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의 빅팬임을 자처함에도, 영화가 아주 어렵다는 후기들 때문에 쉽사리 마음을 먹지 못했다. 그러다가 2025년 9월 13일부터 넷플릭스에서 내려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제야 다급하게 관람을 했다.
이 영화에 대해, 내가 줄거리를 상세하게 설명하거나 할 수는 없겠다. 무엇보다도 그건 내 능력 밖이다. 나도 영화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찾아보니, 이 영화 플롯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직접 3D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거나 도표를 작성하는 등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관람할 사람들을 위해 애를 써놨다. 꼼꼼하고 자세한 설명은 그들에게 맡기고, 나는 이번에도 그냥 내 감상에 대해 떠들어보려고 한다.
꼭 말하고 싶은 것이 하나. 이 영화는 어려운 것이지 난해한 것이 아니다. 난해하다는 말은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미로 더 국한되어 있다. 예술이 난해하다는 것은 주제나 의도가 꽁꽁 숨겨져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테넷>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굉장히 명확했고, 줄거리를 따라가는 것도 어렵지 않다. 다만 일반적인 시간과 역행하는 시간이 겹쳐지는 플롯 특성상, 세부적인 모든 사항들을 헤아리기가 어려울 뿐이다. 여러차례 관람하거나, 줄거리가 정리되어 있는 텍스트들을 읽으며 순서를 상기해보면 천천히 이해가 된다. 난이도가 높은 것이지 절대 난해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런 어려운 요소들을 관객이 머리 아파가며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을 영화가 권장하지 않고 있다. 영화의 주요 설정을 설명하던 인물이 이런 대사를 한다. "이해하려 하지 말고 느껴요." 큰 줄기를 따라가는 것이 어려운 영화는 절대로 아니다. 영화에 존재하는 어려움들을 당신이 극복하려고 들지는 관객의 의지에 맡겨져 있다. 한번 감상하기고 말기에도 충분히 즐겁다. 물론 곱씹으면 더 재밌다. 당신이 선택하면 된다.
엔트로피(무질서도)는 반드시 증가하는 쪽으로 간다는 것이 우주의 법칙이다. 냅두면 어질러진다는 것이 우주의 진리인 셈이다. 가령, 물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잉크는 물 속으로 퍼져 나간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매 순간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쪽으로 나아간다. 다시 예를 들자면, 잉크가 퍼진 물을 그대로 뒀을 때 잉크가 다시 한 방울로 모일 확률 보다는 섞인 상태가 유지될 확률이 당연히 높을 것이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 수록 잉크는 물에 완전히 녹아든다. 이때, 우리는 시간이 경과함을 엔트로피가 증가함을 통해 알 수 있다. 잉크가 물 속으로 막 떨어져 아직 방울로 모여 있을 때 엔트로피는 최소이면서 지금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시점이다. 잉크가 물에 떨어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엔트로피는 최대로 증가하며 종국에는 완전히 퍼져 스며든다.
