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의 개념 몇 가지를 손에 쥔 채로『모순』읽기
양귀자의 『모순』은 1998년에 처음 발매된 소설이지만, 2024~25년 들어 갑자기 화제작이 되었다. 지금도 교보문고 베스트 10위 안에 들어있는 걸로 안다. 이유가 무엇일까? 챗지에게도 물어보았는데... 보편적인 주제와 메시지가 위로와 공감을 준다는 뻔하고 상투적인 설명보다는 책 속의 명대사와 장면들이 짧은 폼으로 재생산되며 요즘 SNS 콘텐츠와 맞아떨어졌고, 2~30대 여성 독자층의 폭발적인 관심이 있었다는 분석에 주목해보고 싶다. 문학을 읽는 젊은 세대를 10명으로 축소한다면, 그중 남자는 많아야 두 명이나 될까. 지금의 문학판을 여성 작가와 독자가 주도하는 것은 물론 남성이 문단을 점유했던 긴 기간에 대한 반동인 동시에, 문학을 관심 갖고 소비하는 성별이 치우쳐진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그런 맥락에서 양귀자가 읽히는 것은 적절하다. 그의 대표작인 『나는 욕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은 여성주의 문학의 가능성을 거의 처음으로 열어낸 보다 격렬한 투사와 같은 소설이었고, 『모순』은 조금은 온건하게, 여성이 판단 주체로 각성하고 살고자 하는 이야기를 그리는 것 같다. 아무튼 조금 지난, 그러나 여전히 유효한 소설이 이렇게 붐업되는 것은 멋진 현상이다.
(앞으로 언급하는 데리다는 그 난해한 철학을 멋대로 공부한 바, 원래 맥락과 의도에서 상당히 왜곡되었을 수 있고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사유라는 것이 맥락에서 떨어져 나가 멋대로 해석되는 것이 데리다가 지향하던 것인 바. 나도 마음대로 그렇게 하려고 한다. 악으로 깡으로 버티시길, 데리다.)
데리다는 어떻게든 기어코 혼란을 자아내는 특유의 난해한 문체로 ‘쇼핑목록’에 서린 텍스트의 어떤 불가능성에 대해 논한다. 당신이 쇼핑목록을 작성하는 순간, 현재와 미래는 파열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사야 하는 것을 망각할지도 모르는 당신의 미래를 위해 작성되었다. 무언가를 아는 이와 모르는 이, 그들은 존재론적으로 같은가? 당신이 쇼핑목록을 작성한 지금으로부터 마트에 가서 우유를 들고 서 있게 되기까지, 사람을 180도 바꿔놓는 순간을 경험하거나 하다못해 아무런 심경의 변화가 없으리라고 어떻게 장담하는가. 또한 쇼핑목록이 진정으로 제 몫을 다하려면, 당신은 그 목록에 적힌 품목들을 모조리 잊어버려야 한다. 그 텍스트는 망각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우유, 달걀, 과일’을 적었다면, 당신은 우유와 달걀과 과일을 사기로 한 사실을 깡그리 잊어야 그 텍스트를 텍스트로써 치켜세우는 것이다. 즉, 그것을 적은 과거의 당신은 적힌 것 앞에서 부재한다. 또는 텍스트는 저자의 죽음을 전제로 성립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때 저자의 죽음이란 물리적인 죽음뿐 아니라 저자의 영향력이 텍스트에 전혀 미치지 않음을 의미한다. 미래의 텍스트 수취인은 과거의 발신인으로부터 텍스트에 대한 완전한 전권을 부여받는다. 텍스트는 반드시 과거에 쓰인 것이므로, 텍스트에 현재란 없으므로, 텍스트는 아무렇게나 읽힐 수 있다. 모든 종류의 텍스트는 강제적으로 ‘컨텍스트(맥락, 그러나 하나의 텍스트 안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속한 전체 세계와의 맥락)’와 연결되는데, 그것이 오독와 오해의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가령 당신이 장을 보러 가다가 사고를 당해 사망하고, 지나가던 누군가 그 쇼핑목록을 주웠다. 그 사람은 그것을 자신이 속한 맥락에 따라 쇼핑목록으로도, 무언가를 구매하고 섭취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인간 육체의 환멸을 노래하는 한 편의 시로도, 우유와 달걀과 과일의 가격을 폭등시킨 정부를 비판하려는 시도로도 읽을 수 있다. 수취인의 손에 들어온 텍스트 안에서 저자는 죽어 없어졌는데, 그 중구난방의 읽기를 누가 막을 것인가. 텍스트는 광대한 컨텍스트 속에서 강제적인 ‘대리보충’을 당한다. 무엇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텍스트를 마음대로 부연 설명하고 보충하여 그것을 망가뜨리고 왜곡할 수 있다.
