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기다림이었다. 지금 봉준호를 거장이라고 부르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봉준호의 SF라면 당연히 우려보다는 기대가 될 것인데, 그의 역량뿐 아니라 필모를 보아도 그렇다. 결국 SF의 장르적인 의의라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상을 통해, 실재하는 부조리나 염려를 극단으로 밀어붙여 보여준다는 것인데, 주로 과학, 기술적인 상상력과 관련하여 그렇다. 그런 면에서 봉준호의 영화들은 SF적인 상상력을 탑재하고 있던 셈이다. <괴물>, <설국열차>, <옥자>가 그러했다. 다들 그의 SF적 문법에 이미 익숙하다고 할 수 있겠다.
개봉 다음날 빠르게 보았고, 이 정도의 시간이면 숙고가 되었으리라 생각하고 리뷰를 쓴다. 줄거리 설명보다는 내가 포착한 이야깃거리나 해석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어쩔 수 없이 치명적인 스포일러들이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시국이 어지러워서 그런지 이 영화를 정치적으로 보려는 시도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고, 심지어 특정한 어느 인물이나 어느 사건에 대한 비판이라고 언급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인간의 역사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보였다. '니플헤임'으로 향하는 우주선 안에서, 지도자 '케네스 마샬'은 '열량과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섹스를 자제할 것'이라고 말한다. 군중들이 의구심을 가지자 아내의 조언에 따라 성공적으로 정착한 뒤 씨를 뿌리자는 말을 덧붙인다. 미지의 땅으로 향하는 금욕주의자들을 실은 배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하는 메이플라워 속 청교도들을 연상시킨다. 무서운 속도로 씨를 뿌렸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는 금욕과 멀어 보인다는 점에서 더욱 적절한 비유처럼 보인다. 다만, 미국에 국한된 비판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들의 아메리카 원주민 탄압은 대표적인 사례일 뿐, 비슷한 사건들은 서구 열강에 의해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었다. (오히려 현시점에서 내가 더 정치적으로 말해보자면, 그들이 지금처럼 다민족에 대해 공격적으로 나온다면 이런 부류의 문제에 있어서 미국이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은 오히려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비행선 안에서의 효율적인 '금욕', 식욕과 색욕의 절제. 그다음 '씨 뿌리기', 여러 가지 의미로 남성적인 정복. 청중에게 이것들을 순차적으로 부르짖는 '케네스 마샬'이라는 인물이, 비서 눈앞에서 아내의 엉덩이를 주무르거나 다른 선원들이 질 낮은 식사를 하는 동안 혼자 귀족 식문화를 즐기는 등 쾌락주의적인 면을 보이며 그러면서도 아내의 능력에 심하게 의존한다는 것이 재미있다. 남성 정복자인 그의 남성성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가. 청중들 앞에서 계속해서 아내의 의견을 묻고 조언을 듣는 남편과, 남편의 귀에 속삭이는 아내의 모습은 마치 인형극을 보는 듯하며 그 자체로 정치인 풍자처럼 보인다.