<테넷>의 그 악명높은 어려움을 구가하는 것은 '인버전'이라는 현상이다. 인버전은 핵분열의 역복사 현상인데, 쉽게 말하면 인버전된 물건에서는 엔트로피가 반대로 감소한다. 즉, 시간이 역순으로 흐른다. 인버전된 총은 벽에 박힌 총알이 총 속으로 날아들어온다. 사람이 인버전되면 세상만물이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가운데 혼자만 감소하므로, 시간이 자신을 제외하고 거꾸로 흐르는 경험을 한다. 그 상태로 불에 닿으면 열에너지가 역으로 감소함으로 동상에 걸린다. 공기 역시 반대로 움직이므로 인버전용 산소가 든 호흡기를 부착해야 한다. 이 상태로 시간여행은 가능하지만, 예를 들어 10년 전으로 간다면 인버전 상태로 10년을 보내야 하며 10년을 거스른 뒤 다시 회전문을 통과해 인버전 상태를 해제해야 한다. 그리고 미래 인류는 인버전을 인위적으로 일으키는 장치를 가지고 있다. 인버전 회전문을 통과하면 사물이고 사람이고 자동차고 인버전이 된다. 인버전 상태를 되돌리는 회전문('논-인버전 회전문' 이라고 하자)을 통과하면 상태가 해제된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가능하다. 어떤 적과 맞서싸워 원하는 것을 얻어야 하는 상황이고 당신에겐 인버전 회전문이 있다. 미래에서 인버전하여 미래에서 과거로 시간을 역행하는 당신이, 직접 확인한 정보들을 과거의 자신(당신 입장에선 현재의 자신)에게 전달한다. 현재의 당신은 그 정보를 토대로 행동하며 미래에서 준 도움을 기반으로 목표를 완수하고, 인버전 회전문으로 들어가 인버전을 한다. 그러면 당신이 아까 정보를 전달한 '미래에서 인버전하여 미래에서 과거로 시간을 역행하는 당신'이 되는 것이다! 전달받았던 정보를 과거의 자신에게 똑같이 전달하고, 그대로 과거를 향해 도주한다. 이런 작전과 마주하는 상대 입장에서는, 인버전을 활용하는 상대방이 모든 정보들을 쥐고 자기 뜻대로 상황을 쥐락펴락하다가 회전문으로 들아가더니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이것을 '시간 협공'이라고 부른다. (어렵다... 실제로 작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시퀀스들에선 시간협공이 이루어 진다.)
미래 세계는 모든 자원이 고갈되었다. 미래 인류는 과거 인류를 원망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세계를 통째로 인버전하는 알고리즘을 만들었다. 자원이 풍부한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그러나 미래와 과거가 어떻게 변하고 파괴될지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알고리즘 개발자는 알고리즘을 아홉 개로 분해해 과거 속에 숨겼다. 따라서 미래 인류는, 과거와 접촉해 과거의 인물에게 사주를 했다. 알고리즘을 전부 찾아 전달하라고 말이다. 영화의 현재 시점. CIA 요원이었으나 세계 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래와의 전쟁을 알게 된 '주도자'는 미래의 사주를 받은 '사토르'로부터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구해내야 한다.
이것이 영화의 줄거리이다.
영웅이 피곤한 것은 망가뜨리기보다 지키기가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망가진 것을 복구하면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에너지를 쏟아야 하기 때문에 최종적인 엔트로피는 증가하는 것이고 영웅은 그것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왜 방 정리가 하기 싫은가, 다이어트를 관두고 엽기떡볶이를 시켜먹게 되는가, 출근과 공부가 하기 싫은가, 아침 일찍 일어나 책을 읽는 갓생이 실천이 안되는가. 모두 열역학 법칙이 무질서도의 증가만을 긍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무질서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혼돈 카오스가 아니지마는)
심지어 인버전 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미래를 뒤틀기란 어렵다. '주도자'가 인버전된 물건들을 다루는 것을 영 어색해하자, 과학자는 땅에 떨어진 인버전된 물건이 손으로 돌아오게 하도록 하기 위해선 오히려 '물건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해준다. 인버전되어 역순으로 움직이는 것은 오직 물건 뿐이다. 인버전된 총에서 발사된 총알은 이미 벽에 꽂혀있다. 그 총이 거기 꽂힌 것은 발사됐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을 역행시켜 총알을 회수하기 위해선, 총을 쏘는 일이 일어나야 하고 당신이 그럴 마음을 먹어야 한다. 그래서 당신은 총알 구멍에 대고 총을 발사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러면 인버전된 총알이 역순으로 진행되며 총으로 돌아온다.