그래서, 텍스트는 괴물이다. 그것은 저자의 죽음을 담보로 기능하며, 미래에 읽힐 것을 전제로 하기에 결코 현재할 수 없는 현재에 의문을 가진다(한번 현재에 속해있기 위해 애써보라. 현재란 무엇인가?). 그런데 텍스트의 괴물성은 어쩌면 계획의 괴물성으로부터 발현되는지도 모른다. 텍스트는 필연적으로 무언가 약속해 놓기에 계획적이고, 계획적이기에 괴물성이 깃든다(이때 괴물성이란 기존의 질서에 균열을 내고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시도이자 성질이다).
양귀자의 『모순』에서, 주인공 ‘안진진’의 상대 남성인 ‘나영규’는 계획의 괴물성에 사로잡힌 남자다. 그에게 진정으로 의미를 갖는 것은 계획을 세우고 그것이 실현되는 것뿐이며, 안진진과의 사랑도 계획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나영규도 당황했다. 그러나 나는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준비한 크리스마스 계획이 뭉개지고 말 어떤 중대한 사정이 저 안진진이라는 여자한테 일어났으면 어쩌지 하는 조바심을. 그것은 나 안진진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준비를 거친 오늘의 약속이 취소될 것을 더욱 근심하는 조바심이었다. (265쪽)
그의 괴물 같은 계획성을 깨달은 뒤, 그녀는 나영규의 모든 행동이 계획되어 있다는 생각을 멈추지 못한다. 쇼핑목록의 괴물성. ‘우유, 달걀, 과일’, 그것을 든 당신은 우유 옆에 요구르트가 눈에 들어와도, 혹은 오늘 과일 품질이 별로더라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확하게 그 세 가지 품목을 사야 한다는 강요를 받는다. 텍스트를 작성한 과거, 계획을 세운 나영규가 현재의 당신에게 자신의 과거를 강제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방법론으로서 철저한 계획이란 불가능한 것인데, 과거에서 현재를 강요함으로써 반드시 권태를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나영규가 무엇보다도 괴물적인 것은 그의 괴물적인 자기 확신이다. 계획을 세운 과거의 자신과 그것을 이행하는 현재의 자신, 그사이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인 불일치를 그는 묵살한다. 과거와 현재는 불연속을 이어놓은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와 현재 사이가 단절되어 있음은 상식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1초 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의 불연속을 감각하지 못한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를 현재 속에서 통합하는 주체의 유령성(유령서에 대해서는 후술될 것임) 때문이기도 하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으로 붙들어놓는 인간 정신의 작용이기도 하다. 아무튼 단절은 우리가 직접 느끼지 못하더라도 필연적인 것이고 따라서 주체는 도무지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며, 다만 행동을 이어갈 뿐이다(그러다 보면 확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영규에게, 과거의 ‘나’가 결정한 것은 현재의 ‘나’에게 무조건적으로 기쁨을 준다. 그러한 불가능성의 수행이 그를 괴물로 만들며, 안진진이라는 개인에게는 한없이 낯설게 다가온다.
안진진에게는 또 다른 대상인 ‘김장우’가 있다. 그는 나영규의 대척점에 서 있다. 그는 직업부터가 계획과는 거리가 먼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야생화를 주로 촬영한다. 들꽃이 피는 계절은 정해져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느 날 틔울 것인지는 꽃의 변덕스러운 마음이다. 그러므로 그가 카메라를 챙기고 산을 쏘다니는 것은 인간의 계획이 아니라 꽃의 무계획성에 의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안진진을 대할 때 그의 태도에 주목해야 한다. 그녀 앞에서 그는 무엇도 계획하지 않는다.
“이유야 또 있지. 안진진이 있잖아. 옆에서 말도 해주고 같이 웃어주고 쉴 새 없이 숨소리를 내는 안진진이 있어서 순간순간이 충만할 텐데 뭣 때문에 카메라를 가져오겠니. 나는 이번 여행에서 사랑하는 꽃 이름을 부르는 대신 안진진의 이름만 열심히 부르기로 결심했어.” (194쪽)
그녀는 두 남자를 사이에 두고 고민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둘 중 어느 쪽이 과연 사랑인가. 흥미롭게도, 갈등하는 그녀의 태도에 이미 결론이 서 있다. 운명의 개입에 맡기기로 하며 그녀는 먼저 연락을 취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을 확인하는 일종의 방법론으로서 '무계획성'으로 자신을 열어둔다.
