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영화를 사랑한다. 그동안 대체 몇 번 본 건지도 모르겠고 내용을 달달 외우고 있다. 하지만 99년생인 내가 97년에 개봉한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는 없었고... 재개봉이라는 기회가 드디어 왔기에, 안 갈 수가 없었다. 후기부터 일찍 남기자면 너무너무 만족했다. 4K 리마스터링을 했는데 그보다도 극장의 사운드가... 웅장하게 흘러나오는 '아시타카 전기' OST를 듣는 것은 아주 가슴 벅찬 경험이었다. 내려가기 전에 몇 번 더 관람을 할 예정이다.
이미 오래된 영화니 내가 내용 분석을 할 이유는 없겠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던 것들이나 이번에 새롭게 느낀 것들 위주로 언급할 예정이다. 물론 스포일러가 있겠으나, 이제와서 스포당했다는 당신은 의도가 나쁜인간!
아시타카는 숲속에서 500년째 은둔 중인 부족의 왕자였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마을을 덮치려 하는 재앙신을 죽였고, 그 탓에 저주를 받았다. 저주가 또다른 해를 불러올 수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추방이 명해지고, 아시타카는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는 동쪽 끝 에미시 마을에서부터 재앙신의 발자국을 쫓아 점점 서쪽으로 향한다. 발자국이 인간들의 마을에서 내려오는 것을 본 그는 처음으로 속세에 발을 들인다. 그리고 '속세는 이런 곳이다', 혹은 '인간이란 이런 동물이다'를 운명적으로 보여주듯, 바로 약탈자들이 벌인 소동에 휘말린다. (자기 육체와 내면의 강함은 있어도 세상 물정은 모르는 아시타카는 무사들이 벌이는 민간인 약탈을 보고 '전쟁인가?' 착각한다.) 제 몸을 지키느라 뜻하지 않게 살생을 저지르고, 소동이 벌어지려는 것을 지코 스님이 도와 위기를 모면한다.
세상에도 밝고 원령들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있는 지코에게 아시타카는 재앙신을 쫓고 있었음을 말한다. 발자국을 따라왔는데, 마을로 내려오니 사라졌다고. 지코는 그야 그렇다면서 그들이 몸을 피하고 있는 폐허를 보여준다. 원래 작은 마을이었으나, 홍수인지 산사태인지 재앙이 닥쳐 많은 이들이 죽었다. 전쟁과 사고, 질병. 인간들의 세계는 재앙 그 자체다.
그렇다. 재앙신이 된 멧돼지 나고에게는 알 수 없는 쇠붙이가 몸을 꿰뚫어 뼈를 부수고 장을 헤집은 것이 재앙이었다. 인간에게 재앙은 더 복합적이다. 재앙은 자연이 예기치 못하게 내리는 것이기도 하면서, 인간이 저들끼리 벌이는 소동과 싸움 속에서도 있다. 재앙과 재앙을 견주는 싸움이라면, 동물들은 인간에게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재앙신의 발자국, 동물의 짙은 원한은 인간들이 살고 죽는 속세에서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숲의 신령이던 나고에게 총알을 박아 재앙신으로 만든 것은 타타라 마을의 지도자 에보시였다. 타타라 마을 인간들이 사철을 캐겠다고 산에 구멍을 내고 나무를 베었고, 나고는 이를 막기 위해 인간들을 공격한 것이다.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 이성이란 물론 사리분별하는 능력이고, 이때 사리의 분별은 물론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인간은 똑똑하기에 자기중심적이다. 아시타카의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에보시는 '멍청한 멧돼지 놈, 날 저주할 것이지.'라 말한다. 철저하게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발언이다. 감성과 비이성이, 인간의 이성과 대립한다.
에보시는 유능하고 덕 있는 지도자다. 그녀는 팔려나온 여자들을 사 마을의 일원으로 살게 했고, 여자가 근처에 오면 부정 탄다는 미신 따위 무시하고 제철일을 맡겼다. 나병 환자들은 에보시 밑에서 사람 대접을 받으며, 여성들도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총기 개발을 하고 있다.
