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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케르크>의 그 장면

재관람에 대하여, <2>

by 김사자



이 글은 <재관람에 대하여>라는 글의 부품 중 하나이다. 꼭 <재관람에 대하여>를 먼저 읽어주길 바란다.

기본적으로 <덩케르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 장면을 다루며, 그 장면을 인상깊게 보기 위한 영화 이론을 언급하고 있다. 깊게 설명하기에는 지명이 부족했으므로 간단히 서술하는 것에 그쳤다. 그러니 이미 영화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읽는 것이 좋겠다.


<인터스텔라>에 대해 쓰면서 음악을 넣었으니 <덩케르크>도 그리하자면, 지금부터 다룰 장면의 이 음악!

https://www.youtube.com/watch?v=lUpvEgJEn94




나는 <덩케르크>에서 단 하나의 장면에 집중할 생각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전투기 조종사 파리어가 동력을 전부 소진한 비행기로 적지가 된 프랑스 해변을 조용히 활공하는 그 장면. 전투기와 해변과 노을진 수평선이 평형으로 놓인다. 파리어는 수동으로 바퀴를 내리기 위해 랜딩 기어를 붙잡고 애를 쓰는 반면, 비행기의 프로펠러는 천천히 고조되는 배경음악과 함께 고요히 정지해 있다. 이 흔한 미장센은 나에게 극적인 눈부심으로 다가왔다. 그 이유로 작년 가을에 들은 영화 수업에서 세르주 다네의 <<카포>의 트래블링>(1992.)을 다뤘으며, 내가 그것으로부터 대단한 인상을 받았음을 꼽아야겠다.

그 글은 자크 리베트의 <천함에 대하여>(1961.)가 영화 <카포>를 강렬하게 비판한 것을 견지하고 있다. 유대인 수용소를 다룬 <카포>에서 리베트가 문제시하는 것은 여성 인물이 전기 철조망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장면이다. 그 장면에서 카메라는 시체를 향해 앙각(로우 앵글)에서 트래블링-인을 하여(카메라를 움직일 수 있는 장치 위에 고정한 뒤 움직이며 촬영하는 것) 철조망에 널린 시체의 손을 잡으려는 듯이 열성적으로 들어가는데, 그러한 카메라의 움직임과 그것을 단행한 감독의 태도야말로 리베트가 '천하다'고 지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과 희생을 촬영해낸 것은 그 자체로 안타깝고 숭고할 수 없으며, 무조건적으로 감독의 관점과 시각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시체를 동정의 대상으로 낙인 찍고자 하는 카메라의 트레블링-인은, 그 죽음이 안타깝고 비극적이며 따라서 아름답다고 스스로 결론 내리며 닫힌 역사로 종결짓고 있다. 도덕적인 판단이 완료되고 숙의의 가능성이 제거된 시점에서, 영화는 정치와 도덕에 대해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리고 남는 것은 장면의 아름다움(미장센 등)에 대한 강요 뿐이다. 다네는 리베트의 이러한 견해를 이어받는 것을 넘어 그의 글이 어느 영화에나 들이댈 수 있는 '휴대용 도그마'(잣대, 판단기준)였다고 선언한다. 그는 <카포>와는 달리 똑같이 수용소를 다루면서 전혀 천하지 않았던 다큐멘터리 영화를 예시로 들며, 실제 역사를 들고와 촬영하는 것이 영화를 무조건 천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톤과 악센트와 뉘앙스의 문제라는 것을 공고히 한다. 그 다큐멘터리가 천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 카메라의 시선이 순수성을, 역사의 순간에 이제 막 도착했다는 인식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선은 악을 촬영하면서 그것을 재단하거나 평가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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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덩케르크>로 돌아오자.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파리어의 활공에는 분명히 비극적이고 숭고한 데가 있다. 영화는 내내 군인들이 총을 잃어버리고 무력하게 도망치는 장면만을 담는다. 그 중 파리어는 전투기를 몰며 유일하게 공을 세우는 인물이다. 그는 연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인지하였으면서도 끝까지 됭케르크 철수작전을 호위하는 임무를 다하는 것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파리어가 적지에서 담담히 비상착륙을 시도하는 동안, 영화는 목숨만 겨우 붙여 귀환한 영국의 병사들이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음에도 빈 손에 맥주를 건네받으며 영웅으로 칭송받는 장면을 보여준다. 즉 감독은 이러한 대비를 통해 우리가 파리어를 영웅으로 추대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것이다. 해변 위의 파리어가 '비행'이 아니라 '활공'을 하고 있다는 사실, 전투기의 작동불능으로 인해 선택된 차선일 뿐이며 따라서 어떠한 의지의 피력도 아니라는 사실은 파리어를 향한 위로나 응원, 딱하게 보는 어떤 시선도 거부하고 그저 지켜볼 것만을 요청한다. 이때 카메라는 분명히 전투기를 향해 트래블링-인을 하고 있으나 천박함으로는 빠져들지 않는다. 판단하지 않는 시선, 공정함을 간직한 미장센은 <카포>가 그러했던 것처럼 2차 세계대전에서 수행됐던 한 작전에 대한 모든 도덕적인 판단을 완료하고 그것을 기어코 아름답게 치장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시효가 끝난 역사적 사실을 현재로 다시 끌어낸다.

불시착한 파리어는 자신의 손으로 전투기를 파손시키고, 그것에서 치솟는 불길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포로가 되어 끌려간다. 그동안 기름떼 낀 얼굴의 꾀죄죄한 패잔병들은 맥주를 마시고 신문을 읽는다. 관객이 가장 영웅적인 인물에 가해지는 이러한 처우를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세르주 다네가 언급한 '관객과 감독이 은밀한 공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감독은 그 장면을 찍기로 작정하였고 나의 마음은 그 장면 앞에서 영원히 정지했다. 파리어의 마지막은 어떤 역사 영화(전쟁영화)에서도 감추던 것이다. 영화의 영웅은 무사히 귀환하여 행가래를 받거나 비극적으로 사망하여 추모된다. 반면에 어떤 희생과 죽음들은 미화되기는 커녕 다뤄질 수도 없었던 것처럼, 전쟁과 역사란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듯 이국의 해변을 담담히 활강하는 전투기의 초상이야말로 <덩케르크>가 선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덩케르크>의 활공 장면 앞에서 영원히 정지할 나와, 실제 역사의 됭케르크 후퇴 작전 이후로 처음 그 해변에서 비행기를 착륙시켰으며 그것을 따라 트래블링-인 하기를 감행한 감독 사이에는 은밀한 공모 관계가 형성된다.

그 장면 앞에서 미장센과 정치성은 다시 얽힌다. <카포>와 같은 영화들은 미장센을 챙기고 도덕성을 저버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치적인 판단을 완료해버림으로써 영화의 미(美)에 관객의 숙의가 끼어들 가능성을 일축해버렸다. 우리는 이런 영화들을 손쉽게 목격할 수 있다. 촬영물로서 영화가 무언가에 대해 미적이라고 주장하기는 쉽지만 판단하지 않기, 그러므로 정치성을 열어두기는 어렵다. 그러나 아름답게 그려낸 장면이 꼭 천할 까닭은 없으며, 공정한 정치성과 '아름다운 것'은 얼마든지 함께 갈 수 있다. 해안을 무기력하게 날아가는 전투기의 평형이 그토록 공정하며 아름다웠던 것처럼.


... 이제는 돌아갈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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