나영규에게는 없는 것, 그것이 확실히 김장우에게는 있었다. 나영규와 만나면 현실이 있고, 김장우와 같이 있으면 몽상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몽상 속에는 현실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은 아련한 유혹이 담겨있다. (194~195쪽)
안진진 자신이 “사랑이라는 몽상”이라고 서술했다. 재력과 여유를 갖춘 나영규가 현실이고, 가난한 형편이지만 낭만적인 김장우가 몽상이라면, 사랑은 확실히 몽상 쪽이다. 사랑이란 현재라는 시제 속에서 달궈지고, 몽상은 모든 감각을 지금의 순간으로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숨쉬기가 몹시 불편했고 갑자기 두려워졌다. 그가 다음에 어떤 동작을 취할지 어떤 말을 할 것인지 나는 다 알고 있었다. 다 알면서 모른 척하기는 싫었다. 심연으로 가라앉은 내 마음이 나에게 일렀다. 이 남자를 놀리지 말라고. 그래서 나는 눈을 번쩍 뜰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바로 그렇게 했다. 그러나 늦고 말았다. 내 눈앞에 확대된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동시에 말도 있었다.
“사랑해.” (197쪽)
김장우와 함께한 여행에서 그를 향한 자신이 감정이 사랑임을 확인하고, 그녀는 시름하기 시작한다. 그녀를 걱정하는 손길이 입술에도 닿으며 그녀는 이어질 그의 입맞춤을 확신한다. 그것을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은 남자를 놀리는 것에 불과하다. 사랑으로 달뜬 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사랑을 거부하고 있다. 그녀가 눈을 번쩍 뜨는 것은 그것의 진행을 멈추기 위함이다. 사랑이 예상대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이 이상으로 사랑을 확신하기 싫으면서 그녀를 사랑하려는 남자의 입맞춤을 받아 그를 기만하지 않기 위해. 그러나, 내가 사랑이 몽상이며 무계획성이라 했는가. 그가 그녀에게 준 것은 입술의 접촉 대신 명료하고 강력한 한 마디 말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계획을 초과하는 몽상이 되어 입맞춤보다도 적확하게 사랑을 견지하며, 미래에 대한 모든 예상을 깨뜨리며 그와 그녀가 서로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보고 있는 순간을 현재에 새겨넣는다.
우리는 안진진의 미래를 어렵지 않게 예상해 볼 수 있다. 두 쌍둥이, 어머니와 이모. 그들 자신은 안진진과 같은 현재에 속하면서도 안진진이 가닿을 수 있는 미래의 가능태로 놓여있다. 낭만적이고 충동적인 남성인 아버지와 결혼했던 어머니는 악착같이 살아가고 있다. 건달을 넘어 부랑자가 된 아버지가 미쳐버린 계기는, 어머니와 가족들을 향한 강력하고 절대적인 자신의 사랑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사랑은 대상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사랑하지 않게 되는 모순을 선사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감옥처럼 느껴지게 할 수 있다. 그들 앞에 자신이 알아서 쇠창살 안으로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몸과 마음의 주도권을 넘겨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쉽게 끊어낼 수 없는 그 두려운 족쇄를 풀기 위해 아버지는 안간힘을 쓰며, 마음 속에서 요동치는 사랑과 반대되는 행위를 해야 했다. ‘아버지는 상스러운 욕설을 하더라도 입술을 깨물며, 이마에 푸른 힘줄을 돋우면서, 온 힘을 다해 자신도 지금 죽을 듯이 괴롭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알려주었다(90쪽).’ 여행에서 사랑을 확인한 안진진이 김장우에게 아버지와 같은 말(그가 자신에게 감옥이고 간수라는 말)을 하며, 그 운명과 성향이 안진진에게도 서려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불규칙한 방랑 생활을 하면서도 자식들에게 낭만적인 아버지였던 그는 그로 인해 불행하고 질긴 삶을 사는 아내의 모습을 안진진에게 제시함으로써, 사랑과 무계획성의 남자의 아내가 되었을 때 안진진이 도달할 수 있는 한 극단을 보여준다.