행성에 원래 살던 생명체들에게 '크리퍼'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계속해서 미국을 연상시킨다. 원주민의 땅이 '아메리카'가 된 것처럼 그 행성은 외부에 의해 '니플헤임'으로 명명되었고, 원주민들이 '인디언'이 되었듯 니플헤임의 원주민들은 '크리퍼'가 되었다. 영화 후반에서야 그들이 인간을 잡아먹지 않으며 자신들만의 언어와 체계가 존재하는 생명체라는 것이 밝혀지는데, 이것이 왜 놀랍게 다가오는 것일까. 이는 철학과 언어학, 진화학을 전부 아우르는 주제라고 할 법하다.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인간의 모습, 길쭉한 팔다리로 이족보행 하며 음절끼리 명징하게 구분되는 언어로 소통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조건에서 우연적으로 탄생한 모습일 뿐, 그것이 지성체의 전제조건이라는 법은 없다. 진화는 결코 자의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생명체의 형질 간 어떤 우월성도 없다. 또한 어떤 부류의 언어학에서는 말과 기호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인간이 붙잡아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일 뿐, 우리가 창조해 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연한 계기로 우리 선조의 성대가 다양한 소리를 내는 것에 유용한 형태로 변화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수화로 대화하거나 단발적인 소리로 소통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 입장에서 기괴한 소리가 크리퍼에게는 언어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또한 이런 이유를 근거로 인류의 우월성을 주장한다면, 그에 대한 대답은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무래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주인공을 둘러싼 흥미로운 설정들이겠다. 원본 인간을 복제하여 사망할 때마다 육체를 새로 프린트하고 백업해 둔 기억을 넣는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소모품처럼 사용되고, 이 직업의 일종을 '익스펜더블(소모품)'이라고 부른다. '미키 17'은 그가 16번째 출력하여 탄생한 미키라는 뜻이다. 그가 사망한 줄 알고 출력한 '미키 18'과 생환한 '미키 17'이 만나며, 영화의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가장 먼저 떠오를만한 것은 이제는 대중들에게도 익숙한 '테세우스의 배' 난제이겠다. 보존의 일환으로 테세우스의 배의 일부를 조금씩 교체하다 보면 언젠가 원본의 자재들은 하나도 남지 않을 텐데, 그것은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인가? 판단 대상이 '테세우스의 배'라면, 나는 의심의 여지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것을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때 우리가 보존하려고 하는 것은 그 배의 기본적인 모습과 그것이 상징하는바 등이다. 널빤지와 나사 하나하나 간직하는 것이 목적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인간이라면?
심지어 미키들은 넘버링마다 조금씩 성격이 다르다고 묘사된다. 실제로 영화에서 주로 다루는 미키 17과 18 사이에는 큰 성격 차가 있다. 미키 17은 소심하고 소극적인 반면, 미키 18은 거칠고 공격적이다. 미키 17을 봐온 관객의 입장에서 미키 18은 매우 낯선 인물인데, 두 미키 사이의 상이함을 가지고 어느 쪽이 진짜 미키에 가까운지 고민하는 순간 판단 내리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느 형질이 원본에 가까운지 고민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으며, 거기엔 가깝고 멀고를 판단할 기준조차 없다. 인간 프린트 기술이 두 미키가 동일함을 보장하지 않는가
둘 사이의 유일한 차이라면 '어느 시점의 기억을 가지고 동기화되었느냐'일 것이다. 거기에서 성격상의 차이가 두드러진다고 가정해도 될까. 순간순간 우리의 감정과 태도를 정하는 것은 내가 보고 들은 것, 기억하고 경험한 바이다. 그러므로 어느 단면을 잘라 그 기억을 토대로 사람을 만든다면, 성격과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우리 스스로를 저 수많은 미키들과 달리 단일하고 일관된 존재라고 확신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내가 거쳐 간 시간을 얇게 저며 그때의 나를 들여다보면 분명 현재의 나와는 다른 존재일 것이고, 어느 시점인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인물이라고 보아도 되는 순간마저 있을 것이다. 사람이란 당연히 인격이 여러 가지이기 마련이다. 넘버링마다 조금씩 성격이 달라도 그들 모두가 결국 '미키'라는 범주 안에 묶이듯, 우리 역시 조금씩 변화해 나간다. 인간은 원래 가변적이며 미키는 그것을 좀 더 극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그럼에도 미키 18이 다른 여러 미키들과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 크게 무리는 아닐 것 같다. 그 이전까지의 모든 미키들은 중대한 차이 없이 수긍적이었고 소극적이었으며, 자신에게 가해지는 온갖 종류의 불합리를 견뎌왔다. 오직 미키 18만이 자신에게 가해지는 그러한 태도에 저항하고 분노한다. 왜 그런 변화가 생겼을까?