그때 원령공주 산과 들개 신 모로의 자식들이 에보시의 목을 노리고 마을을 쳐들어온다. 에보시는 총으로 무장한 마을 여성 둘을 데리고 원령공주와 정면으로 맞선다. 원령공주가 죽은 들개 일족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것이라면, 마을 사람들에게도 들개에게 남편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녀는 총을 개량하고 개발하는 것에 대해 '무사도 괴물도 박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에보시와 타타라 마을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삶을 위협하기로는 무사든 괴물이든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 싸움에서 어느 한 쪽이 절대로 무고하지 않다. 그들은 서로가 철저하게 피해자이면서 또 가해자이다.
물론 인간에게는 정당화할 수 없는 면이 있다. 인간이 행한 최고의 발명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자기 인식일 것이다. 지배자이자 창조자, 파괴자로서의 인간. 그 시선은 자신을 낳은 자연을 내려다보며 아무런 힘도 행위성도 없는 도구로 격하시킨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그런 문명의 이기들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사회 하층민들은 만물의 영장은 커녕 더 상위 존재가 자유와 풍요를 누리기 위한 조건이자 도구에 불과하다. 몸종이나 노리개로 팔려 나왔던 여성들과 멸시 받는 나병환자들이 타타라 마을에서 나무를 베어 철을 만들고 총기를 제작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만물의 영장 인간이 스스로 반성적 제스처를 행해야 함은 분명하지만, 같은 잣대를 정복자 고위계급과 주변화된 타자들에게 세울 수는 없겠다.
물론 에보시라는 인물을 범인으로 볼 수는 없다. 지도자라는 지위보다는 그녀의 초월적인 의지 때문이다. 짐승을 죽이고 나무를 베고 철을 캐는 것은 물론 인간의 자기 안위 때문이고, 그걸 지시한 것은 에보시다. 그녀는 그것을 어쩔 수 없던 것으로, 등 떠밀린 것으로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녀의 판단이고 선택이었으며, 그것이 대단히 적중해 마을 사람들이 밥을 먹고 외세에 대응할 수 있었다. 마을의 발전과 안위를 위해 산을 파괴하고 나무를 다시 심으려는 성성이들을 쫓아낸다. 나고를 죽인 것은 좋은 판단이었고 대단한 성과였다. 그러니 책임을 회피하지도 않는다. '나를 원망했어야지'라는 말은 진심이지만, 지금 저주를 받은 것은 아시타카이고 그것에 대해 불필요한 죄책감을 가지지도 않는다. 철저하게 인간을 위하며 이지적이고 능동적인 그녀가 보기에, 원령공주 산 역시 인간일 뿐이다. 불쌍하게도 자연의 품으로 떨어져 들개로 자랐으나 육체와 본성은 인간임을 그녀는 꿰뚫고 있고, 따라서 신령스럽거나 두렵고 이질적인 존재로 보지도 않는다. 숲의 힘이 약해지고 오래된 신들이 사라지면 산 역시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에보시는 그것이 그녀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또 그녀는 철저한 무신론자이다. 인간에게 신이 필요 없다는 믿음은 인간 자체에 대한 긍정이기도 하다. 사슴신을 쏘겠다고 나선 것에는 미신 따위 없음을 손수 보이겠다는 포부도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선택과 판단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고있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절대로 보편적인 인간을 대표할 수 없다. 그녀는 철저히 초인이다.
반대로 그녀의 호위무사인 곤자는 뛰어난 존재를 자처하는 인간의 한없이 무능한 면을 보여준다. 신묘하게 나타난 아시타카를 여러차례 위협하고 호승심을 태우기도 했으나 싸우긴 커녕 아시타카의 맨손에 검신이 구부러지는 치욕을 당한다. 항상 큰소리 치지만 산에게는 얼굴이 짓밟히며, 산을 업고 빠져나가는 아시타카를 제압하기 위해 총(불을 붙여 점화시키는 화승총)을 들고 오지만 불을 건네주는 이가 없어 발포하지도 못한다. 그의 과시적인 태도에 마을 여성들은 콧방귀 끼며 그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웃음거리 삼는다. 마지막에 시시가미가 뿌린 액체를 피하기 위해 물로 들어오라는 아시타카의 말에 자신은 수영 못한다며 난처해하기도 한다. (물론 캐릭터 자체가 진지한 것은 아니니 비판으로 볼 것까진 없다. 그는 마지막에 부상당한 에보시를 업고 호위역을 톡톡히 하기도 한다.)