(즉 정상 시점에서 봤을 때 인버전된 사람이 총을 발사해 사람을 쏘는 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 입장에서 보기에는 이미 총상을 입은 사람의 상처에다 대고 그 사람을 이미 꿰뚫은 총알을 역재생하여 회수하고는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바로 그런 방식으로 사토르의 총알이 몸을 통과해 지나간 캣이 위독해진다. 인버전된 것은 총알 뿐이고 캣의 몸은 아니어서 그것이 돌아가며 내는 관통상은 그대로인데다가, 인버전된 총알이 그 영향을 몸에 남기기 때문이다. 영화 안에서 정확하게 설명되진 않는데, '엔트로피 증가'라는 정상적인 물리법칙과 '엔트로피 감소'라는 비정상적인 상태가 충돌하며 문제가 생기는게 아닐까 한다. 캣은 그 상태에서 3시간만 더 살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래서 인버전 회전문을 한번 통과해 인버전 상태가 되어 시간을 번 다음, 논-인버전 회전문이 있는 곳을 찾아가야 했다.)
시간여행 장르가 흥미로운 것은, 거의 모든 경우에서 결정론과 싸워야 한다는 점이다. 미래의 인류가 과거를 구하기 위해 요원을 파견한다는 이야기는 이제 흔하다. 근데, 미래의 인류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들이 과거를 구해내는 것에 성공하리라는 사실을 이미 보증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요원들은 뭐하러 온몸을 다해 싸울까? 어차피 그들의 미래는 달성될 것인데 말이다. 시간여행을 소재로 활용하는 서사는 그런 무기력과 싸워서 이기고 관객을 설득해야 한다. 이러한 결정론을 비튼 것이 영화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할아버지 역설'이다. 당신이 과거로 돌아가 당신의 할아버지를 죽였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면 당신은 어떻게 되는가? 여러가지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논리적으로 할아버지가 죽는 순간 당신의 존재도 사라질 수도 있고, 그 사건을 기점으로 평행우주가 생길지도 모른다. 행위자인 당신이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면 당신이 어떻게든 존재하는 쪽으로 세계 전체가 움직일지도 모른다('손자가 할아버지를 죽인다'는 행위는 어쨌든 벌어져야 하는가?). 혹은 시간이란 것이 단단하게 짜여져 있다면, 애초에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할아버지를 죽이는 것에 실패할 지도 모른다.
이런 종류의 장르에서 저 할아버지 역설에 대답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저것을 통해 영화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어떻게 고찰하는지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미래가 현재에 개입하는 순간, 운명이란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된다. 미래가 곧 우리가 가게 될 길이 아닌가. 그렇다면 짜여 있는 운명 앞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현재를 바꿀 수 없다면, 인간은 왜 의지를 가지고 행동을 하는가. 반대로 행동 하나하나가 현재를 바꾼다면, 우리는 너무 버거운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벌어지는 모든 일이 행위자의 책임으로 돌아오는데,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것을 감당하기에 충분히 단단한 걸까.
<테넷>에서는 어떠한가?
주도자에게는 동료 '닐'이 있다. 처음에는 보안 장치 따는 것에 능숙한 CIA 요원인줄 알았으나 이야기가 전개되며 영화 속 세계 뒷면에서 벌어지는 일들(미래로부터의 공격, 인버전, 사토르와 알고리즘 등등)에 대해 신참에 불과한 주도자보다 훨씬 빠삭하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는 미래의 조직이자 인버전을 다루고, 미래의 위험한 가능성들로부터 현재를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조직 '테넷'의 일원이다.
그는 인버전에 대해 말할 때 '일어난 일은 일어난 거야.'라는 말을 자주한다. 처음은 중상을 입은 캣을 위해 과거로 가 사건을 바꾸면 안되겠냐고 주도자가 말할 때, 닐은 '일어난 일은 일어난 거야' 라고 말하며 만류한다. 같은 대답이 한 번 더 되풀이된다. 닐과 주도자는 기묘하게 움직이는 복면을 쓴 괴한과 싸운 적이 있었는데, 괴한은 주도자는 뿌리쳤으나 닐에게 붙잡혀 복면을 빼앗겼다. 그때 닐은 놀란 표정을 하며 복면을 돌려주었었다. 주도자는 다른 공간에 있어 그것을 지켜보지 못했다. 이후 이야기가 전개되며, 주도자는 그때 자신과 싸운 것이 인버전된 주도자 본인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닐은 그것을 알았으나 과거의 주도자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왜 말하지 않았냐고 주도자가 묻자, 닐은 어차피 무사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거야."
