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 솔직한 리뷰!

왕과 사는 남자, 관객과 가는 영화

by 김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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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사는 남자>, 속칭 왕사남. 현 시점 1200만까지 내다보고 있다지요? 후기를 남길 마음까진 없었습니다. 관객을 직관적으로 즐겁게 하는 영화인지라, 특별히 남길 말까지는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오히려 그 점에서 할 이야기들이 있다고 여겨 무언가 써봅니다. <왕과 사는 남자>에 대해서, 제 개인적인 소감과 영화의 흥행, 장르적인 특수 등에 대해 소박하게 말해보겠습니다.


물론 아래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큰 틀에서 따라가는 작품인만큼 줄거리를 미리 아는 것이 시청에 방해는 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영화가 즐거운 이유는 사람마다 각양각색이니까! 주의해서 나쁠 건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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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칭찬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배우들 이야기부터 해야합니다. 구멍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자뭇 무난하고 평범하게 보일 수 있는 영화에 역동적인 움직임을 불어넣었습니다. 단종-이홍위 역의 박지훈은 파리한 소년의 모습에서 노기를 띤 선왕까지 훌륭하게 소화했습니다. 그가 한명회를 대면하는 무력한 모습에서부터 영화가 시작하고, 그 무기력과 피폐함을 이어받아 밥상을 무르라고 호통치는 장면 다음에는 엄흥도의 이야기를 듣고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이 장면 사이의 갭을 안정적으로 잡아놓는 것은 물론 배우의 연기(풍기는 분위기와 하고 있는 모습을 비롯하여)와 연출 등이겠습니다. 저 나이라면 충분히 저럴 수 있다고, 그만큼 어리고 세상이 신기하고 즐거운 나이라고. 그래야만 하는 때였다고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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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흥도 역의 유해진은 말할 것도 없죠. 코미디와 휴먼드라마, 비극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하드캐리'라는 수식이 과연 어울립니다. 뻔한 이야기지만, 영화 초반에 뗏목을 잡아당기는 장면과 마지막에 이홍위의 목에 걸린 활줄을 힘껏 잡아당기는 장면은 비극적으로 병치됩니다. <왕과 사는 남자>의 전체 이야기는 마을을 살려보겠다는, 유력가 양반을 모셔서 결과적으로는 마을을 부흥시키고 아이들에게 쌀밥을 먹여보겠다는 엄흥도의 욕심으로 자기 고장의 청령포를 유배지로 만들면서 시작합니다. 영월 군수를 설득하고, 집을 지어 올리고, 주기적으로 상세히 보고할 것을 약속하고. 그리하여 '단종'으로 책봉된 이홍위가 '노산'으로 강등되는 길에 단단히 한 몫 하지요. 하지만 광천골에서 동거동락하며 모든 것을 빼앗기고 삶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렸던 '노산'을 소탈한 행복을 알고 주변인들과 가까이 지내는 소년 '이홍위'로 돌려놓습니다. 끝내 이홍위는 유배지에 드나들었다는 이유로 엄호위의 아들이 태형 당하는 것을 보고, 자기 백성등을 아끼는 마음에서 다시 '단종'으로 변모하고자 합니다. 그러니 엄흥도는 언제나, 단종-이홍위를 위해 줄을 당기는 사람이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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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한명회였다고, 이홍위나 엄흥도만큼이나 중대한 인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주로 펼쳐지는 공간은 토속적인 행복이 스며나는 영월이지만, 극이 지나치게 밝아지지 못하고 서늘한 긴장을 유지하는 것은 그의 존재 때문입니다. 한명회 역을 맡은 유지태를 보며 위암갑 있는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상당히 벌크업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드라마 <비질란테>에서 만든 몸에서 더 증량했을 뿐 아니라 테이프를 통해 눈꼬리를 당겼다고 합니다. 불 켜진 객석을 뒤로 하고 나오는 관객들이 입에 담는 육두문자나, 각종 지도 어플에서 한명회의 실제 묘소에 가해지는 테러(?)만 봐도 상당한 열연이었습니다. 결국 영화 내내 세조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한명회가 세조의 역까지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소동이 한명회 손에서 정리되면서 이홍위-금성대군의 좌절과 한탄이 더욱 심화되고 영화를 더 애절한 비극으로 느껴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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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웠던 것들을 뽑아볼까요. 실제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언급 안 하고 넘어갈 수가 없죠. 일단 호랑이였습니다. '이 영화는 호랑이가 제일 연기 못한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죠. 시각적인 효과가 중요한 영화는 아니어서 호랑이의 첫 번째 등장은 저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그래도 문제적이다! 라고 느낀 건 호배우의 두 번째 출연씬입니다. 힘아리 없던 단종이 호랑이 미간에 화살을 명중시키는 부분, '네 상대는 나'라는 조금 철지난 연출과 대사 등등... 이지요. 자신이 이제는 궁궐에 거처하는 임금이 아니라 영월로 유폐된 '노산'임을 인정하는 듯하던 이홍위가 조선의 '왕'으로 기력을 회복하는 서막으로서, 영월 산의 '왕'인 호랭이와 붙여놓았다는. 다소 긍정적인 편의 해석이 있는 것도 압니다만! 그래도 많이많이 작위적인 장면이었다고 느낍니다. 조악했던 CG는 이렇게, 대단히 섬세한 시각적 처리까진 없어도 된다는 장르적인 특성에도 불구하고 톡 튀는 단점이 됩니다. 기본적인 장면 자체가 이미 작위적이었는데 막타를 쳤달까요.