아시타카는 저주를 풀고자 지코 스님의 말을 듣고 시시가미를 찾아왔다. 그는 에보시와 산을 제압하고는 산을 데리고 타타라 마을을 나가려 한다. 들개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들도 많지만, 에보시와 산의 증오와 분노로 얼룩진 난투, 그것을 부추기고 흥겨워한 마을 사람들의 광기에 난입해 중재한 아시타카 앞에 어떤 초월성이나 숭고함을 느끼고 길을 튼다. 그러나 들개에게 죽은 남편의 원한을 가진 마을 여자가 겨눈 총이 오발되며 치명상을 입는다.
이때 재앙신의 저주, 나고의 원혼이 아시타카를 돕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왜일까? 그 분노는 아시타카나 에보시를 넘어 인간 종 전체를 향한다. 폭력이란 당연히 자연 안에서도 행해지지만, 그것을 즐기는 것은 분명 인간의 성질이며, 한과 복수의 정념이 생기는 것은 인간이 개입한 이후부터다. 산의 에보시를 향한 복수심은 인간들이 둘러싸 만든 무대 안에서 조롱을 당하고 유희로 전락했다. 가장 인간다운, 인간들이 만든 판이다. 나고는 물론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둘을 중재하려는 아시타카에게 힘을 보탠다.
산은 자신을 구한 아시타카를 죽이려든다. 그러나 인간만 몰아내면 죽어도 좋다는 산에게 아시타카가 '살아라, 너는 아름다워'라 말하자 놀라더니 차마 죽이지 못하고 시시가미의 영역으로 그를 데려간다. 시시가미는 아시타카의 부상을 치유하지만, 저주를 거둬가지는 않는다.
눈을 뜬 아시타카는 저주부터 확인하지만, 그것은 그대로 팔을 뒤덮고 있다. 팔뚝에서 시작된 그것은 이제 손까지 번져있다. 활 시위를 당기고 걸던 손과 손가락. 시시가미는 아시타카의 숨은 붙들어 놓았지만, 살려는 주지 않는다. 아시타카는 실의에 빠져 눈물을 흘린다.
아시타카에게 이는, 시시가미가 저주가 아시타카의 생명을 앗아가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는 죽을 것이지만, 총알에 의해, 인간의 손으로 그 일이 벗어나서는 안된다. 자연의 노여움으로 자신을 고통스러운 죽음으로 몰고 간 인간을 향한 나고의 분노로 인해 죽어야 한다.
물론 아시타카는 인간과 숲의 중개자이자 중재자이다. 유일하게 짐승신들과 소통하고 무분별한 파괴에 분노하지만, 분명 그는 인간이며 타타라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기도 한다. 중재자로서 아시타카는 상처 투성이가 된다. 오른팔에는 인간을 향한 자연의 원한을, 저주의 흉터를 가지고 있다. 뺨에는 인간을 향한 복수심과 호승심을 불태우는 산이 낸 흉터가 있다. 가슴에는 들개에게 남편을 입은 과부가 입힌 치명적인 총상이 있었다. 다투는 입장을 모두 이해하고 헤아리려는 인간은 갖은 고초와 고뇌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놀라운 무력을 지니고도 흉터와 부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아시타카의 몸이 말하듯 말이다.
모로는 산을 '인간도 들개도 될 수 없는 불쌍하고 추하지만 사랑스러운 내 딸'이라고 언급한다. 그녀를 네가 어떻게 구하겠느냐는 모로의 질문에 아시타카는 '그건 모르지만 함께 살아갈 순 있'다고 대답하고, 모로는 폭소한다. 네가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다고 다그친다.
산이 인간과 공존할 수 없는 것은 그녀 자신이 인간의 추악한 일면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느 인간이 살겠다고 자기 갓난아이를 던진 것을 모로가 거둬 키운 것이다. 인간의 놀라울 정도로 더러운 이기심에서 비롯된 그녀의 출생은, 인간의 추함을 상징하고 있다. 그것을 거둬 들개가 길러냈다는 사실은 그런 수치를 더욱 가중한다. 그런 그녀가 인간들 틈에 섞여 살아갈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인간의 사악하고 추한 면은 인간들 내부에서도 터부시되고, 곧잘 자신들과 분리시킨다. 특정 계층이나 약자, 타자들이 사회의 추하고 더러운 면을 떠맡곤 한다. 그러므로 더더욱, 모로가 보기에 같은 인간인 아시타카가 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함께 살아갈 수도 없는 것이다.