인버전을 해 돌아가더라도 정해진 일을 바꿀 수는 없다. 사람이 다친 것을 없던 일로 할 수 없고, 반대로 미래의 주도자를 목격하고느는 그 미래가 실제로 도달하기 전까지 주도자가 무사하리라고 안심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역시, 결국 결정론에 빠지고 마는 걸까?
주도자는 두 차례, 금속 장식이 달린 줄을 가방에 달고 있는 의문의 남자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받는다. 한 번은 영화가 시작과 동시에 보여주는, 주도자가 CIA 요원이던 시절 투입된 오페라 하우스에서였다. 하나는 영화의 마지막, 가장 긴박한 순간이다. 사토르의 부하가 전부 회수된 알고리즘을 약속된 위치에 넣으려고 한다. 곧 폭발이 일어나 주위를 날려버릴 것이다. 주도자는 철장 바깥에 있고, 철장 문에는 주도자의 능력으로는 열 수 없는 잠금 장치가 걸려 있어 그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철창 너머 누워있는 시신이 그 가방을 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사토르의 부하가 주도자를 총으로 쏴 사살하려는 순간, 시신이 벌떡 일어나 총을 대신 맞더니 문을 열고 밖으로 사라진다. 부하가 당황하는 사이 주도자는 열린 문으로 들어가 그를 제압하고 알고리즘을 회수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세상을 구했다. 주도자와 닐, 또 다른 테넷 요원이 회수한 알고리즘을 나눠갖고 숨기기 위해 흩어지는 찰나, 닐이 '그 철장 문을 열 수 있는 건 역시 나 밖에 없을 거'라고 하더니 자기 몫의 알고리즘을 주도자에게 넘긴다. 언젠가 그 순간 거기에 가야한다고 말하며 주도자에게 등을 돌리는데, 그의 가방에 그 금속 장식이 달린 것이 보인다. 그동안 주도자를 돕고 마지막엔 인버전된 상태에서 목숨까지 희생한 것이 닐 자신이었던 것이다.
주도자는, 이미 세상을 구했는데 다르게 선택하면 다른 미래(닐이 죽지 않는 미래)가 펼쳐질 수 있지 않냐고 묻지만 닐은 말한다.
닐: '일어난 일은 일어난 거다.' 세상에 대한 믿음을 뜻하는 거지. 방관하려는 핑계가 아냐.
주도자 : 운명이다?
닐: 그렇게 부르든가.
주도자: 넌 뭐라고 부는데?
닐: 현실.
(넷플릭스 자막을 옮겼다.)
그러니까, 일어난 일이 일어난 것은... 누군가 그것이 일어나게끔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그것을 바란다면, 나는 그것이 일어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누군가'가 바로 내가 되어야 한다. 닐은 철장에 달린 문을 열 수 있는 유일한 '누군가'를 자처하고 죽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인버전을 통해 시간선이 겹치면, 어쩌면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점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미래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가 무사함을 뜻한다. 하지만 그것이 인물들에게 당위가 될 수는 없다. 그건 그저 세상에 대한 믿음, 세상이 무사하리라는 믿음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공허하다. 바라는 일이 성공할 것이라고 운명지어져 있다면,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그 운명이 현실이 되도록 분투하는 것 뿐이다. 인버전은 오히려 당신의 의지를 시험한다. 인버전을 활용할 때 중요하게 묘사되는 것은 인버전된 것들을 다루는 인간의 의지이다. 당신은 탄창이 빈 것을 알아도 총을 쏜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만 벽에 박힌 총알이 총으로 돌아온다.
그런 의미에서 인버전이라는 소재는 오히려 목적론을 긍정한다. 무질서도는 어떤 영향도 없는 고립된 상태 안에서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쪽으로 나아간다. 총을 쏘는 것보다는 가만히 서 있는 편이 간편하다. 그럼에도 벽에 인버전된 총알은 박혀 있다. 무질서는 이미 벌어져 있다. 당신이 그것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총을 쏜다고 생각해야 한다. 당신이 에너지를 쏟아야, 누군가의 엔트로피는 증가해야 무질서를 감소시킬 수 있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다."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것은 일어난 일의 무게이다.
