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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가'가 아닌 '어쩔수가' 없음에 대하여

「어쩔수가 없다」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리뷰

by 김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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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급한 일들이 있어 생각보다 늦게 관람하게 되었다. 영화에 대한 평이 상당히 갈리고 알고 있더라. 나는 아주 재밌게 보았고, 뛰어난 영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가 아쉽다고 인지되는 지점 역시 뚜렷하게 보이는데, 자칫 영화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을 가능성이다. 그래서 영화에 대한 전체적인 견해보다도 그 지점에 대한 내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치명적인 스포일러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 이번 영화만큼은 아무런 해설도 찾아보지 않고 작성해 보았다. 개인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인 해설이니 완전히 틀린 이야기일 수 있다.


영화라는 서사물에 커다란 두 축이 있다면, 어쩌면 주제와 내러티브라고 생각한다(순전히 내 생각이다). 주제는 모두 아는 그 주제이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 내러티브는 이야기(또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 자체)인데, 주제를 전달하는 일종의 도구이다.

내러티브가 훌륭한 영화들이 있다. 그냥 이야기를 감상하는 것이 너무 즐겁고 흥미로운 영화들. 또 어떤 영화들은 그러면서 주제가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기도 하다.

어떤 영화들은 그렇지가 않다. 감독이 주제를 꼭꼭 씹어 먹이지 않고, 어딘가에 던져져 있으며 내러티브 속에서 관객이 그것을 찾아내 이야기와 일치시켜야 한다. 왜 이런 불편한 행동을 하는 걸까? 그렇게 얻어져야만 하는 주제인 경우가 있다. 혹은 주제와 내러티브 사이의 이런 간극 자체에서 의미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여러 경우들이 있다.

박찬욱의 영화들은 주제와 내러티브를 다소 떨어뜨려놓는 경우라고 생각한다. 가령「올드보이」는, 내러티브를 따라가면 근친으로 벌어진 사건에 근친으로 복수하는 복수담이 된다. 이것만으로 대단히 힘 있는 이야기였지만, 개인적으로 감독이 보여주려고 하는 이야기는 그리스 비극의 한 변주였다고 생각한다. 운명의 장난처럼, 뜻하지 않게 패륜과 근친의 죄를 범한 오이디푸스는 그것들을 '자신 역시 원치 않은 일'이라 합리화하지 않고 자신의 책임으로 떠안으며 눈을 찌른다. 신들의 장난질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농락당할 때, 죄인을 자처하여 인간을 긍정하는 것이다. 마지막에 혀를 자르는 「올드보이」의 오대수 역시 인간 운명에 대한 고뇌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올드보이」의 이야기 자체는 제정신 아닌 미친 사건과 사연들의 향연인데 감독이 이것을 굳이 왜 보여주는가,에 대해 이런 답을 할 수가 있다. 많은 이들이 불쾌하다고까지 느꼈을 만큼 폭력의 향연이었지만 그것은 이야기 자체가 그리스 비극의 변주이면서 운명이 가하는 폭력에 대한 이야기인 이상 불필요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어쩔수가 없다」라는 박찬욱이 던진 말을 읽어내는 문법 역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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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만수'는 25년 다닌 제지 회사 '태양'에서 해고당했다. 다시 사들인 어릴적 생가를 직접 뜯어고친 커다란 단독주택과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자폐증이 있지만 대단한 예술적 재능이 있는 딸. 그들과 전과 같은 일상을 위해선 다시 취직을 해내야만 한다. 얻은 기회들이 잘 풀리지 않자 '문' 제지 회사에 무작정 가 빌지만 당연히 통할 리 없었고, 반장인 '최선출'에게 면박을 당한다. 그러고 나서 선출을 관찰해 보니, 선출의 자리가 만수에게 딱이다. 그를 없애버리면 취업이 될까. 아니, 빈 자리에 모여들 경쟁자들까지 제거를 해야한다. 평범한 중산층이고 가장인 만수는 그렇게 익숙하지도 않은 범죄를 계획하기 시작한다.