하나하나 짚기가 민망하지만, 조금 더 말해볼까요. 영월 호랭이와 함께 언급할만한 문제는, 종종 연출이 너무 옛스러운 부분들입니다. 비장할 때 뒤에서 우르릉 번개가 친다던가, 타이밍 좋게 비가 쏴 내린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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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도 영화 평가와 직결될 수 있는 부분은 개연성의 문제입니다. 일단 인물 간 감정의 개연성이 조금 문제적입니다. 장면이 끊어끊어지는 와중에, 어느 순간 이홍위와 엄흥도가 이해되는 것보다도 아주 많이 가까워졌다는 느낌을 저는 받았습니다. 엄흥도가 이홍위에게 많은 감화를 받았던 거 같은데,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냐고 물으면... 잘 모르겠습니다. 관객에 따라서는 이홍위의 개심에 크게 공감이 가지 않을만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들과 마음 사람들의 안위가 중요했던 마음을 뒤짚을만큼 결정적인 계기까지 제가 봤던 걸까요. 엄흥도와 이홍위가 마지막 담화를 나누고 부탁대로 줄을 잡아당기기까지도요.


또 사건의 개연성이 다소 어색하다고 느껴지는 부분들이 영화 후반에 좀 있었는데요. 이홍위는 곤장 맞는 엄흥도의 아들을 위해 유배지를 벗어나는 중죄를 저지르지만 아무런 탈도 없이 넘어갑니다. 이후 개심한 엄흥도가 한명회를 져버리고 이홍위를 데리고 모의된 장소를 안내하지만 매복해있던 한명회에게 붙잡히고, 엄흥도까지 엄중한 처벌을 받을 위기에서 이홍위가 '네가 나를 속이다니'하며 연기를 해 엄흥도를 완전히 구하기까지. 두루뭉술하게 뭉개고 넘어간 부분들이 많습니다. (정말 사소하다면 사소할텐데, 쌀밥이라곤 장가가야만 볼 수 있던 마을에서 아무리 이홍위 1인분이라지만 매끼 쌀밥이 제공된 것도 좀 놀라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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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비전문가가 천만 영화를 까는 것처럼 우스운 짓이 또 있을까요! <왕과 사는 남자>의 대흥행은 특기할만한 사건이지 않나 싶습니다. 영화계가 전례 없던 불황에 빠져있고, '명절 + 가족 중심 대중영화'라는 공식마저 이제는 통하지 않는가~ 하는 시점이었으니까요. <왕과 사는 남자>의 천만 돌파는 "관객은 어쨌거나 재미만 있으면 본다"는 증명 같아 보입니다.