반면 이모부는 ‘정시에 출발하고 정시에 도착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기차’에 비유되는 계획의 화신이다. 결혼 20주년으로 간 유럽 어디에서도 그는 정확하게 사진 세 장을 찍으며, 아내가 맛있게 먹은 스파게티 가게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에겐 몽상과 낭만이란 없으며, 오로지 계획뿐이다. 그런 그와 함께하는 이모는 끝내 스스로 생을 끝냈다. 아니, 그것이 자살인가? 그녀의 시신은 둔중한 커튼 밑에 놓여있다. 이모부의 계획이 쌓아 올린 두터운 성곽 내부에서 능동적인 삶의 가능성은 커튼으로 차단되고, 그녀의 현재는 미래만 바라보는 이모부의 계획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모는 누구보다도 현재를 갈구하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오로지 첫눈을 맞기 위해 안진진과 외출한다. ‘첫’이라는 관형사는 지금 이루어지는 현재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가. 대중을 사로잡았다가 금세 사그라들기에 현재를 추동할 수밖에 없는 유행가를 이모가 유독, 그 집의 품위와 교양에도 불구하고 즐기지 않았는가. 그러나 첫눈에만 심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겨울은 그녀에게 엄혹한 계절이다. 황량한 겨울에 기다릴 것은 오직 첫눈의 감격뿐이어서, 이후의 시간들은 경험된 이후로는 과거에 머물 수 밖에 없는 '첫' 순간들의 낭만을 곱씹는 그녀에게 지리멸렬함을 선사할 뿐이다. 이모 역시 계획의 괴물의 아내가 되는 삶의 어느 극단을 안진진의 가능태로 제시한다.
현재의 사랑과 낭만. 미래의 계획과 풍요. 김장우와 나영규, 어머니와 이모. 두 가능태 중에 안진진이 전자를 선택할 것은 거의 분명하게 보였다. 어째서 그녀는 결심을 뒤틀었는가? 데리다의 유령론은,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가 주장하듯) 역사란 과거와 단절하여 새롭게 수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과거의 흔적과 미래의 가능성이 끝없이 현재에 영향을 미침을 말한다. 즉 유령이란, 죽은 것이 모습을 비추는 괴기가 아니라 과거의 사건이나 인물이 현재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다시 출몰하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괴물적인 연결, 컨텍스트, 대리보충.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와 이모는 안진진의 현재 앞에 펼쳐진 가능성이자 과거-역사-미래로서 유령인 셈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보였던 이모의 삶이 스스로에겐 한없는 불행이었다면,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에게 불행하게 비쳤던 어머니의 삶이 이모에게는 행복이었다면, 남은 것은 어떤 종류의 불행과 행복을 택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문제뿐이었다. (295~296쪽)
이모의 죽음은 현재 혹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과거이지만, 그것은 그녀의 유령이 불러들인 과거이자 안진진의 미래의 가능성이라는 맥락으로, 안진진의 선택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즉 한쪽이 ‘죽음’이라는 상태로 결정되며 다른 쪽에 영향을 주는 ‘양자 얽힘’이다.
이모의 죽음으로 인해 그녀의 삶이 불행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어머니와 이모 삶 사이의 모순 구조가 기필코 완성된다. 그 둘은 행복을 가장한 불행이자 불행을 가장한 행복이었다. 그들의 삶은 안진진의 앞으로의 가능성으로 중첩되는 동시에, 그 안에서도 불행과 행복이 중첩되는 것이다. 복잡하게 얽힌 모순 구조 속에서 안진진에게 가능한 것은 선택보다는 체험뿐이며(마지막으로 한마디. 일 년쯤 전, 내가 한 말을 수정한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296쪽)), 사랑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 치 앞도 모르는 길을 체험해야만 사랑인 것이다. 사랑이란 현재 시제를 살아가며 무계획 속에 헝클어지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녀의 어머니라는 가능태는 불행으로 인한 역설적인 행복과 생존을 암시하지만, 그녀의 딸인 안진진에게 그 길은 이미 지켜본 길이다. 따라서 현재란 없으며 (목격한 과거와 예상 가능한 미래만 존재할 뿐이며) 계획과 기시감의 영역에 들어서 있다. 이모라는 가능성 끝에는 불행과 죽음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지만, 어머니라는 가능성은 ‘이미 경험된 무계획’으로, 어쩌면 그녀에겐 이모의 삶보다도 지리멸렬한 것이다. 알면서도 저지르는 실수, 모순과 불가능성으로의 몰두야말로 사랑이 아닌가.
그러므로 마지막 결정에 대해 독자들은 실망할 것 없다. 그녀의 이름 안진진, 처음부터 모순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