처음에 만수가 벌이는 일들은 완전히 엉터리였다. 첫 번째 제거대상인 '구범모'를 관찰하고 미행하다 뱀에 물려 구범모의 아내인 '이아라'에게 응급처치(그 역시 엉터리인)를 받거나, 범모가 외출하고 빈 집인줄 알고 들어갔다가 아라와 내연남의 정사를 목격하고, 일찍 귀가한 범모가 그 광경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애를 쓰다 결국 실패한다. 끝내 범모를 죽이기로 마음 먹어 음악을 크게 틀고 권총을 겨누지만 범모가 그를 내연남으로 오해하고, 아라가 만수를 목격하고는 제압을 시도하며, 그러다가 만수가 실직 당하고 폐인이 된 남편과 외도를 저지르는 아내 사이의 부부 카운슬링을 개최한 꼴이 되면서 개판이 된다. 만수의 손에서 오발된 총알은 범모의 어깨를 맞히며 부상을 입힐 뿐이지만, 울분이 터진 아라의 손에 잡힌 총은 범모의 급소를 관통한다. 만수는 그 역시 아라의 총에 맞을까봐 다급하게 도주해야 했다. 이후 아라와 내연남은 현장을 치우고 범모를 은폐한다. 모든걸 지켜본 만수는 몰래 가 파묻힌 총기를 회수한다.


두 번째 제거대상인 '고시조'의 경우, 범모는 더 용이주도하게 일을 꾸민다. 마찬가지로 제지회사에서 실직당한 그는 구두 가게에서 일하며 딸을 키우고 있다. 고객으로 접근하고 퇴근길의 그와 의도적으로 마주친 뒤, 총으로 살해한 뒤 파묻기 위해 시신을 가져온다. 그러나 현장에 탄피를 떨어뜨린다. 경찰의 방문은 두 차례 있 었다. 집안이 어려워지자 친구와 친구 아버지의 휴대폰 가게를 턴 아들과, 제지회사 실직자들의 연쇄적인 실종을 수사하는 경찰. 한 차례 긴장했으나 만수는 어떤 혐의도 의심받지 않는다. 그러나 현장에서 발견된 탄피가 북한제라는 사실에 만수의 아내가 움찔한다. 만수 아버지의 유품이 월남전에 참전한 아버지가 베트콩을 죽이고 가져온 북한제 권총임을 그녀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온실에서 고시조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 시종의 팔을 아들이 얼핏 보기도 한다.


마지막 대상인 최선출의 경우, 그는 완벽하게 모든 일을 처리한다. 예전에 찾아와 사정하던 사람이라며 술 한잔 하자고 위스키 한 병 들고 찾아와 집에 초대받는다. 마침 그는 외로우며, 위스키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굉장히 빠르게 친해진다. 생각보다 잘 통하는 면이 많으며, 선출은 인간적인 면이 있는 좋은 사람이었다(만수가 빌빌 기는 것을 목격했던 그 첫만남에서조차, 만수는 모욕으로 받아들였겠지만 선출은 근처 어디에 좋아하는 자기가 위스키바가 있으니 가서 한잔 하라며 돈을 쥐어주었다). 일이 많고 힘들다며 불만을 토로하는 선출에게 만수는 그럼 너와 같은 급인 직원이 하나 더 필요하지 않냐며 위에 요청해보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만수 본인이 손쉽게 '모가지' 당했던 것처럼, 그 역시 아무리 잘 나가더라도 월급쟁이에 불과하다. 계획대로 선출을 죽일 수밖에 없다. 선출이 폭탄주를 말아주며 권한다. 그동안 선출과 주고받은 술들은 9년간 유지해온 금주 탓에 전부 흘려버리고 있었지만, 이번 잔은 피할 수가 없다. '어쩔수없다'는 주문(작중에서 내내 되뇌던)을 중얼거리고는 단숨에 마신다. 그가 금주했던 것은 술을 너무 즐겼고 술만 마시면 개가 되었으며, 아내가 전남편에게서 얻은 아들까지 폭행하고 토하다 질식으로 죽을뻔 했기 때문이다. 몸에 알코올이 돌고 충동적이 된 그는 먼저 실직 당하고부터 그를 괴롭혀온 치통을, 펜치로 직접 뽑아버리며 해결한다. 선출의 부엌에서 술들을 꺼내 마구 비우며, 인사불성이 된 선출을 땅에 묻고 자신이 죽을뻔 했었던 그대로 술과 음식물을 선출의 입에 깔대기로 들이부은 뒤 랩으로 감싸 질식시킨다. 그리고 마치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다 질식한 것처럼 연출해놓는다. 이번에도 현장에 무언가 남길 뻔하지만, 잊지 않고 뽑아버린 이빨과 펜치를 챙긴다.