나는 영화가 끝나기 직전까지, <테넷>이 사랑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모든 종류의 사랑으로부터 버림받은 남자가 있다. 그의 고향에서 핵실험 사고가 발생했고, 모두가 기피하는 그곳을 수습하라고 그가 투입되었다. 그런 일이라도 맡아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는 형편이었던 모양이다. 주변으로부터 신임받지 못해 그런 환경으로 내몰렸거나. 그때 방사능에 노출된 이유인지, 그는 지금 시한부 인생이다.
그는 사람 죽이는 걸 꺼리지 않는 냉혈한인 동시에, 극도로 의심이 많으며 살얼음길 걷는 것처럼 신중하다. 철두철미한 본성 같기도 하지만, 자신을 둘러싼 세상 자체를 불신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의 아내 캣은 미술품 감정을 직업으로 한다. 남자는 아내를 통해 그림을 한 점 샀는데, 그것은 위조품이었다. 그는 아내로부터도 배신 받았다(물론 캣이 그림 제공자와 공모한 것이 아니었음이 밝혀진다).
막대한 부를 축적한 그는 모든 걸 가졌지만,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 그 남자, 사토르는 '가지지 못할 바에 부숴버리겠다'는 지금은 농담처럼 쓰이는 드라마 대사를 자기 신념으로 구현한 인물이다.
아내가 자신을 배신한 것으로 드러난 순간부터 그는, 인질인 아들과 배신의 증거인 그림을 손에 쥐고 아내를 철저히 억압하기 시작한다.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복종이라도 시켜 사랑을 흉내라도 내겠다는 듯. '내가 널 못 가진다면 아무도 널 못 가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가 도저히 굴종하지 않고 그의 목숨까지 노리자, 사랑이 완적히 박살났다고 느끼고는 그녀를 정말 도구처럼 다루기 시작한다. 가지지 못할 바에 부수겠다는 듯이, 주도자를 심문하는 인질로 쓰고 복부에 인버전된 총알을 쏘기를 서슴치 않는다.
캣의 신변이 주도자와 테넷 요원드에게로 넘어가기 전, 사토르는 무기 창고로 캣을 부른다. 자신이 더러운 일을 하는 덕에 캣은 명품을 걸치고 아들은 좋은 학교에 다닌다는 것을 보여준다. 캣은 설득되지 않고, 사토르가 강압적으로 나오며 위협하자 숨겨 권총으로 사토르를 겨눈다. 그러나 사토르는 냉혈한처럼 말한다. '네 눈에서 보이는 건 분노가 아니라 절망'이라고. 그러니 쏘지 못할 것이라고.
사랑에 대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분노하고 차라리 원망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 절망했다면, 그 순간부터 그건 유지되기 어렵다. 분노하는 것은 뭔가 바랐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았고, 여전히 그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망한 순간부터는 상대에게 뭔가를 바랄 수 없게 된다. 캣이 사토르에게 총을 겨눌 때, 사토르는 차라리 그녀가 그것을 격발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녀의 눈에서 읽어낸 것은 절망이었고, 그녀는 총을 쏘지 않는다. 결국 뭔가 바뀔 것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에.
이제 그녀가 그를 사랑하게 만들 수는 없다. 그는 그녀를 제압하고 구타한다. 사토르는 이제 그녀를 최대한 이용할 뿐이다. 인질로 사용하고, 복부에 인버전된 총을 쏜다. 그는 캣에게 분노한다. 바랐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여전히 그것을 바란다.
어차피 그는 시한부고, 세상 어디에도 그를 향한 사랑은 없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으니, 세상을 부술 차례다. 미래 인류가 그에게 접촉한 것은 서슴치 않게 멸망의 스위치를 누를 성정을 가진 인물임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모든 알고리즘이 모인 순간, 그는 부하에게 작전 완수를 지시하고 자신은 인버전을 통해 아내와 피서를 갔던 시간으로 이동한다. 그날 사트로와 캣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틀어졌었다. 알고리즘이 전달되면 지금의 세상은 파괴될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인 사토르에게, 죽기 전 마지막으로 반복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아내와 관계가 틀어지기 전, 관계 회복의 가능성이 있던 그날인 것이다.