아시타카가 보기에 산은 아시타카 내면의 일부를 비추는 거울이다. 자연을 벗 삼아 평화롭게 살던 에미시 부족의 일원으로서, 산이 보이는 인간과 문명에 대한 적개심을 아시타카 역시 일부 가지고 있다. 단지 그는 성숙하고 완성된 정신으로 분노와 슬픔을 다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가 산을 구해내야 함은 당연하고, 모로에게 말하듯 '함께 살아가'려 한다. 인간의 증오와 욕심으로 얼룩진 세계에서, 일단은 살아가야 한다. 이때 사는 것은 복수심과 원한에 빠져 목숨을 버리고 달려들지 않는 것이다.
산은 자연과 인간의 중간자가 아니며, 들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인간의 추함을 출생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짐승의 입장에서 인간의 횡포를 보며 증오심을 길러왔다. 그러니 타고나길 인간인 그녀는 아름다울 수 없고, 인간의 몸과 짐승의 마음을 가지고서는 평온히 살아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숲을 파괴하고 들개를 죽인 인간의 수장을 죽여 복수하고 추함을 씻어내야 한다. 목숨을 잃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살아라, 너는 아름다워'라는 말은 평생 들어본 적도, 상상 해본적도 없던 말이다.
멧돼지 일족과 인간의 전쟁이 벌어지고, 산은 눈이 먼 멧돼지 신 옷코토누시의 눈이 되기 위해 간다. 아시타카는 흑요석 펜던트를 들개를 통해 그녀에게 전달한다. 그가 에미시 마을로부터 영원한 추방을 당해 나올 때 약혼자에게 받은 그것이다. 펜던트는 약혼자와의 영원한 사랑을 보증한다기보다는(이미 불가능해졌으니), 영영 이별해야 하는 소중한 사람이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부적이다. 그 덕인지, 아시타카는 총알에 관통상을 입고도 살아남았다. 그에게 펜던트는 이미 역할을 다 했다. 다시 기적을 행하기 위해선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에게 선물되어야 한다. 산은 생사를 건 전장으로 향한다. 이번엔 아시타카가, 사지로 뛰어드는 이가 무사하길 바라며 펜던트를 건넨다.
시시가미/데이다라봇치는 숲의 정령이나 자연의 수호신 따위가 아니라, 변화무쌍하며 자애로운 동시에 난폭한 자연 그 자체를 표상한다. 그것은 생을 불어넣기도 하며, 생을 거두기도 한다.
그러므로 옷코토누시의 바람처럼, 인간에게 당한 짐승들을 되살리고 인간을 멸하는 것은 시시가미가 하는 일이 아니다. 시시가미의 자연에는 시시가미가 인간의 얼굴을 한 것처럼, 인간 역시 포함되어 있다. 흔히 생명의 시시가미와 죽음의 데이다라봇치라고 생각하지만, 시시가미/데이다라봇치는 삶과 죽음을 언제나 동시에 가지고 있다. 가령 데이다라봇치는 일본을 창조했다는 상상 속의 거인 '다이다라봇치'를 모티프 중 하나로 두고 있다.
시시가미 자신에게도 타고난 순리이자 법칙이 있다면, 순환이다. 자연의 순리가 순환인 이상 당연한 일이다. 그것의 모습 중 하나인 시시가미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슴의 모습인데, 예부터 주기적으로 떨어지고 자라는 것이 자연의 순환을 연상시키던 숫사슴의 뿔이 무수히 돋아난 모습이다. 또 그것은 낮에는 시시가미, 밤에는 데이다라봇치로 모습을 바꾸어야만 하며 순환이라는 섭리를 몸소 따르고 있다. 아시타카를 살릴 때 그 대가로 산이 꽂아놓은 식물을 시들게 했다. 후반에 목이 잘리고 머리를 찾아 폭주하며 사방에 즉사하는 저주를 뿌릴 때, 생을 거둔 만큼 다시 퍼뜨리지 못해 몸이 마구 부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순환을 지키지 못하면 자신이 죽는다. 머리를 되찾느라 소동이 벌어지고 해가 뜰 때까지 원래 시시가미 형태로 돌아가지 못한 데이다라봇치는 뒤로 넘어지고 소멸한다. 그러나 자연과 그것의 순환 자체는 죽을 수가 없다. 시시가미라는 물리적 형태만 잃어버릴 뿐이고, 그것이 기거하던 시시가미의 숲이 주인을 잃을 뿐이다. 강풍이 닥친후, 시시가미는 그 안에 머금고 있던 생명을 사방에 뿌려 황폐해진 땅이 녹음을 되찾게 한다.