실제로 평론가 평점들이 상당한 고득점은 아닙니다. 많이 언급되는 평론가들의 평가가 대부분 별 3개, 많으면 3.5개에 머무는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이건 특이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형화된 현상에 가깝다고 할까요. 당연히, 대중은 어려운 영화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어렵기만 한 영화'요. 물론 어렵다고 무조건 훌륭한 건 아니지만 걸작이라고 칭송받는 영화들은 다수가 다채로운 해석이 가능하거나, 기존 관념을 깨뜨리거나, 이미 복잡한 현실을 다뤄내거나 쉽게는 포착할 수 없는 미적인 요소들을 밀도 있게 갖추고 있곤 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어려움과도 직결됩니다. 그러니 평론가들에게 호평 받으면서 관객들까지 동원하는 영화들이 정말 대단한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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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은 그동안, 우리 관객들은 한국영화에 지쳐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전분적인 분석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기에 조심스러우나...) 코로나 시기에 극장이 위축된 것은 자연스러웠지만 이후에도 관객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휴식기 아닌 휴식기를 가지면서 여러가지를 깨달은 것은 아닐까요. 집이라는 공간에서 즐기는 OTT가 충분히 만족스러웠거나, 한 달에 한 편씩은 영화를 소비해온 관습에 의문이 든다거나, 종합적으로 영화라는 콘텐츠 자체가 합리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겠죠. 이후로도 침체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감독들이 만드는 영화와 관객들 사이에 괴리가 존재한 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영화 산업과 관객들 사이에도 의견이 충돌한 것 같습니다. 티켓 가격은 올랐고 오른 가격에 관객은 더더욱 발을 끊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왕과 사는 남자>는 이미 일반화된 공식이 성공을 거둔 사례입니다. 크게 모난 곳 없이 당연히 먹힐 만한 이야기를, 좋은 타이밍에, 일관되고 정갈하게 펼치는 영화입니다. 영화가 호평받고, 천만 관객을 넘기고, 영월에 관광객이 몰리는 한편에서 '이게 천만 정도의 영화냐'는 후기도 있었습니다만. 저는 '이러니까 천만 영화다'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공식을 충실히 따르는 영화가 그동안 없었으니까요. 엄청나게 훌륭한 면은 없을지라도(굳이 꼽자면 배우의 열연?) 많은 관객을 충분히 동원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아까 이홍위-엄흥도 사이 감정의 개연성이 잘 와닿지 않는다고 하였죠. 그러한 의문은 박지훈-유해진의 열연과 나룻배-활줄로 이어지는 장면 구성, 이후 화면에 띄워지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자막(단종의 최후, 복권, 이홍위를 교살한 노비와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에 대한 기록, 단종과 엄흥도가 영월에 함께 묻혔다는 사실 등)에 의해 무마됩니다. 엄밀히 말해, 해결된 것이 아니라 무마된 것이죠.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중요한 영화가 아니다, 라고요. 앞에서 말한 호랑이 CG의 조악함 등도 마찬가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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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완벽한 영화가 있겠습니까. 결국은 설득력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영화가 관객을 얼마나 설득시키고, 관객이 영화에 대해 얼마나 눈감아 주는지의 문제겠지요. 아무래도, 영화는 본디 연출된 것이고 지어낸 것이잖아요? 좋게 평가받는 영화, 관객이 사랑하는 영화에서는 영화-관객 사이의 이러한 '공모'가 벌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마스터 플롯'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사를 만들 때 활용 가능한, 다양한 형태로 반복되고 변주되어온 이야기 뼈대를 말합니다. 권선징악, 신데렐라 스토리 등이 몹시 대표적이죠. 이것들은 정말 옛날옛적부터 지겹도록 반복된 것들인데, 우리는 여전히 흥미를 느낍니다. 관객이 좋아하는 건 어떻게 보면 그만큼 간단하고 또 간명합니다. 한국 관객들이 등을 돌린 영화들 다수는 어쩌면, '관객이 무얼 좋아하는가'보다도 '어떤 영화를 보여주고 싶은가'에 치중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이는, 다소 평범하다면 평범하다고도 할 수 있으며 대중적인 흥행 공식을 충실히 따르는 <왕과 사는 남자>가 그동안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고전적인 방식으로 많은 관객을 동원한(여전히 동원 중인) 것처럼요.