가설을 세워보고자 한다. 원래 미키라는 인물에게는 인격이 17번까지만 존재했다. 혹은, 그 이상으로 많았을 수도 있지만 18번은 그가 원래 가진 인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익스펜더블로 근무하는 것은 우리가 보다시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극한의 환경이다. 육체의 아픔은 참고 견디더라도 정신적인 고통은 그러기가 어렵다. 나샤를 제외한 모든 인물이 그를 다시 만들면 그만인 소모품으로 취급한다. 지구에서부터 함께해온 친구 '티모'마저 그를 계속해서 이용해 먹는다. 그런 상황에서, 미키의 기본적인 인격은 자신을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 해왔으며 심적 고통이 반복되었다. 그의 18번째 인격은 그런 상황에서, 필요에 의해 탄생했다. 그는 유례없이 공격적이고 거칠며, 또 무절제하다. 흥미로운 것은 미키 18이야말로 미키 17의 가장 강력한 아군이라는 것이다. 만찬이라고 초대받은 자리에서 당한 대우에 대해 분노하는 것도 미키 18뿐이며, 그는 곧장 자신에게 만행을 저지른 케네스 마샬을 죽이러 간다. 미키를 지속적으로 이용해온 티모를 응징하고 그가 초래한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 역시 그이며, 끝내 케네스 마샬과 함께 자폭하여 죽는다.
공격성이란 분명 도움이 되는 성격이지만, 언제나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키 18의 죽음과 함께 미키 17이 성장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처리이다. 그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언제나 나와 동행하게, 나의 기본적인 태도가 되도록 둘 수는 없다. 미키 18이 자신의 죽음을 향해 달려간 것처럼 말이다. 미키 17이 프린트 기계를 부수는 것은 더 이상의 넘버링을 거부하는 것이고, 시간의 동결과 인간 내적인 순간들의 단절과 구분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모든 순간, 모든 성격을 다시 자신 안에 품는다. 그러므로 미키 18은 죽지 않고 다시 그의 일부로 흡수되며, 1부터 18까지 모든 미키를 간직하고 기억함으로써, 그의 이름은 '미키 반스'로 다시 쓰인다. 기억할 것은 그가 니플헤임으로 향하기 전의 그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미키 18의 일부를 자신 안에 가진 존재라는 것, 즉 도식으로 표현하자면 '미키' + '미키 18' = '미키 반스' 라는 것이다.
수 차례 죽음을 겪으며 죽음에 무감각해진 미키 17은 미키 18과 마주한 뒤로 평범한 사람처럼 죽음을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그전까지는 죽고 프린트되면 '나'로 돌아온 것 같았는데, 이제는 죽으면 다른 존재로 대체 당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는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 내면에 흐르는 시간을 절단하면 절단면을 기준으로 서로 다른 존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존재론적인 고찰이 보인다. 언어학자 소쉬르와 정신분석학자 라캉을 따르면,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그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 때문이다. 가령, 우리는 신호등의 빨간불은 단일한 빨간불로 구별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호 변경의 노란불'도 아니고 '통과의 파란불'도 아닌 것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을 인식한다. 그에 따르면, 내가 '나'인 것은 '너'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와 비슷한 외모를 하고 똑같은 옷을 입고 같은 말을 하더라도, '너'는 내 눈앞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므로 다른 존재이다. 그러므로 미키 17에게 미키 18은, 같은 유전자 정보를 가지고 출력해낸 것이어도 자신이라고 인식될 수 없는 것이다. '나'가 내 눈앞에 '너'로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걸 깨닫는 순간, 미키 17은 이제 죽을 수 없다. 죽음이 다시 태초의 공포, 무(無)와 존재의 말살에 대한 두려움으로 돌아온다.
여기서 '테세우스의 배'로 돌아가자면, 그 배가 계속해서 원본이라고 인식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어떤 단절도 겪지 않은 연속체로 존재하기 때문은 아닐까. 긴 시간에 걸쳐 조금씩 테세우스의 배의 일부를 대체한다고 했을 때, 배에서 분리해 낸 그 일부를 간직하고 있다가 그것들을 다시 재조립하여 두 번째 테세우스의 배를 만들어 그것 옆에 세운다면, 무엇이 진짜 '테세우스의 배'일까? <미키 17>이 던지는 것은 이런 종류의 심화된 난제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멀티플이 혐오의 대상인 것은 최초의 멀티플인 사이코패스가 저지른 극악무도한 범죄와 그것을 다루는 법적 체계의 미비 때문만이 아니라, 어떤 존재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목격하는 것이 인간 존재의 그러한 기본적 함의를 무너뜨리기 때문일 것이다. 이 경우에 분열하는 것은 나의 존재뿐 아니라 우리가 그동안 의지해온 인식 체계 전반이다.