시시가미의 숲 어딘가에는 시시가미의 성역이 있다. 얕은 호수 가운데에는 작은 섬이 있고, 거기에 하늘을 가리키며 서 있는 나무가 있다. 중상을 입은 아시타카를 시시가미의 뜻에 맡기기 위해 그리로 데려갈 때, 산은 섬으로 올라오지 않는 아시타카의 사슴 야쿠르에게 거기 그대로 있는 편이 좋다고 말한다.
데이다라봇치가 시시가미로 모습을 바꿀 때, 그 섬의 나무에서부터 바람이 불어나간다. 아마도 그곳은 시시가미가 순환을 행하는 중심지일 것이다. 삶과 죽음이 가장 활발히 교환되는 곳.
끝내 시시가미의 목을 자른 인간들에게는 재앙이 닥친다. 닿는 모든 것을 죽이는 액체로 인해 산이 민둥산으로 변하고, 제철소를 타고 올라 타타라 마을의 용광로를 망가뜨린다. 교훈이 주어지는 것은 그 이후이다. 나는 모든 재생과 반성과 교훈이 시시가미의 소멸 이후임에 집중해보고자 한다.
이 위대한 영화를 처음 봤던 어린 시절부터 이번에 재관람하기 전까지, 내가 언제나 의문을 가졌던 것은 밉살스러운 지코 스님이 왜 끝까지 부상 하나 없이 살아남았어야 했느냐는 점이다.
에보시가 철인, 초인이라면, 지코야말로 범인을 대표한다는 생각이다. 처음부터 그는 아시타카에 의해 도움을 받고 그에게 도움을 주며 등장했다. 이후 타타라 마을의 에보시를 만나러 갔을 때는 신기한 젊은이가 지나가지 않았냐며 그의 근황과 안위를 묻기도 한다. 그러나 조정의 명을 받아 시시가미의 머리를 자르는 짓을 하려 한다는 것이 밝혀진다. 시시가미와 관련된 미신을 믿느냐는 에보시의 말에 '그저 명령을 들을 뿐'이라고 답하기도 한다. 목적 달성을 위해 대단히 교활한 모습을 보이고 또 해내지만, 궁지에 몰리고 재회한 아시타카가(그 와중에도 무사했냐며 다행이라 말한다) 인간의 손으로 머리를 돌려줘야 한다고 만류하자 목적 달성을 포기하고 그 말을 따른다.
지코 자신이 어떤 목적과 욕망에 의해 행동하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세상 모든 것을 갖고 싶은게 인간의 본성'이라며 인간의 욕망을 긍정한다. 그는 유능하고 정이 많지만, 동시에 교활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연을 파괴하고 도구 삼는 것을 괘념치 않는다. 그러나 결국에는 옳은 일에 동참하기도 한다.
아시타카가 신화 속의 주인공이고 산은 인간의 추한 면이자 자연과의 뒤섞임이며 에보시는 인간의 유약함을 뛰어넘은 초인이라면, 일반적인 관객이 투영되어 있는 대상은 상당한 입체성을 보이며 선하기도 악하기도 한 지코라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메시지까지 고려하였을 때 더더욱 그는 징벌을 받을 대상이 아닌 것이다.