다만 이런 말은 하고 싶습니다. 흥행 공식을 따른다는 것도 말이 쉽지, 분명히 쉬운 것이 아닙니다. 당연한 것으로 대단히 성공한다면, 그건 자신의 당연함을 특별함의 경지에 오르도록 닦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 흥행이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된 시점에 이렇게 흥행한 영화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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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사는 남자>는 슬픈 영화입니다. 안 그래도 슬프고 애통한 사건을 더욱 극적으로 그리고 있잖습니까? 이동진 평론가가 어디선가 눈물 짜내는 신파 영화에 대해 '공업용 최루법'이라는 비판을 한 적이 있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말은 이중의 의미로 비판입니다. 영화라는 일종의 예술을 논하면서, '공업용'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했고 최루'법'이라고하였으니까요. 공업용이라한다면, 매캐한 것이 눈을 자극하도록 만들어졌으니 생리적으로 눈물이 날 뿐 전혀 미적이지 않다는 이야기겠습니다. 최루'법'이라고 한다면, 이미 관객의 눈물샘을 누르도록 반복되어온 도식을 따라갈 뿐이라고 말하며 비판하는 것이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죠. 영화를 보고 관객이 울게끔 하는 것이 비판의 소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톤과 뉘앙스의 문제입니다. 무슨 수단을 통해서 언제 어떻게, 왜 울게 만드느냐. 엄흥도가 줄을 당기는 장면은 그들의 첫 만남을 연상시킵니다. 물론 슬픈데, 슬플 뿐 아니라, 관객들은 스스로 흘리는 눈물에 대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역사가 이미 비극이고 참극이었으며, 영화가 그것을 적절히 구성하고 연출해내고 있습니다. 많은 관객들이 설득되고 있습니다. 정당하고 적법했으며, 어쩌면 능력도 있었음에도 불구 누군가의 욕망에 의해 쫓겨난 것으로 모자라 죽기까지 한다는 사실에 대해. 그리고 죽임의 대상인 선왕이 물장구치는 것이 즐겁고 백성들과 지내는 것이 재미진 어린 소년이라는 것에 대해 말입니다. 이것에 대해, 절차를 지킨 정당한 사람들보다 우기고 질서를 어기고 빼앗은 사람들이 득을 보는 현실에 대해 이미 사람들이 분개하고 있기에 더욱 몰입했다는 이야기도 있더라고요. 그럴듯합니다.


슬픔 뒤에는 층층이 쌓아올린 서사가, 이유가 있습니다. 당연히 감정에는 명분이 필요하고, <왕과 사는 남자>는 그것을 의문스럽고 억지스럽게 꾸미지 않았습니다. 걸작이라고, 예술이라고 칭송받는 영화처럼 대단히 탁월하고 훌륭하진 않더라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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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적어볼만한 것이 있다면 <왕과 사는 남자>가 자신의 장르성을 다루는 방법입니다. '사극'이라는 것 말이지요. 배경이 과거일 뿐인 판타지물이나 사건을 다르게 바꾸어도 되는 대체역사물이 아니라면, 사극으로서는 보여줘야 하는 것들이 이미 어느정도 정해져 있습니다. 이미 있었던 이야기를 재료로 한다는 점이 장점일 수도 있고, 크게 벗어나면 안된다는 점에서 제약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은 '어떻게 보여주느냐'의 문제입니다. 단종은 유배를 와야하고 결국 역사의 희생양이 되며, 한명회는 몸 건사하여 권력을 쥡니다. 이 과정을 굳이 재현하여 필름에 담는다면, 결국 '어떻게?'와 '왜?'라는 질문들에 대답해야 합니다.