흥미롭게 본 주변 인물을 꼽자면, 나샤나 '카이' 말고도 과학자 중 한 명인, 작은 체구의 안경 쓴 여성 '도로시'를 들고 싶다. 물론 미키에게 주어진 가장 큰 구원은 언제나 그를 지지하는 연인 나샤이다. 그녀의 사랑은 거의 초월적이지만, 그래서 비현실적인 면이 있다. 현실에서 삶이 괴롭다고 느끼는 누구에게나 그들을 위한 나샤가 기다리고 있는가? 보통은 그렇지 않다. 도로시는 그에 비해 보편적인 사람의 모습인데, 극 중 미키가 처한 상황이 옳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나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치부하는 다른 인물들로 인해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못한다. 그러나 인간성을 가지고 계속해서 그를 신경 쓰고 크고 작은 도움을 준다. 실험당하는 미키에게 다른 연구원들이 등을 돌리고 있자 나샤가 난입하여 방호복을 입고 미키에게 정신적인 지지를 표하는 그 장면에서, 나샤가 등장하기 전부터 도로시는 흘긋흘긋 미키를 지켜보고 있다. 그녀가 미키에게 주는 관심이나 걱정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모두가 단순한 괴물로 치부하는 크리퍼에게 언어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들이 미키를 구해주었다는 것을 주의 깊게 들었고, 크리퍼의 언어를 통역하는 기계를 만들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모두에게 미샤와 같은 운명적인 사랑이 찾아오지 않더라도 도로시와 같은 조력자들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적극적으로 나설 용기는 없더라도 자신의 작은 소신을 간직한 사람들, 종종 그들이 결정적인 기여를 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아쉬운 점에 대해서도 언급을 해보자면....
'카이'라는 인물의 자리가 상당히 모호하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전체에 그녀가 기여한 바를 잘 모르겠다. 꼭 필요한 인물이었을까? 추가적인 역할이 있었는데 잘려나간 것이 아닌지 의문을 가져본다.
보안팀 남성 '지크' 역시 마찬가지이다. 케네스 마샬의 폭거에 저항하는 인물로 나오는데, 언급하는 배경에 비해 짧은 분량만을 가지고 퇴장한다. 마찬가지로 다른 분량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클라이막스로 달려가는 결말부는 다소 작위적인 연출의 연속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크리퍼 통역기가 뚝딱 만들어져 주인공의 손에 쥐어지거나, 각자 몸에 리모컨 폭탄을 달고, 케네스 마샬이 밖으로 나가 연설하기를 결심하는 등. 감독이 그리고자 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 모든 상황이 갑자기 척척 갖춰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중대한 오점까진 아니더라도 사소한 결함 정도는 될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장르 영화임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나 싶기도 하지만... 봉준호니까 느끼는 아쉬움이다.
영화가 끝나기 전 후일담을 푸는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개인적으로는) 혹평을 좀 하고 싶다. 시상식, 즉 잘한 행동에 대해 상을 주는 것이 목적인 행사에서 영화를 끝내는 것이 너무 뻔하고 클리셰적으로 느껴지진 않는지... 영화가 급하게 엔딩을 향해 달린 후 정리하지 못한 잔가지들을 나레이션을 통해 처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총평을 하자면, 나는 그래도 좋았다. 봉준호 감독의 필모 전체를 두고 보면 <옥자>보다 한칸 위에 놓을 수 있을 듯한데... 종종 보이는 큰 실망을 담은 후기들은 전작이 기생충이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걸작, 명작까진 아니어도 그 바로 밑에 자리할 만한 좋은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드물게 존재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였다. 요즘 영화계가 좋지 않으니, 흥행이 잘 됐으면 좋겠다.
이건 여담인데, 개인적으로 봉준호 영화 중 최고를 꼽자면 <살인의 추억> 아니면 <마더>라고 생각한다. 이번 작품을 보고 그 영화들이 생각나 한 번씩 보았다. 역시, 불세출의 감독이다.
<미키 17> 한 줄 평
그의 일생은 단면들의 나열을 거쳐 '미키 반스'를 향해 끝없이 수렴하는 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