보다시피, 일련의 이야기는 만수가 인간성을 잃어가는 과정이다. 첫 번째 살인은 아주 미숙했고 심지어 범행을 완수하고 현장을 치운 것은 피해자의 아내였다. 두 번째 살인에선 탄피라는 중대한 단서를 남겼으나 단순히 운이 좋아 수사망을 피했다. 세 번째 살인에서는 마침내 완벽히 범행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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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치통은 실직을 당하고 회사에서 제공한 해고자 대상 교육에서 시키는 자기암시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실직은 내 잘못이 아니다, 내 가족은 나를 응원한다' 치아의 뿌리는 잇몸에 박혀있다. 그것이 주는 고통은 자신의 뿌리에 대한 고통, 맞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고통이다. 그동안 이뤄온 것들에도 불구하고 구직부터 다시 시작하라니. 그러나 직접 난자리를 만들어 재기한다는 계획이 시도되고, 더 근원적인 자기부정이 시작된다. 살인자가 되며 인간이라는 뿌리 자체가 뒤흔들리기 시작한다. 치통, 뿌리부터 욱씬거리는 고통은 그가 범죄를 저지르며 자꾸 현장에 남기는 것들과 함께 그의 마지막 인간성을 상징한다. 처음엔 총을 두고 왔고, 다음엔 탄환의 껍데기인 탄피를 남겼다. 마지막 살인을 앞두고 그는 지겨운 치통을 끝내기 위해 이빨을 뽑아버린다. 존재의 내밀한 곳에서부터 고통주던 양심을 제거해버렸다. 그 인간성의 껍데기 역시 현장에 남겨질 뻔했으나, 그는 마지막으로 그것을 챙긴다. 완벽한 범죄를 행함으로, 그는 완벽히 비인간적인 괴물로 거듭난다.


또 그가 벌이는 살해 대상들은 점점 자기 자신과 비슷해진다. 만수는 첫 대상인 구범모를 이해하지 못하고 살해하기 전에 훈계를 하기도 했다(네가 이렇게 구니 아내가 마음이 떠나지 않았냐, 아내가 제안한 음악카페가 어때서 안 하느냐, 뭐라도 좀 해라). 동시에 그가 아내에게 하는 말들(종잇밥 먹은게 이십 년이 넘는데 어떻게 다른 일을 하느냐)에 공감하기도 했다. 두 번째 대상인 고시조는 어떻게든 딸을 먹여살리려 애쓰고 있었고, 그 모습에 마음이 동해 잠깐 포기하려고 하기도 했으며 살해 전에도 불안해하며 구토하는 등 심리적 갈등이 컸다. 세 번째 대상인 최선출은 술을 즐기고 단독주택에서 바베큐 해먹는 것이 꿈인 등 일치하는 것이 많았고 굉장히 빠른 속도로 친해졌다. 처음부터 최선출이 출연한 제지회사 유튜브 홍보 영상 등을 보며 '저 자리가 나에게 주어진다면...'으로 시작한 계획이기도 하다. 계획은 자신의 다른 모습인 듯한 그를 죽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인간성을 버리는 것은 자기를 죽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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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라는 인간 여러가지 면에서 부족했다. 영화 극초반부터 그는 계획한 일을 제대로 실행하기 위해 붉은 글씨로 손에 무언가 적는 버릇이 있었다. 부당해고에 대한 의견을 임원들에게 표현하거나 면접을 볼 때 특히 두드러진다. 그런 보조가 필요한 까닭은 그가 하고자 하는 말에 엄밀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가 내뱉어보고 행동해보고자 하는 것이 엄밀히 그의 모습은 아니어서 외워야 했기 때문이다. '문 제지'라는 회사에 취직한다는 문제지를 풀기 위한 답안지로서 그는 그가 아닌 것들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세 차례에 걸쳐 자신의 인간성을 제거하며, 그는 자신이 되어야 하는 것들을 전부 제거해버리고 자리에 맞는 사람을 자신만 남겨버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한다. 자신을 제약하는 것이 앞에 놓인 사람들 자체이며, 그들이 제거되고 나서야 답안지 없이 자기 자신으로 설 수 있다는 그 마음은 끔찍하게 보이지만, 방식 자체가 괴팍해서 그렇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사람은 사람에게 여러 방식의 괴로움을 주지 않는가. 저 사람이 싫다거나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스쳐지나가게나마 자주 품지 않는가.