사토르도 사랑을 인버전할 수는 없었다. 그는 캣의 마음을 원했지만, 자폭 스위치를 누를 수 있는 인물인 그는 처음부터 사랑을 하기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캣의 눈에서 분노가 아닌 절망을 읽었다. 미래의 사주를 받아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태도는 분노가 아니라 절망은 아닌가. 그는 그를 둘러싼 세계를 사랑하지 못하며, 그러므로 눈 앞의 인간과의 사랑에서도 반드시 실패하는 것이다.
피서지의 요트 위에서 그를 기다리던 것은 인버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온 미래의 캣이었다. 분노가 아니라 절망을 한 탓에 사토르에게 총을 빼앗겨 인질로 사로잡혔고, 그에게 인버전된 총알로 관통상을 당해 복부의 흉터를 갖게 된 그녀. 알고리즘 회수 작전이 성공하려면, 당연히 일단 알고리즘이 회수되어야 하고, 사토르를 죽여야겠지만 알고리즘이 회수되기 전에 사토르가 죽거나 자살하는 것은 막아야 했다. 시한부인 그가 자기 심장박동이 멈추는 순간 알고리즘이 전달되도록 해놨기 때문이다. 캣은 비위를 맞춰주며 시간을 끌지만, 정상적인 시간대의 자신(사토르와 피서를 왔던 자신)이 돌아오는 것이 보인다. 그를 지금 죽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캣은 그냥 죽이지 않는다. 총을 겨눈 채 말한다. '우릴 당신의 무덤으로 데려갈 수는 없다'고, 죽을 거면 혼자 죽으라고. 그녀에겐 사랑하는 아들이 있고 그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세계가 있다. 그러니, 사토르가 전 세계인과 동반자살을 할 작정이라면,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걸고 그를 막아야 한다. 절망이 아니라 분노를 해야한다. 그러나 그 사랑이 사토르를 향한 것일리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사토르와 같은 시간대에서 인버전되어 온 캣임을 알리기 위해 흉터를 보여준다. 달려드는 그에게 총알을 발사한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에 대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랑의 대상을 하나만 가질 필요는 없고 그럴 수도 없다는 것. 상대방이 사랑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들을 반드시 이해하고 용서할 필요는 없다는 것.
엔트로피는 자연 상태에선 반드시 증가한다. 인버전된다면 반드시 감소한다. 다른 가능성은 없다. 그것이 법칙이다. 영화가 여러 시간들을 바쁘게 오가는 와중에, 어떤 법칙도 없이 변덕스럽게 흐르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인물의 감정이다. 그렇다면 그것 또한 법칙으로 봐야 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서, 어쩌면 <테넷>은 우정에 관한 영화고 장황한 '버디 무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주도자와 닐 때문이다.
닐이 평범한 CIA 요원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스파이가 아닌가 의심까지 했던 주도자가 그럼 누구를 위해 일하냐고 묻자 닐은 지금 말해줄 수 없으며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되면 전부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이제 모든 작전이 완수되었고, 앞에 서술한 대화가 이루어진다. 주도자의 모든 순간에 닐이 있었다. 닐은 죽기 위한 여정을 홀로 시작한다. 등을 돌려 떠나는 닐을 만류하려는 듯, 주도자는 '누구와 일하는지 아직 못 들었다'고 외친다.
닐: 아직도 몰라?
닐: 너야. 나중에 날 뽑게 돼. 네 미래는 과거 속에 있어. 내겐 수년 전, 너에겐 수년 후.
주도자: 날 오래 알았어?
닐: 우리의 멋진 우정은 나한텐 여기가 끝이야.
주도자: 내겐 이제 시작이고.
