253e423/17




그리하여 내가 앞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나의 눈물이다. 나는 수 차례 본 영화를 또 보면서 왜 갑자기 울고 말았는가. 냉철하게 생각해보자면, <인터스텔라>의 두 장면에서 내가 흘린 눈물에는 보다 이해의 여지가 많다. 각각 이별과 희생을 다룬 장면이고, 이 장면들의 결의와 슬픔을 증명하듯 그때 극장에선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쌓아올린 서사가 눈물을 만들었다. 그러나 <덩케르크>에 대해서는, 사실 그 장면에서 울고 있는 사람은 분명 이상한 사람이다. 그 장면은 내가 주장했듯이 아름다운 것, 감동적인 것에 대한 집착이 제거되어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감정적으로 연출해내지 않았다. 내가 그 장면이 좋다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관객에게 불의에 대한 분노나 영웅에 대한 경외, 비극에 대한 슬픔 등을 불러일으키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그 장면의 아름다움을 설명하기 위해 영화 바깥에 있는 여러 요소들(리베트와 다네의 글이라거나, 영화 예술에 대한 나의 생각이라거나)을 끌고 들어오지 않았나. 울만한 장면도 아닐 뿐더러, 내가 그 장면을 좋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꼭 극장의 그 영화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 나는 도대체 왜 울었는가. 게다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울려고 들기 시작한 때, 몸에서 눈물을 내려고 시동을 걸기 시작한 때는 그 장면들이 등장하기보다 약간씩 전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장면을 감싸는 배경 음악이 들리기 시작했을 때.

이 자전적이며 부끄러운 논의의 핵심 중 하나는 이 영화들이 내가 개인적으로 애정하는 영화들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 장면에 대해 깊게 생각하여 내 감상을 도출하고, 그것을 글로 쓰거나 말로 설명해왔다. 즉, 나는 그 장면을 나의 문법으로 그려내기 위해 그토록 애를 썼다. 내가 링크로 첨부한 나의 두 글들도 그렇다. 비평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으로서, 나는 이 장면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방식으로 좋다는 것인지 나름의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의 훌륭함을 설득하고 설파하려고 안달이 나 있다. 나는 기꺼이 영화 앞에 서서 그것의 팬이자 일종의 투어 가이드로써, 그 장면을 감상하는 지침들을 당부하고 세부요소들을 설명하며 그 장면을 다시 쓰기 위해 분투해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보기 위해 재차 극장을 찾았다. 나는 그 서사들의 전개를 꿰고 있는 자이므로 영화를 관람 중인 시점에서는 눈 앞 장면의 미래를 아는 자이다. 나는 정확히 어느 시점에서부터 내가 좋아하는 장면들이 펼쳐지기 시작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으며, 그것의 그러한 '좋음'이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지 파고들어왔다. 그러므로 내 눈 앞에서 쿠퍼가 딸을 떠나 트럭을 몰기 시작할 때 나는 그가 곧 담요를 들춰볼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정을 속행하여 영화의 마지막에는 자신의 목숨을 블랙홀 속으로 던질 것임을 알며, 그때 이 이별 장면의 음악으로부터 변주된 음악이 흘러나올 것이고, 그러한 장면 구성을 감행한 감독이 의도하듯이 지금 내 눈 앞의 쿠퍼와 블랙홀 앞의 쿠퍼는 같은 마음으로, 항성간의 거리를 초월한 사랑을 통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순간 나를 압도하는 것은 지금 펼쳐지는 장면만이 아니라, 이 모든 '미리 알고 있음'이다. 나는 이 장면과 이어지는 다른 장면의 훌륭함에 대해서도 알고 있으며, 이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장면이 떠오르고, 앞으로 그것을 볼 것이 기대가 됨과 동시에, 과연 이 두 장면이 이어져있다는 것을 재차 확인한다. 읽는 이를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쉼표를 자꾸 늘어놓게 만드는 이 벅찬 감정들이 극장의 나를 울게 만들었다. 내가 동경하고 그리워했던 것이 눈 앞에서 곧 펼쳐질 것임을 인지한 그 순간부터.

<덩케르크>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나의 그 장면을 향한 애정은 <인터스텔라>의 그것보다는 이론적이고 사상적이다. 그것 앞에서 내가 느끼는 정서는, 어떤 현상에 대해 자신의 이론을 세워온 사상가 혹은 철학자가 눈 앞에서 그 이론이 증명되는 것을 목도하는 것과 같다. 이때 내가 느끼는 것은 원인과 결과가 끝도 없이 자리를 바꾸는 순간이다. 파리어의 비행기가 곧 활공을 시작할 것을 알고, 그것이 얼마나 뛰어난 장면인지 다시 감상할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올 것 같다. 그 장면이 아름답기에 나는 눈물을 흘린다. 동시에, 흘러나온 눈물이야말로 그것의 아름다움이 정당하다는 증거이다. 무엇이 아름답다고 아무리 묘사하더라도 감상자의 눈물 한 방울 만큼의 진정성을 얻기는 어렵지 않은가. 특히나 그 아름다움이 도덕이나 정치성에 대한 주장의 영역에 있을수록 정념의 결과물인 눈물은 오히려 값질 것이다. 내가 눈물을 흘렸기에 그 장면은 아름답다.