앞서 「어쩔수가 없다」에는 이야기 전체를 관장하는 주제가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어쩔수 없음'인데, '어쩔 수 없음'이 아니라 '어쩔수 없음'이다. 왜 그런가? 정확한 맞춤법은 '어쩔 수가 없다' 이지만 영화의 제목은 '어쩔수가 없다'이다. 감독의 말대로 그것이 툭 튀어나오는 감탄사이기 때문이고, 또한 삶에 대한 언명이자 일상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주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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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명'은 삶에 대한 의사와 태도를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은 곧 현대인의 삶의 태도가 되었다. 누구나 바라는 삶의 형태가 있었겠지만 꿈꾸는 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기 때문이고, 혹은 꿈꾸는 것 자체가 사소하고 작아졌다면 그 역시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협하고 자기합리화하며 살아가며, 만수라는 인물은 그것을 극한으로 구현할 뿐이다. 그러한 방법 중 하나는 '어쩔수가 없다'의 주문화이다. 만수는 자신이 하려는 일이 망설여지거나 거부감이 들 때마다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어쩔수가 없다'고 왼다. 그는 이런저런 상황들에 의해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는데, 그러한 배경과 환경까지 고려하기는 벅차고, 당장 해야하는 행동을 할 뿐이다. '어쩔수가 없다'에 묵음처리된 것은 '이 상황에서'이다. 너무 복잡하고 어려우니, 처한 거시적인 상황이라도 삭제하고 행동이나마 가능하게 해보려는 것이다. 만수가 하려는 것은 상당히 극단적이고, 그러니 '어쩔수가 없음'은 태도나 자세 따위가 아니라 강력한 주문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관자놀이에서 피가 터질 지경으로 두드려야 한다.


그래서 '어쩔 수가 없다'가 '어쩔수가 없다'가 되는 것은, 거듭 반복되며 띄어쓰기가 삭제될 정도로 말 자체가 육화되었음을 표시한다.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은 한편으로 자기 의지가 아니었다는 말도 된다. 상황이 그러해서 그리했을 뿐, 내 뜻이 아니었으며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는 순간'들이 반복되며 상황과 환경에 대한 성찰이 사라지고 자기 의지가 아니었다는 사실만 남을 때, 반성의 여지 역시 사라진다. '어쩔수가 없다'라는 말에서 결핍인 것은 그런 것들이다. 괴물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거대한 악을 실행할 수 있다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사유와 반성의 부족이 반복되고 끝내 체화되며 학습되는 것이다.


다만 '어쩔수가 없음'은 우리 도처에 널려있다. 다들 피곤하게 재미없는 일을 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이제는 '어쩔수가 없음'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결탁한 탓에, 어디서부터 어쩔수 없던 것인지 추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마 만수의 해고 역시 기업 입장에서의 '어쩔수가 없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범모가 낭만적인 연인에서 알코올중독자 폐인이 되어 아내에게 소솔히 한 것 역시 어쩔수 없기 때문이고, 아내의 외도 역시 그렇다. '네 실직이 아니라 문제는 실직에 대처하는 너의 태도'였다고 외치는 아내는 그동안 쌓아온 울분으로 범모를 살해한다. 그리고 정황을 꾸며 사건의 은닉에 만수보다도 힘쓰는데, 이는 그녀 역시 어쩔수가 없기 때문이고, 이것이 마침 자신의 '어쩔수가 없음'으로 범죄를 속행해 저지르던 만수를 취조에서 벗어나게 한다. 모두 가지고 있는 '어쩔수가 없음'들이 드러나지 않는 까닭은 이렇게 그들 사이에 어쩔수 없는 공모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과거 범모는 자기가 다닌 회사가 입찰 경쟁에서 시조의 회사에 패배한 것에 원한을 품었고, 총을 가지고 잠적해 시조를 죽였다. '어쩔수 없음'은 은폐되고 인과적인 논리가 덧씌워진다.