닐: (등을 돌려 걸으며) 우리가 할 일들, 아주 재밌을 거야. 두고봐. 이 모든게 시간 협공 작전이지.
주도자: 누구의?
닐: 너의! 아직 반쯤 남았어. 처음에서 만나자고.
영화의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주도자는 인버전을 다루며 미래와 싸우는 기관 '테넷'을 설립할 것이다. 요원 닐을 직접 선발하게 되고, 그와 친우가 될 것이다. 장차 닐은 과거의 주도자를 돕기 위해 여정을 떠난다. 그것이 주도자에겐 그들 우정의 결말이다. 닐에겐 우정의 절반 지점이다.
처음부터 닐은 영화 시점의 주도자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접근했었다. 다이어트 콜라를 즐겨마신다는 사소한 것조차 말이다. 장차 그들은 그만큼 가까워진다. 결국 세계를 구했지만, 닐은 다시 인버전을 거쳐 못다한 일들을 끝내야 한다. 주도자를 구하고, 마지막엔 목숨을 잃어야 한다. 주도자에게 그들 우정은 그제야 시작이고, 시간으로 보자면 반쯤 남았다. 닐에겐 이때의 작별이야말로 진정한 작별이다.
닐의 '처음에서 만나자'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주도자가 닐의 금속 장식이 달린 가방을 처음 보고 처음 그에게 도움을 받았던 것은 아직 CIA 요원이던 시절 투입된 오페라 하우스였다. 이제 닐은 인버전을 거쳐 그곳에서 주도자를 구할 것이다. 시간순으로는 그곳이 그들 우정의 '처음'인 셈이다. 반면 주도자는, 테넷을 설립하고 신입 요원 닐과 만나게 될 것이다. 그 또한 그들 우정의 '처음'이다.
그들 우정은 두 번의 처음과 두 번의 끝을 가진다. 그 사실이 어느 하나를 덜 아름답게 만들지는 못한다. 요즘 서사물에선 열린 결말이 거의 일반적인 작법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작별까지 상상되는 관계야말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에게 '플롯의 마술사'라는 별명이 붙는 것이 대단히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냥 플롯이 좋다는 칭찬이 아니다. 놀란은 자신의 핵심적인 주제나 소재를 플롯을 통해 표현하는 것에 대단히 능하다. 가령 <인터스텔라>의 플롯이 다루는 시간의 상대성은 '사랑의 상대성'을 표현한다. <오펜하이머>는 두 인물 사이의 갈등을 그들이 각각 개발한 핵무기의 성질에 빗대어 두 챕터로 담아내었다.
<테넷> 역시 동일한 방식으로 대단히 훌륭했다. 정상적으로 흐르는 시간과 인버전된 사람의 시간으로 엇갈리고 겹쳐지며 이야기가 진행되는 가운데, 결국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였다. '주도자'는 영화 안에서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로 불리는 것에서 착안된 일종의 별칭인데(그의 이름이 언급된 적이 없기 때문에), 이야기의 주인공을 가리키는 단어이며 그리스 비극에서 쓰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비극에서 주인공으로서 강조되는 것은 운명에 저항하고 의지를 관철시키는 능동성이다. <테넷>의 이야기를 다르게 보자면 주인공이 프로타고니스트로서 각성해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요원으로서 뒤늦게 거대한 사건에 뛰어든 주도자가 이런저런 인물이나 단체의 뜻에 따라 행동하며 이리저리 휘말리면서도 자기 의지를 관철시켜나간 끝에 작중 벌어진 사건들을 주도하는 단체의 수장이 됨으로써 진짜 주도자가 되는 이야기인 것이다.
듣던 만큼 어려운 영화였으나, 너무 좋은 영화였다. '어려운 영화'는 하나의 기준으로 명쾌하게 분류될 수 있다. '어려움을 감수할 만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테넷>은 당연히 전자였다. 13일이 지나면 넷플릭스에서 볼 수 없다. 우리는 인버전을 할 수 없으니, 시간이 없다! 악명은 높으나 굳이 전부 이해할 필요가 없으며 그것만으로 충분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