요컨대, 내가 울어가며 영화를 본 것은 그것이 오히려 재관람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해 뛰어난 숙련자나 전문가가 아닌 나로서는 첫 관람에서 이 영화들을 이만큼 읽어내기는 어려웠다. 감상을 마친 후 내가 보고 느낀 것에 대해 숙고하며 그 아름다움에 대한 가설을 세웠을 때, 나는 (지금 눈 앞에는 극장의 스크린이 없기에) 어떻게든 그 장면의 형상을 빚어내기 위해 애쓰는 것이 된다. 내가 그 장면을 생각하는 만큼 그 장면은 내 앞에 펼쳐지고 되풀이된다. 장면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그 장면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며, 나는 그렇게 부여된 생명력을 유일하게 인지하는 이가 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비평이라는 행위는 순수한 축복이지 않은가. 그 영화들을 재관람하는 순간에 나는 곧 나타날 장면을 미리 아는 예언자가 되는 것인데, 신화의 예언가 카산드라는 그녀가 본 미래를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저주 속에 살지만, 이 경우에 나는 영화 속에 벌어질 미래를 알 뿐만 아니라 그 장면을 보고 환희에 차 있는 나의 미래를 보며 그렇기에 내가 본 개인적인 기쁨을 누군가에게 고할 필요도, 설득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장면 앞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예상했던 환희를 그대로 느낀다. 내가 이 것을 두 번 이상 보고도 차오르는 환희에 빠지는 만큼, 나는 앞으로 이 영화를 몇 번이나 보더라도 매번 그럴 것이다. 세상에서 그 영화의 그 장면만이 내게 이러한 종류의 뜨거운 영원성을 약속하기에, 내가 어루만진 장면의 환희는 언제나 앞선 감상에서도 느낀 기쁨을 초과하여 밀어닥칠 것이다. 그래서 다음에도 내가 눈물을 흘릴 것을 알며, 그것을 인지하는 만큼 지금 감상하는 순간에도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른다.


영화의 장면도 장면이지만, 그 장면 앞에서 내가 언제나 열려있으며 재개봉만 한다면 기꺼이 극장에 가리라는 사실 역시 감정을 동요하게 만든다. 나는 집에서 OTT로 <인터스텔라>나 <덩케르크>를 본다면 그렇게 울지 않을 것이다. 극장이라는 환경도 물론 중요하다. 거실의 TV나 PC 모니터 앞에서는 나를 '나'로 고정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스크린을 제외한 모든 조명이 꺼지고 영화만이 흘러갈 때, 비로소 나는 잠시나마 내 육체를 떠나 지금으로부터 85년 전 프랑스를 배경으로 펼쳐진 후퇴작전의 군인이나 인류에게 위기가 찾아온 가상 미래의 우주비행사에게 몰입할 수 있다. 이렇게 서술해놓고 보니, 영화에 대해 관객들이 수행하는 관객의 몰입이란 대단히 강력한 것이다. 그것은 거의 모든 종류의 상황에 대한 가정을 극복하며 발생하지 않는가. 동시에 사랑하는 영화에 대한 재관람의 경우에서, 극장이라는 공간은 일종의 시네필(영화 애호가)로서의 자기효능감을 나에게 부여한다. '나는 이 영화를 너무나 좋아하는데, 재개봉이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수고를 무릅쓰고 극장을 다시 찾을 정도이다.' 물론 영화라는 예술이 사람의 마음에 대단한 영향을 주며, 극장이라는 특수한 공간 역시 나의 감상에 마술을 부리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그것들을 누리기 위해 친히 극장으로 왔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영화를 감상하며 눈물을 흘릴만큼 감동받을 준비가 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말하자면 자기애이겠지만, 동시에 영화 감독과 내가 공모하여 만나는 어떤 지점에 대한 애정이다. 감독은 이것을 찍었고, 나는 그것을 알아보았다. 나는 이 영화를 존중하는데, 거실 TV로 이 영화를 보는 것과 극장에서 보는 것을 엄연히 다른 일로 구분할 만큼 그러하며, 동시에 이 영화가 극장에 걸리는 일을 그리워하는 나를 영화와 함께 사랑한다. 가치 있는 것의 가치를 알아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그날 나는 재개봉을 기념하여 특전으로 준비된 포스터를 챙겨 귀가했다. 그것들은 지금도 내 방 오른쪽 벽에 걸려 있다. 그 아래로는 여행지에서 얻은 엽서나 전시회 티켓, 좋아하는 다른 영화들의 포토카드 등이 전시되어 있다. 내가 꾸민 이 공간이 내가 지나온 시공간들 중 특별하게 생각하는 순간들을 상징하는 셈이다. <인터스텔라>에서 '중력은 시공간을 꿰뚫고 작용하는 유일한 힘'이라고 하였던가. 그렇다면, 내 방의 벽에 걸린 것들 중에서 두 영화의 포스터들은 유독 강력한 중력 왜곡점일 것이다. 나라는 사람의 시공간을 꿰뚫어, 언제든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고 마음 속으로 그 장면들을 그리게 할 것이다. 두 달 좀 넘게 지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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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이 영화들이 또 다시 재개봉할 날을 기다리게 되리라. 즐거운 바람이 있다면, 다음 번엔 <오펜하이머>를 함께 데려왔으면 한다. <인터스텔라>의 블랙홀이나 <덩케르크>의 비행기 활공처럼 내가 그토록 그려내려고 애를 썼던 <오펜하이머>의 프린스턴 호숫가 장면 앞에서, 재관람만이 주는 환희를 통해 눈물을 흘릴 순간을 고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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