만수의 살인이라는 극악하고 사회적인 범죄와, 금주라는 가정적이고 개인적인 금제가 병렬될 수 있는 것 역시 '어쩔수가 없음'의 논리 때문이다. 그는 음주를 행하기에 앞서 시조의 살해를 앞뒀을 때 만큼이나 고민하며 '어쩔수가 없음'의 주문을 읊는다. 그 순간 집에서는 아내에 의해 만수가 덮은 시신이 발굴되고 있다. 술이 그런 고뇌의 영역, 주문으로 해결해야 하는 영역에 있는 반면 살인은 이제 '이미 충분히 합리화 된' 영역에 있다. 최소한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다른 방법이 없다며 저지르던 것이었다. 그가 금주를 결심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가족들을 위해서였다.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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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말한 바 있지만 그가 음주를 금지의 영역에 둔 것은 그 자신이 죽을 뻔 했고, 아들을 때렸기 때문이다. 라캉의 '아버지의 이름'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라캉에 따르면 법의 시초는 아버지라는 이름의 금제인데, 어머니를 욕망의 대상 삼는 것을 금지하는 '아버지의 이름' 덕에 사회적으로 부여되는 금지들을 처음 받아들이며 언어로 소통하는 타자들과의 관계에 진입한다. 라캉-프로이트를 그리 좋아하진 않아서 법과 질서의 시초가 가족 공동체 내에서 갈등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규율에 기반한다는 아이디어만 참고하려고 한다. 그런 맥락에서, 만수가 자신의 죽음(술로 인한 질식사)으로 하여금 가족에게 크나큰 위기를 초래하거나 자신의 핏줄이 아닌 아들을 폭행해 가족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계기를 막고자 스스로 내린 금지인 '금주'는, 사회적 법이 금기의 영역으로 지정한 대표격인 '살인'과 맞대어진다.


그러나 영화는 관객이 만수의 '어쩔수가 없음'을 이해하고 납득하길 바라지 않는다. 사실 그는 모든 인물들이 '어쩔 수가 없'는 가운데, 유일하게 '어쩔 수가 있던' 인물이다.


그는 커다란 저택에서 차 두대를 끌고 대형견 두 마리를 키우며, 막내딸은 비싼 바이올린 교습을 시키고 직접 세운 온실에서 식물 키우는 것을 취미로 하고 있다. 어쩔 수 있는 것으로 개들을 조부모에게 맡기고 차를 다 팔아 작은 세단 한 대만 남겼다. 여전히 포기하지 못 하는 것들 투성이이다. 그의 가정은 상류층까진 되지 못한 중산층이지만, 우리 눈엔 충분히 사치스럽다. 그가 진정 간절하다면 집을 팔고 작은 아파트에서 가족들과 미래를 도모하며 제지회사가 아닌 다른 일을 구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쩔수가 없다'는 주문은 어찌보면, 충분히 '어쩔 수가 있'는 전의 생활을 '어쩔수가 없'는 것으로 보존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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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실에서 그는 식물들을 키우지만, 있는 그대로 자라게 두지 않는다. 그가 철사를 감아 분재를 만드는 장면, 억세게 쥐다가 그만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장면이 있다. 식물 분재는 성장을 억제해 기형을 만드는 것이다. 그의 취미는 그가 벌이는 일들이, 식물에게 가하는 분재 만들기가 어쩔 수가 없는 일이 아닌 것 처럼 충분히 어쩔 수 있는 일들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실제로 식물 분재에 사용하는 철사는 고시조의 시체를 은폐하는 것에 그대로 사용되며, 그 작업에 몰두하는 모습은 분재를 만드는 것을 연상시킨다.


