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관람에 대하여, <1>
이 글은 <재관람에 대하여>라는 글의 부품 중 하나이다. 꼭 <재관람에 대하여>를 먼저 읽어주길 바란다.
기본적으로 <인터스텔라>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두 장면을 다루며, 그 장면을 인상깊게 보기 위한 다른 장면들을 살짝 언급하고 있다. 깊게 설명하기에는 지명이 부족했으므로 간단히 서술하는 것에 그쳤다. 그러니 이미 영화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읽는 것이 좋겠다.
뒤에 언급하게 될 두 번째 장면의 이 음악을 들으면서 읽으면! 더 좋지 않을까!
https://www.youtube.com/watch?v=w33ic5ak4SA
쿠퍼는 사랑하는 딸 머피를 두고 기약없는 여정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지구의 물리학자들이 전 인류를 우주로 띄울 수 있도록 중력 방정식을 완성하기를 기도하며, 그는 희망이 없는 지구를 대체할 행성을 찾아야 한다. 그는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딸에게 꼭 돌아올 거라고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 NASA로 출발한다. 쿠퍼는 총 두 번 NASA를 향해 트럭을 몰았다. 먼젓번은 머피의 방에서 벌어진 중력 이상현상으로부터 추리해낸 좌표를 향해 무모한 모험을 떠날 때였다. 그때까진 그 좌표가 NASA를 가리키는지 몰랐기에 쿠퍼는 조르는 머피를 떼어놓으며 위험해서 안된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조수석 담요 뭉치 속에 숨어있었고 결국 여정을 함께하게 되었다. 관객만큼이나 쿠퍼는 두 번째로 NASA를 향해 트럭을 모는 순간, 맹랑하면서도 모험심이 강한 것이 자신을 닮았고 그래서 더욱 사랑스러운 딸과의 순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조수석엔 담요가 쌓여있다. 그는 조심스레 담요를 들춰보지만, 이번엔 아무도 없다. 딸이 그리워 눈물이 흐르지만 딸의 미래를 구하기 위해서는 차를 돌릴 수 없다. 카메라가 쿠퍼의 차 안을 비추는 동안, 고조되는 음악과 함께 우주선을 띄우는 카운트다운이 들린다. 차는 달리고 우주선의 엔진에서 불꽃이 치솟고 흙먼지가 날린다. 그는 이제 우주에 있다.
자신을 끝내 용서하지 않는 딸, 아버지에게 죄책감을 심어서라도 그를 보내지 않으려는 딸을 결국엔 두고 나왔으나, 쿠퍼는 조금도 이별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앞서 그는 방에 유령이 있다는 머피의 말을 부정하며 관측하고 계량하여 정체를 밝혀내라는 말을 한 적 있다. 그토록 이지적던 그는, 머피가 거기 숨어있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이 담요로 가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그가 모는 트럭이 정말 우주를 향해 쏘아올려지는 로켓이라도 되는 것처럼, 쿠퍼는 자신을 딸이 있는 집으로 끌어당기는 중력에 저항하듯이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입을 다물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어떻게든 전방을 주시한다. 머피는 그녀의 방에 있으며 그녀와의 물리적 거리는 지금이 제일 가깝지만, 그녀를 위한 구원은 우주에 있기 때문에.
두 번째 장면을 위해선 쿠퍼와 브랜드 박사의 두 번의 대화를 언급하고 넘어가야 한다. 브랜드는 아마 나이 지긋한 아버지와의 영원한 이별을 각오하고 나섰을 것이고, 아마도 그렇기에 지구에 짙은 미련을 남기고 있는 쿠퍼에게 약간의 적대감을 표한다. 상황상 그는 아직 (친우라는 의미에서) 그녀의 사람이 아니며, 진정한 대원이 아니다. 대화를 받아주지 않고 날을 세우는 브랜드에게 쿠퍼는, 로봇 대원들이 인간과 90%만 솔직하게 대화하도록 설정되어있다는 말을 듣고 '우리도 90% 솔직하기 로 시작하자'고 말한다.
이후, 대원들은 동료 하나와 21년이라는 시간을 잃고 다음 목적지를 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최고의 대원이었던 만 박사의 행성은 꾸준히 데이터를 보내오며 거리가 더 가깝고, 에드먼드의 행성은 데이터가 더 좋지만 얼마 전 신호가 끊긴데다 연료가 많이 든다. 브랜드가 에드먼드 행성을 주장하자 연료를 아껴 지구로 돌아갈 생각인 쿠퍼는 브랜드와 에드먼드가 연인 사이라는 것을 폭로한다. 그러자 브랜드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반론을 한다. 그 주장이란 이렇다. 그들이 인류의 구원을 걸고 탐사를 떠날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행한 것이 분명한 중력 조작 덕분이다. 그 존재들은 아마 중력의 비밀을 풀어낸 5차원 이상의 미래 문명일 것인데, 그들이 현재 인류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중력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작용하기 때문이다. 3차원 인류에게 중력이란 관측할 수도 있고 몸소 느끼는 것이지만, 이해하거나 조작할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랑도 그렇지 않은가? 사랑은 몸소 느끼는 것이지만 이해하거나 조작할 수는 없으며, 인간이 느끼는 것들 중 유일하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작용하는 것이다. 만약 사랑이 중력과 같은 물리적인 법칙이라면? 사랑을 따르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이라면? 기존의 물리학 지식에 의존하다 많은 것을 잃은 지금, 그녀는 사랑을 믿어보기로 했다.
