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다는 평 정도만 듣고 극장을 찾았다. 기대보다 영화가 좋아서 깜짝 놀랐다. 2시간이 이렇게 삭제당한 건 참 오랜만이다. 이렇게 좋은 영화가, 출연 배우의 개인사라는 후천적인 리스크 때문에 창고에 처박혀 있다가 이제야 공개되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예고편에서는 사제간의 치열한 대결인 것처럼 언급되었고 또 결정적인 하나의 대국이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것처럼 다루어졌다. 바둑 등을 소재로 하는 영화라면 실제로 그런 것들이 기대되기도 한다. 유튜브에서 두뇌싸움 예능인 <더 지니어스> BGM을 삽입하고 어우러지게 편집한 것이 돌기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막상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따듯한 이야기였고 또 그래서 좋았다. 특정한 하나의 대국이 두드러지지 않았고, 모든 대국이 중요한 동시에 어떤 대국도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였다.
이 후기에서 칭하는 '조훈현'과 '이창호'는 실제 인물이 아니라 영화 속 인물이다. 나는 바둑에 대해 아는 배경지식이 없는 만큼, 실화와 차이가 날 수 있다.
실화 기반이라 스포일러라고 하기 묘하지만, 그래도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세계 최고 바둑 대회에서 우승한 '조훈현'은 바둑 신동 '이창호'를 제자로 들여 가족처럼 함께 생활한다. 어린 아이에서 십대 소년이 된 이창호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내고 이른 나이에 스승에게서 모든 타이틀을 빼앗는다. 간만에 패배를 맛본 조훈현은 심적으로 크게 흔들리지만, 라이벌(이라기엔 매번 패배를 맛보던) 남기철의 조언과 아내의 쓴소리를 듣고 마음을 다 잡는다. 1년 뒤, 이번엔 꼭대기에서 이창호가 조훈현을 기다린다. 조훈현은 마침내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제자에게서 승리를 따낸다.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조훈현과, 그 앞에서 승자임에도 고개를 숙여야 했던 이창호. 둘은 기자 앞에서도 승패를 두고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된다. 둘은 또 한번 승부를 치르러 이창호가 조훈현을 크게 끌어내렸던 곳으로 향하지만, 발걸음은 가볍다.
주연 배우들이 실제 인물의 외모, 성격, 습관, 복장까지 똑같이 가져온 것처럼, 이야기도 실화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 모든 일화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도 이 영화가 좋았다면(함께 관람한 내 지인이 그랬다), 아무래도 각 인간의 심리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기는게 일이었던 조훈현은 자신이 키운 제자 이창호에게 거듭 패배한 뒤 속절없이 무너진다. 대회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고 기권패를 당한다. 그제야 존재가 두드러지는 것은, 조훈현에 맞서 지는게 일이던 남기철이다. 조훈현이 미치지 않고서는 못 견디는 일을, 그게 자기 자리인양 묵묵히 하던 사람. 남기철은 '숨죽이고 웅크리는거 어울리지 않으니 당신답게 하라'며, 비를 뚝뚝 맞던 조훈현을 위해 우산을 둔다. 앞서 그는 스승이 너무 높아보인다는 이창호에게도 '배우려 하지 말고 이길 궁리를 하라'는 조언을 한 바 있다. 당연하다는 듯이 지는 상황에도 매번 자리에 나와 바둑을 두던 사람. 조훈현이 크게 굴러떨어질 때, 남기철이라는 인물의 단단함은 비로소 드러난다. 그가 바둑에 대해서는 가르칠 것이 없더라도 인생에서만큼은 두 사람의 스승인 셈이다.
남기철은 많은 타이틀을 빼앗기고 방황하는 조훈현에게 '한번 맞았다고 이러면 내가 뭐가 되냐'는 식으로 말했지만, 안 맞다가 맞으면 더욱 아픈 법이 아닐까. 높이가 갖춰지지 않으면 추락해도 다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그의 재기는 더욱 대단해보인다. 늘 챔피언의 자리에서 도전자를 기다리다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가는 도전자의 위치로 임하는 것은 그의 말마따나 신선한 경험이겠지만, 그걸 누리려면 그만큼 그릇이 커야지 않겠는가. 이창호가 그를 이기고도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채 '죄송하다'고만 말해야 했던 것은, 스승인 그가 수심에 빠져있기 때문이었다. 조훈현은 이창호에게 바둑에서 더 공격적으로 나서야 한다며 '바둑판에서 피하기 시작하면 갈 곳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계속해서 상대를 공격하고 아픈 곳을 집요하게 물어뜯는 것이 조훈현의 기풍(바둑을 두는 스타일)이다. 그러니 그가 패하기 시작하자, 승부를 보는 것이 두려워 피하기 시작하자 자신이야말로 '갈 곳이 없'어진다. 그가 잡은 흑돌에서는 피가 새어나오고, 그는 새하얀 위로 코피를 떨어뜨린다. 바둑판 위에서는 흑 아니면 백 뿐인데, 그는 어디도 가지 못한다. 제자를 축하해주지 못하는 자신의 못남을 받아들인 그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으며 뭘 가르친다는 것도 웃기다는 칭찬과, 늘 그가 자랑스러웠다는 격려를 함께 건네고 이창호와의 동거를 끝낸다. '바둑은 자신과의 싸움이다'라는, 한때 자신이 바둑판에 새겼던 말을 다시 마음에 새기며 마음을 무장한 그는 1년 뒤 자신이 제자에게 도전하기 시작한다. 수세에 몰렸을 때 그가 담배 대신 꺼내는 '밀크카라멜'은 그것처럼 끈적이는 그의 집념을 상징한다.