만수의 아내 '이미리'는 결말부에 가 강력한 '어쩔수가 없음'을 구가하는 인물이 된다. 그는 아들의 목격담을 듣고 만수가 심은 사과나무 밑을 파보고, 무언가 물컹한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것을 꺼내지 않고 만수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이 나쁜 짓을 한다면 함께한 것이 된다고 말한다. 이는 '설마 가족까지 죄악에 물들게 할 것이냐'는 추궁으로도, 혹은 '공범이 되어주겠다'는 공모로도 들린다. 직후 자세한 상황을 확인하지 않았음에도 나무 밑에 묻힌 것이 비료 삼은 돼지고기라고 아들에게 설명하는 것 등을 보면 확실히 후자에 가깝지만, 처음부터 지금 생활을 포기해야 함을 결심하고 집까지 팔 것을 제안한 것은 아내였으며 함께 이겨내야한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았을 땐 전자로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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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이든 그녀는 끝내 공범이 되지만, 나에겐 자포자기식의 태도가 보였다. 마지막 살인을 마친 만수가 귀가하고 미리와 길게 포옹한다. 영화는 가족들이 장어를 바베큐해 먹고 만수의 '다 이루었다'는 말과 함께 정원에서 서로 끌어안으며 시작했다. 그 포옹에는 조건도 정해진 끝도 없었고, 심지어 가족의 쇄락을 예견하듯 해가 저물 때까지 유지된다. 그러나 만수가 모든 일을 마치고, 이제 그동안 심은 과일나무의 과실을 취하듯 '문 제지'에 취직하는 것만 남기고, 무엇보다도 인간성을 모두 버린 채로 포옹을 하려하자, 아내는 조건을 요구한다. 만수는 1분을 제안하고, 미리는 그 1분을 60에서부터 세어 내려간다. 만수는 반대로 올라가주면 안되냐고 말한다. 초를 세는 시작이 60이고 끝이 0이라는 것은 곧 그것이 끝나는 순간에 의미를 부과하는 것, 1분이 전부 지나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가 바라서 지속되던 부부 관계는 이제 '어쩔수가 없는' 것으로, 미리로서는 숫자를 세며 포옹을 견디듯 견뎌내야만 하는 것이 된 것이다.

영화는 잔인하게, 미리가 만수와 만수의 죄악을 견뎌야 하는 이유를 곧바로 제시한다. 개가 돌아오고 아이들이 한껏 기뻐한다. 자폐증을 가진 딸, 바이올린 천재라는 딸은 무의미한 음의 도막만을 뱉어낼 뿐 가족들에게 절대 곡을 들려주지 않았다. 개가 없는 동안 딸은 종이에 점을 찍어 나무를 그렸다. 개가 돌아오고 드러나기를, 그것은 악보였다. 개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작곡을 하고 돌아온 개들을 자기 방으로 데려가 기쁘게 연주를 해준다. 이것이 표현하는 것은 그 아이에게는 연주야말로 말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가 들은 말을 녹음기처럼 반사할 뿐, 자기 말을 하지 않았다. 만수가 재취업하고 개가 돌아오자 아이가 마침내 말을 한다. 미리는 문 바깥에서 그녀의 연주를 듣는다. 이 기쁨을 유지하고 싶다면, 그녀로서는, 어쩔수가 없다.


아들의 스마트폰 절도를 마무리하고(아들 친구의 아버지는 매장에서 불륜을 저질러왔고 그것을 아는 만수가 cctv를 증거로 사용할 수 없음을 짚었다), 그것들을 묻은 뒤 그 위에 나무를 심으며, 이래도 나무가 자라냐는 아들의 물음에 '원래 더러운 것 위에 잘 자란다'고 말했다. 암매장 된 시조의 시신 위에는 사과나무가 심어졌다.