영화는 큰 틀에서는 역사적인 흐름을 따라가고 그 안에 상상을 가미했습니다. 이홍위가 점차 마음의 문을 열고 광천골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는 에피소드 같은 것들이죠. 흥미롭게도 영화는 가장 결정적인 장면에서 역사를 인용, 응용합니다. 내려진 사약을 감히 전하지 못하고 있을 때, 단종을 모시던 노비가 활줄로 단종을 교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맹꽁이 서당'이라는 역사 학습만화에서 보았던 기억이 나는데, 노비가 '이것도 못 하느냐'고 호기롭게 나서서 장난처럼 줄을 잡아당기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사건의 심각성을, 비극성을 모르던 노비의 치기 어린 객기로 다룬 셈입니다. 그 노비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라는 인물은 엄밀히 다른 사람입니다. 가령 신분부터가 다릅니다. 그 두 인물을 <왕과 사는 남자>는 겹쳐놓고 있습니다. 여기서 고증을 따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보처럼 보일 겁니다. 물론 영화는 창작물이고 일종의 예술이며, 중요한 것은 '어떻게'와 '왜'이니까요. 그리하여 보여주는 것이 그럴듯하고, 또 관객이 좋아하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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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을 교살한 것과 수습해준 것이 같은 인물이라는 영화적 시도는 배우와 감독, 스텝들의 분투로 인해 맞아들어갑니다. 관객들은 자막을 통해 실제 역사를 알게 되지만, 그에 앞서 스크린으로 본 것들에 설득됩니다. 실제 있던 역사에서 대단히 벗어날 수는 없다는 사극의 제약을 새로 엮어낸 셈입니다. 물론 역사와는 다르지만 이건 영화이고, 그런 슬프고 의로운 이야기가 관객이 이 영화에서 보고싶어하는 것이니까요. 사극에서 이야기가 정해져 있다면, 관객이 해당 역사에서 보려고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정해져 있습니다. <왕과 사는 남자>는 그 틀을 충실히 따라가면서도 변주하여,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을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자기 정체성에 대해 성실하면서 꾀도 좀 부리는 영화라고 할까요?


관객들은 바로 그런 점에 크게 감응하는 것 같습니다. 단종이 죽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잘 없었을 겁니다. 그런 역사 앞에 휴먼 드라마와 코미디를 배치하여 뒤의 비극을 돋보이게 하는 동시에 슬픔이라는 감정에 설득력을 부여하고, <왕과 사는 남자> 안에서만 통용되는 역사를 써본 것입니다. 결과는 흥행으로 드러난다고 봐야겠죠. '관객으로 들어가 백성으로 나온다'는 후기가 인상에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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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저는 좋은 작품은 맞지만 굉장히 훌륭한 작품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많은 관객들에게 크게 어필하는 영화이고, 그것만으로 어떤 반열에 있습니다. 또 저는 여러가지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 사건을 널리 알리는건 당연히 좋은 일이고, 문화재 관광으로도 이어지고 있고요. 또 위기에 빠진 영화계에 다시금 지표가 되어준 것 같습니다. 어쩃거나 관객들은 영화가 재미있으면 관객석에 앉는다는 간단하고 명료한 사실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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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문화 현상이 되어버린 영화인데 즐겨서 나쁠 거 있나요? 저는 '호'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보셨나요?


(약간 여담인데, 글을 쓰는 시점에서 표절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단편적이나마 찾아본 바로는, 일시적인 해프닝으로 지나갈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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