처음 조훈현에게서 승리한 후 이창호는 방에서 조용히 어릴 적 이별한 할아버지에게 말을 건넨다. 집 떠나와 낯선 곳에서 바둑만 생각해야하는 10살 아이의 마음이란 무엇일까. 같은 집에서 같은 밥을 먹는데도 서로 기풍이 180도 다른 것이 재미있다. 이창호는 아무리 유리해보이더라도 싸움에 나서지 않는다. 싸움에서 이기는 것보다, 변수를 줄여 결론적으로 승리하는 것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짐짓 얌전하고 소극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는 조훈현만큼이나 이기고 지는 것에 목을 매는 사람이다. 바둑기사로서 두 사람을 지탱해온 것은 당연히 승부욕이었을 것이다. 한쪽은 스승, 한 쪽은 제자로서, 누가 이기든 한 몸처럼 기뻐야할 터인데 그게 쉽지 않다. 조훈현이 그간 수도 없이 이겨놓고 이창호에게 패배한 것에 세상이 무너진듯 군 것처럼, 돌아온 조훈현에게 패배한 이창호는 택시 안에서 패배를 자책한다. 그러다 스승이 넘겨준 보자기를 풀어본다. 조훈현이 재기하며 마음을 다지기 위해 손으로 쓸어보았던, 그 바둑판이다.
조훈현이 서재에서 대국을 복기할 때, 창에 비친 조훈현의 모습은 마치 자기 자신과 바둑을 두는 것처럼 보인다. 정답이 없는 바둑판 위에서 승부가 나는 까닭은 두는 사람이 실수를 하기 때문이다. 바둑은 내가 남긴 허물과의 싸움이다. 두 사람이 갈라서고 갈등하는 것은 바둑 때문이 아니라, 그 결과로서 존재하는 '승'과 '패' 때문이다. 바둑이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두 사람은 원수가 될 수 없다. 서로가 물어뜯는 것은 자기 자신의 연약한 모습일 뿐이다. 그것을 먼저 알게된 조훈현은 '나의 급소는 상대방의 급소이기도 하다'는 점을 찔러 이창호로부터 승리해낸다. 전혀 다른 기풍은 다른 거울상을 드러내 보일 뿐이며, 따라서 그들은 마침내 승패에 연연하지 않고 승부만을 즐길 수 있다.
영화를 보며, 실제 역사를 얼마나 충실히 재현해냈는지 보는 것도 재밌는 관전포인트가 될 듯 하다. 나는 유아인 배우의 이창호 연기가 참 답답하다고 생각했는데, 지인이 말하기를 실제 이창호와 똑같다더라. 시대에 맞는 세트와 소품들도 충실해서 보는 맛이 있었고, 이병헌은 이번에도 감쪽같이 옷을 갈아입었다. 본업만큼은 깔 수가 없는 배우... 다만 그런만큼, 영화의 서사 등에 대해 내가 할 말은 많지 않은 듯 하다. 어쨌거나 이것은 닫힌 이야기이다. 대단한 생각거리를 던지지는 않는듯 하면서도 관람이 좋았다는 감상을 주는 이유가 이것일까?
바둑을 전혀 모르는 나도 재밌게 보았으니, 그게 감상을 꺼리는 이유가 될 수는 없겠다. 오히려 바둑을 아는 지인은 과할만큼 대국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의도이겠다. 바둑의 규칙을 더 자세히 설명하고 그들의 두뇌싸움에 집중한다면, '승부'는 화젯거리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카타르시스를 절제하고 바둑을 둘러싼 인물의 고뇌와 그들의 관계에 집중했을 때, '승부'는 비로소 고찰의 대상으로써 주제가 된다. 누가 이기고 지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 누군가의 삶에 관한 영화였다.
마지막으로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당연히 첫째로는 여태 이 영화가 개봉되지 못하게 만든 배우 이슈가 있겠고. 둘째로는 이제는 한국영화가 필히 안고 있는 결점이라고 말해야 하나 싶은... 감성을 때려넣은 나레이션. 나로 하여금 '아냐 그거 하지 마'라고 속으로 외치며 고개를 젓개 만든 이병헌과 유아인의 마지막 나레이션... 없는게 훨씬 나았을 것 같다.
<승부> 한 줄 평
좋은 상대가 있어야 명국이 펼쳐진다고 할 때, 바둑은 승부가 된다. 그것이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할 때, 바둑은 삶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