자폐증이 있어 거울처럼 말을 반사할 뿐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딸에게는, 그렇기에 오히려 순수성이 깃들어 있다. 개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나무를 그리고 그것을 악보로 개들에게 연주를 한다. 그러나 그 나무 밑에는 더러운 것이 있다. 아이의 순수성은 부모의 죄악을 뿌리로 두게 되었다. 그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은 범죄를 과거에 박제해두고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과나무에 관심을 갖고 그 밑을 파내려는 개들을 미지가 제지해야 하는 것처럼, 언제나 현재형이며 '어쩔수가 없는' 더럽고 추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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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계속해서 뱀과 과일나무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사과나무에 대해 알게 되며 미리는 그들 가정에 뿌리내린 죄를 알게 되었다. 선악과를 취하고 선과 악을 알게 되어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쫓겨나듯, 사과나무의 비밀을 알게되어 미리에게 저택은 만수가 재취업을 해내더라도 더는 낙원일 수 없게 되었다. 넓은 마당과 딸의 바이올린 소리 들리는 그 저택이 지금도 낙원이라면, 이브가 아담이 따온 사과를 베어물지 않은 척 지하에 묻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난해함에 대한 평가들은 아마도, 특히나 영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장면들 때문일 것이다. 집에서 딸의 바이올린 연주가 울려퍼지다, 만수가 재취업한 공장의 모습으로 화면이 전환된다. 만수가 귀마개를 끼자 공장의 소음이 연주를 덮는다. 인간 없이 기계들만 움직이는 공장에서 위태롭게 기계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일한다. 영화가 끝나고는 벌목이 이루어지는 장면들이 지나가다가 크레딧이 시작된다(맞나? 순서는 틀릴 수 있다). 종이에 타자기로 감독과 제작진, 배우들의 이름이 적히다가 영화의 제목이 쓰여진다. '어쩔수가 없다' 마지막에 '다'는 다소 느린 속도로 찍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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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취업은 자기 자신은 물론 가족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마침내 악기라는 자신의 표현도구로 연주를 시작한 딸의 음악소리는 듣지 못한다. 그가 귀마개를 끼자 바이올린 켜는 소리는 사라지고 시끄러운 기계음만 들린다. 차단하려는 소리가 바이올린인 것처럼. 인간을 셋이나 죽이고 무엇을 이루고자 했던 것인가, 그 합리화와 정당화의 키워드는 '가족'이 아니었는가.


면접에서 만수에게는 AI 도입으로 공장에 인부가 없는데 받아들일 수 있냐는 질문이 들어왔고, 그는 관리자 하나는 필요하지 않느냐며 인원 감축이 된 자리에 들어가는 것으로 자기 자리를 보전했다. 자기가 해고되는 지도 모르고 부당 해고에 맞서려 하며, 한국에선 해고를 '모가지'로 미국에선 '도끼질'로 표현한다는 연설을 준비하던 영화 극초반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그의 '어쩔수가 없는' 취업이 이루어진 공장의 모습은 삭막하고 황량하다. 우리는 만수 한 명의 '어쩔수 없음'을 보았다. 지금 만수가 도달한 자리, 한 명의 관리자만 남은 무인공장의 자리는 수백 수천이 해고되어 '어쩔수 없음'을 생산해낸 끝에 있다. 이렇게 이야기가 끝나도 되는 것일까? 혹은, 끝날 수 있는가? 공장에서 만수는 불필요하게 버튼을 조작해보고, 기계들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이제는 할 필요 없는 검수작업(종이를 방망이 같은 것으로 치는)을 괜히 해본다. 관리자가 언제까지 필요할 지 알 수 없으나, 낙관할 수 없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은 만수의 경우는 상당히 극적이고 과장된 경우라는 점이다. 실제로 살인을 불사하더라도, 자리는 나지 않거나 난 자리에 내가 취직될 지는 모른다. 저 극악무도한 범죄까지 불사해도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 속에서 인간 개인이 싸우는 대상은 그런 것이다. 우리는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도 모른다. 살인도 불사할 대상마저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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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제지공장이고 하필 종이라는 점은 훌륭한 메타포이다. 종이는 경우에 따라, 중요한 말씀을 기록하거나 가르침을 전하는 등 신성하게도 쓰인다. 그러나 지폐가 되어 교환가치를 생산해 사회의 부조리에 한몫을 하고 손때가 끼거나, 담배 마는 용지가 되는 등 정 반대로 활용될 수도 있다. 만수의 딸은 종이에 그림(악보)을 그린다. 만수는 종이 만드는 일을 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 어쩌면 종이는 인간 종의 발전사를 함축하는 동시에, 인간이라는 존재를 상징하는 물질이다.