이번 관람을 하며 나는, 이 영화야말로 포스트휴머니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포스트휴머니즘'이라는 사조에 대해, 인간이 동물이나 사물, 기계들에게도 주체성을 부여하고 기존의 인간성에 대해 반성하고자 하는 사유를 한다고들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상당히 전도되어 있으며 일부 포스트휴머니즘 학자나 메신저들이 이런 의견을 피력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사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결국 인간이 먼저 선점한 어떤 우월한 위치에서 동물, 사물, 기계 등 비인간들에게 행위성이나 주체성을 '하사하는' 꼴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과 작업은 오히려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강화하지는 않는가. 또, 인간 입장에서 인간 아닌 것들의 입장을 헤아린다는 것은 얼마나 거만하고 모순되며, 휴먼이 논하는 포스트-휴먼은 얼마나 참되고 진지할 수 있는가.
참된 포스트휴머니즘이란 '인간'이라는 어떤 경계를 인식하고 사유하며 반성하고자 한다. 그래서 포스트휴머니즘은 결코 '인간 이후'로 해석되거나 번역될 수 없으며, 인간과 인간의 행위성 자체에 대해 반성하는 움직임이 되어야 한다.
시시가미가 인간들에게 순수한 재앙 그 자체로 활동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반동이었다. 나고를 죽이고 산에서 철을 캐던 것까지가 그저 실랑이었다면, 조정의 명에 따라 조직이 파견되고 멧돼지 무리와 전쟁을 벌이며 결국 시시가미의 목을 자르자, 시시가미는 원초적인 재앙을 내린다. 자연과 함께 인간이 일군 모든 것이 파괴된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반성하고 머리를 돌려주자, 자연은 강대한 재앙에서 다시 모습을 바꿔 풀과 나무를 자라게 하고 나병 환자들을 치유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들이 무언가 겪고 지켜봤음에 주목해볼 수 있다. 짐승신들과의 싸움과 시시가미/데이다라봇치 역시 생경했지만, 그들은 전에 없던 조화를 목격하고 경험하고 일궈냈다. 짐승신의 원한을 사 끝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갈 흉흉한 힘을 쓰는 청년을 보았고, 사슴(야쿠르)과 들개가 서로 친근한 모습을 보았으며, 그들의 지도자이자 은인인 에보시를 찾고자 평생 원수였던 들개를 힘을 합쳐 구해냈다. 그리고 머리를 돌려받은 시시가미가 초목을 다시 퍼뜨리는 것을 보았다. 코다마를 불길히 여기고 시시가미를 두려워하던, 자연을 자의적으로 악하게 해석하는 미신에 익숙하던 소몰이꾼은 '사슴신은 싹을 틔우는 신이었나 봐' 하며 놀란다. 지코는 다시 풍요가 찾아오는 것을 보며 자신의 목적을 관철하기를 완전히 포기한다. 에보시는 뜻밖에 들개들 덕에 목숨을 건졌다. 그녀는 처음부터 다시 마을을 세우자고 마을 일원들을 독려한다.
그러나 전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러므로 정말로 새로운 마을이 될 것이다. 타타라 마을 사람들은 들개와 협동했고 마지막에는 조정과 맞섰다. 아시타카와 산은 부부의 연을 맺고 아시타카는 마을에서, 산은 숲에서 들개들과 있으며 주기적으로 교류할 것이다. 인간과 자연은 충분히 뒤섞일 수 있음을 그들은 직접 경험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인터뷰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브리가 인간이 나쁘다는 내용을 전달한다고 자주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자연의 이분법이 아니다. 그저 인간이 자연과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생각하고 보여주려 애쓰는 것이다. 지브리는 분명히 인간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펼친다. 그럼에도 인간이라는 틀에 대해, 인간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사고하려고 언제나 애쓰기에 그들이 찬사를 받는 것이다.
운명에 따라 고향을 떠나야만 하는 아시타카에게, 마을의 대무녀는 '서쪽으로 가 그곳에서 벌어지는 혼란을 진실의 눈으로 보라'고 조언했다. 에보시는 자신을 찾아온 운명(저주)을 파고드는 아시타카에게 알아서 어쩔 셈이냐고 묻고, (대무녀의 말을 간직하고 있는) 아시타카는 '두 눈으로 진실을 보고 결정할 것'이라 답한다. 우리는 우리의 인식하는 힘을, 지각을 버릴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우리는 다만 그곳에 진실이 깃들도록 노력해야 하는 동시에, 진실이란 완전히 깃들 수 없음을, 그러므로 그런 노력은 평생에 걸쳐 행해야 함을 자각해야 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이 기울여야 하는 노력 역시 그런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말과 사고가 철저히 인간적임을 인정하면서, 그럼에도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으며, 인간과 자연 사이에 놓인 경계를 감각하고 해체하기 위해 부지런히 애써야 한다.