이 대화에서 브랜드의 주장은 물론 거부되지만, 영화를 관람한 관객이라면 그녀의 주장이야말로 <인터스텔라>의 우주를 떠받치는 법칙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인터스텔라>는 은하를 무대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인터스텔라'라는 단어는 결국 형용사에 불과한데, 그것은 '항성과 항성 사이'라는 뜻이고(inter-stellar), 그것이 수식하는 것은 분명히 '사랑'일 것이다. 항성과 항성을 넘나드는 사랑. 항성과 항성을 넘나들게 하는 사랑. 사랑에 의거한 브랜드의 선택대로 에드먼드 행성은 후보지 중 유일하게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었다. 영화 최종부에 쿠퍼는 머피에게 선물한 시계에 양자 데이터를 실으며 그녀가 시계를 가지러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여정 중 단 한 순간도 머피를 떠올리지 않은 적이 없었을 것이고, 그녀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를 위해 머피의 방을 무대로 중력을 조작할 수 있는 공간(테서랙트)를 열어준 미래의 존재들은 아마도 사랑의 차원에 기거하는 미래 인류일 것이다. 그들은 쿠퍼의 사랑을 이해하며, 그가 사랑을 통해 옳은 길로 나아갈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이 영화 중 최고라고 손꼽는 두 번째 장면이 이어진다. 믿었던 만 박사의 배신으로 상황은 최악이다. 대원은 로봇들을 제외하면 쿠퍼와 브랜드 밖에 남지 않았다. 그들의 모선인 인공위성이 파손되며 연료는 모자라고 자동 조종을 비롯한 각종 장치들을 잃었으며 블랙홀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쿠퍼는 브랜드에게, 인공위성에 장착되어 있는 우주선 두 척에 각각 로봇과 쿠퍼가 탑승하여 모든 연료를 소모해 인공위성이 추진력을 얻고, 로봇이 탑승한 우주선을 분리하여 무게를 줄이고 블랙홀로부터 벗어난다는 계획은 제안한다. 동거동락해온 로봇을 희생시킬 뿐 아니라 50년 가량의 시간을 손해볼 것이나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작전은 그대로 실행된다. 우주선의 연료가 모두 소모되고 짧은 작별인사와 함께 로봇은 블랙홀 속으로 들어간다. 브랜드가 슬픔을 정리하기도 전에, 쿠퍼는 자신이 탑승한 우주선의 분리를 이어서 진행한다. 사실 이대로 블랙홀을 벗어나기엔 연료가 모자랐던 것이다. 더 이상의 이별을 바라지 않는 브랜드는 연료가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았냐고 따지지만, 쿠퍼는 끝까지 재치를 잊지 않고 '잊었어요 아멜리아? 90%만 솔직하기' 라고 대답한다. 그녀가 애원하지만 쿠퍼는 담담히 분리를 감행한다.
(개인적인 의견으로)SF 영화 사상 최고의 시퀀스가 펼쳐지는 동안, 관객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구슬프면서도 장대한 음악은 사실 익숙한 것이다. 그것은 내가 눈물을 흘린 첫 번째 장면, 쿠퍼가 머피를 떠나며 담요를 들춰보는 그 장면의 음악을 더 극적이고 풍부하게끔 변주한 것이다. 그러니까 감독은 이 두 장면을 겹쳐놓는 것이다. 앞선 장면은 여정의 시작이었고 트럭의 출발이나 로켓의 추진과 함께 상승의 이미지를 주었다. 만약 지구에서 중력 방정식을 풀이하는 것에 실패한다면, 쿠퍼와 대원들은 새 행성에서 새 인류와 살아가는 플랜 B를 실행해야만 했다. 즉, 앞선 장면은 쿠퍼가 원치 않더라도 지구의 멸망(과 딸의 죽음)을 뒤로하고 쿠퍼만은 살아남을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반대로 뒤의 장면은 여정의 종지부이며 블랙홀 속으로의 명백한 하강을 다룬다. 또한 쿠퍼는 블랙홀 속으로 몸을 던지고 있으나, 혹시라도 먼저 몸을 던진 로봇이 중력 방정식을 송신하는 것에 성공하고, 그의 희생으로 살아남은 브랜드가 인류를 위한 새 터전을 찾아 어떻게든 인류를, 딸을 구할 희망을 품고 있다. 그렇다면 온 인류가 구원을 받더라도 쿠퍼만은 죽을 것이다. 이처럼 모든 요소들이 역전되어 있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것은 또 한번 쿠퍼의 사랑이다. 그는 동일한 행동 양식으로, 오로지 지구에 두고 온 딸을 향한 사랑에 의거해 행동하고 있다. 이후 테서랙트에서 깨닫듯이 미래 인류로부터 현인류를 구원하리라고 선택받은 것은 쿠퍼가 아니라 머피이지만, 그것은 그녀가 쿠퍼로부터 절대적인 사랑, 중력과 함께 시공간을 꿰뚫고 작용하는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를 위해 그녀를 떠났으며 그녀의 얼굴을 그리면서 죽음의 위기에서 수차례 살아남았고, 이제는 적확한 때에 스스로 죽음을 향해 걸어들어가려한다. 살아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 책장 뒤에서 그녀를 보살피는 '유령'이 되기 위해서.
...이제는 돌아갈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