종이의 생산은 나무를 베는 것으로 이루어 진다. 영화는 그렇게 숲이 잘려나가는 광경을, 인간이 사라진 공장 다음에 보여준다. 인력 감축의 어쩔수 없음과 벌목의 어쩔수 없음. 종이는 인간의 생활과 너무나도 깊게 밀접해 있으며, 종이를 소모하지 않고는 하루도 살아갈 수가 없다. 나무를 베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지만, 어쩔수가 없다. 인간이 빈 자리에 기계가 들어서고, 기계가 들어온 숲에 나무들이 사라진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타자기가 영화의 제목을 적는다. 어쩔수가 없...나? 만수는 정말 어쩔수 없었는가? 우리는 정말 어쩔수가 없는가? 어쩔수가 없다면, 어쩔수 없는 일을 어쩔수 없게 두는 것은 타당한 것일까. 일단 이 영화는 만수라는 인물의 이야기였고, 그는 '어쩔수가 없다'고 믿으므로, '다'라는 글자는 쓰여야 한다. 그럼에도 고뇌 끝에, '어쩔수가 없' 다음에 '다'가 오는 것이 과연 괜찮은지 의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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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례적일 만큼 주변에서 영화에 대해 묻는 말을 많이 들었다. 아직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선 여러 평가가 공존하는데 너는 어땠느냐는 질문이, 보았다는 사람들 중 일부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냐는 의문이 들려왔다.


여태까지 내가 느낀 점들에 대해 설명해 보았는데... 나는 영화가 좋았다. 특히 범모의 살해가 시도되고 세 인물이 마주친 채로, 크게 틀어진 음악 탓에 악을 써가며 대화하는데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와중에 범모와 아라 부부 사이에 마침내 진심이 오가는 장면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또 만수와 미리 부부가 댄스 파티에 참가하는 장면에 대해, 미국적인 파티를 공감 안 되게 굳이 왜 넣었냐는 혹평이 있었는데, 나는 공감하지 못하겠다. 주인공 가족 자체가 중산층보다는 반 칸에서 한 칸 정도 높은 생활수준으로 보이며, 무엇보다도, 영화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일종의 극처럼 느껴지는 면이 있었다. 각 인물들이 자기 위치와 입장을 가지고 분투하며, 희극과 비극을 오가는 와중에 유명한 경구처럼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 보면 비극'이라는 이중성을 보여주는 장면이 꽤 있었다. 영화 자체가 '인생 중반에 완전함을 맛 본 중년이 해고당한다'는 비극에, '경쟁자들이야 제거하면 그만'이라는 농담이 첨가된 이야기이지 않은가. 갈등이 한참인 와중에 자주 섞여 들어가는 유머는 그런 코드처럼 보인다. 캐릭터에 따라 복장을 갖춰입고 춤을 추는 파티 역시 영화의 그런 면을 간증한다고 느꼈다.


시조의 살해가 달성되고, 이제 결말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 영화가 도대체 어떻게 끝나려 하는지 불안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전부 달성한 듯 보이지만 얇게 묻힌 죄를 안고 간다는 결말은, 전형적이지만 그만큼 탁월하며 영화가 말하는 '어쩔수가 없음'이 우리의 일상에서도 공유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합리적이었다. '어쩔수가 없음'을 안고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쩔수가 없'기에 살아지는 것이 일상이다. 공장의 모습과 벌목 장면은, 영화에 대한 의구심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한 주제를 더욱 강화했다는 감상이다.


박찬욱의 박찬욱스러운 영화였다. 그래서 좋았고, 하지만 그래서 대단한 흥행이 기대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한국을 대표하는 또 다른 거장 중 하나인 봉준호와 비교해보자면, 내러티브 자체를 상당히 매력적으로 꾸리고 보편성을 챙기는 와중에 주제까지 녹여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박찬욱은 소재 자체가 파격적이고 대중적이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인데다,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이 비교적 친절하지 않다.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좋아할 것이고, 불호인 사람들은 그래서 불호할 것이다. 나는 박찬욱에 대해 호와 불호를 오가는 편이었는데, 일단 이번 영화는 호 쪽이고 높은 평가를 주고 싶다. 어쩔수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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