시시가미의 재앙까지 불러내고서야 그들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게도 인간은 어리석다. 그러나 사유하고 반성하는 한, 스스로의 과거와 작별하는 용기가 있는 한 희망은 있다고 믿는다.
물론 그렇다고 거대한 재앙을 손수 불러낼 수는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아미타브 고시는 "기후의 위기는 상상력의 위기"라고 말했었다. SF 장르는 「프랑켄슈타인」으로부터 시작하며 기술이 야기할 인간성의 문제, 도덕과 윤리의 문제에 대해 사유하고 고민하고 경고했다. 그래서인지 기술의 발전과 사용에 대해서는 나름 건강한 고민들이 행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실제로 생명공학이 어떤 선을 넘지 않으려 한다고 들었다). 아미타브 고시가 그 텍스트를 적던 시기에는 기후에 대해 그런 시도와 노력들이 턱없이 부족했다. 자연과 환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쯤 들어서, 이제 '상상력의 위기'는 넘어온 것 같다. 우리는 자연과 인간에 대해 고찰하는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기후 소설들이 많이 시도되고 있으며 나름의 성과들도 거둔 것으로 안다. 이제 우리는 자연의 위기가 행위의 위기, 사유의 위기가 되지 않도록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대혼란, 일본의 대위기 속에서 개봉한 「모노노케 히메」는 우리더러 "살아라"고 말한다. 아시타카는 결국 자신의 저주를 받아들였고, 필연적인 찾아올 죽음을 직시하며 할 수 있는 행동들을 했다. 생명을 구하고 탐욕스러운 인간의 욕망을 저지해 시시가미에게 머리를 돌려주었다. 시시가미는 폭주하며 취했던 생명들을 돌려주며 아시타카의 저주를 거두어갔다. 피부에 흉터만 남기고. 아시타카가 말한다. '나에게 살라고 했어.'
내가 보고 겪는 것이 나를 만든다. 짐승들이 지혜와 영험함을 갖춘 신령이 되는 것은 그것이 오래 살았기 때문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이 기존 서양 형이상학의 이성 중심주의(이성과 사유를 중시하고 그 중심에 서양 백인 남성을 세우며 경험한 것이 주체의 인식을 형성한다는 경험주의를 배척한)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이 이 영화와 함께 보았을 때 의미심장해진다.
경험하는 것, 세월을 견디는 것, 상처가 생기고 아물어 흉터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재앙과 재생이라는 거대한 순환을 인간은 목격했다. 자연이 그 산증인인 아시타카에게 말한다. 상처투성이가 되어, 흉터를 안고서. 흉터가 말하고 너를 규정하도록 해라. 살아라.
「모노노케 히메」와 같은 시기에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개봉했고, '살아라'는 메시지와 '죽어라'는 메시지가 대비되었다고 전해 들었다. 둘 다 좋은 영화들이지만, 같은 퀄리티의 영화라면(물론 나는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전혀 안 봤고, 안 봤지만 「모노노케 히메」가 더 뛰어나리라고 짐작하지만) '살아라'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가 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죽으라는 말을 그럴 듯하게 던지기는 쉽다. 그러나 예술 작품에서 살아라는 원초적이고 날것의 긍정을, 오글거리거나 촌스럽지 않게 던지기는 정말 어렵다고 생각한다.
범위를 영화 전체로 넓히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애니메이션 영화 중에서는 이 영화를 가장 사랑한다. (후순위는 「업」과 「토이스토리 3」가 될듯) 영화가 갖출 수 있는 모든 부분이 완벽하다. 다시 애니메이션, 혹은 영화가 작품 하나에 이렇게 공을 들이는 때가 올까.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슬프다.
언제 또 재상영 할지 모르니, 많이들 관람하시길 추천한다. 나는 이번 재관람도 너무 만족했다. 그런 의미로... 영화를 재관람하는 것에 대한 나의 산문 하나 권유하면서... 글을 마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