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의 작가 백수린
백수린이 그동안 우리에게 보여준 세상의 속성은 무엇이었나. 타지에서 생활하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 시사하는, 필연적인 손상을 안고 있는 언어의 불안함. 그리고 가까운 듯 가닿을 수 없는 타인이라는 존재, 그럼에도 닿고 싶다는(혹은 멀어지고 싶다는) 존재의 욕망. 하지만 그의 소설은 결국에는 회복의 가능성을 언급하거나, 회복을 직접 보여주며 마무리되곤 했다. 그 점(회복을 그린다는 점)에서, 인물의 행위성이나 사회의 정치성에 대해 깊게 사유하지 못하고 굳이 소설일 필요 없는 '사회 고발'만을 기능하고 말거나 '그냥 그런, 좋은 이야기' 정도가 되고 마는 흔해빠진 다른 소설들과 비슷하게 보일 수 있으나. 백수린이 그들과는 궤가 다른 작가라고 (적어도 나에게는) 여겨지는 이유는 그가 그리는 회복에 이르는 궤적이 절묘하고 치밀할 뿐 아니라 '회복을 위한 회복'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그려내는 것은 회복을 향하는 내면의 운동성이며,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작은(때로는 큰) 공동체의 정치성이다.
기쁜 마음으로 『봄밤의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번에 실린 작품들은 백수린의 정수가 응축되어있다고 느낀다. 내가 특별히 인상 깊게 보았던 그의 작품들, 가령 「시차」나 「흑설탕 캔디」의 분위기를 같은 결로 훌륭하게 이어가는 느낌. 소설가는 그 생에 걸쳐 똑같은 이야기를 변주해 가며 반복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그 동어반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주는 작가를 뽑으라면 백수린이 아닐까. (이제 찬양은 그만해야겠다. 이제 끝! 진도가 안 나간다.)
『봄밤의 모든 것』에 실린 7편의 단편들, 「아주 환한 날들」,「빛이 다가올 때」,「봄밤의 우리」,「흰 눈과 개」,「호우豪雨」,「눈이 내리네」,「그것은 무엇이었을까」는 인간이 살아가며 경험하는 어떤 순간과 그것에 대한 강렬한 느낌과 관련 있다. 그동안 그의 소설들이 작품 속 인물에게, 그리고 소설을 읽는 우리에게 무언가 눈이 부신 느낌을 건네온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외상과 같은 강렬한 경험, 그때를 기점으로 무언가 유실되었거나 망가졌다고 느껴지는 그 순간,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그 상처의 순간들은 주체가 외면하고 완전히 도려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괴롭고 아픈 순간인 동시에, 나의 세상이 비는 방식을 완전히 바꾼(혹은 앞으로 바꿀) 광원임을 알기에 시선이 그리로 향하면 눈이 부실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쳐다보게 된다. 백수린의 소설이 주는 빛은 그 강렬함으로 인해 인물이 눈을 질끈 감고 움츠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물체를 한낮과는 다른 형상으로 빚어내는 초저녁의 어둑한 빛이다. 그것은 손을 이마에 기대 그늘을 만든 채로, 미간을 찡그려가며 광원을 쳐다보게 만드는 생경한 눈부심을 선사한다.
「아주 환한 날들」의 할머니는, 앵무새와의 짧은 동행을 통해 작별의 슬픔을 다시 마주한다. 생은 후회와 이별의 연속이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새로 사랑하기를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을 호호백발이 되어서야 깨닫는다. 「빛이 다가올 때」의 '나'는 '인주 언니'와의 재회와 그녀로부터 전해 들은 큰이모의 마지막을 통해 누구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어떤 것에 가닿는 법을, 그럼에도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사유해 본다. 「봄밤의 우리」는 '그녀'에게 이상하다고 여겨지는 '유타'의 삶의 태도와 그 이유이던 이별의 아픔을, 그리고 개를 잃은 '그녀'가 슬픔을 이해받지 못하며 느끼는 슬픔 사이의 위계를 함께 제시하여 슬픔이라는 감정에 존재하는 어떤 가침성(可侵性)을 파고든다. 「흰 눈과 개」는 외국인 사위를 얻게 된 아버지와 딸의 갈등을 통해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타자처럼 여겨지는 순간을, 그러나 무언가 낯설게 여김으로써 오히려 가능해지는 회복의 순간을 포착한다. 「호우豪雨」의 소희는 '나'라는 존재의 껍데기가 얼마나 안락한지, 그 바깥 존재하는 것들을 외면하는 것이 얼마나 손쉬운지 고발한다. 「눈이 내리네」에서는 '다혜'와 이모할머니의 순간들을 통해 주체가 단일한 연속체가 아님을, 시간을 저며 단면에 집중하면 '나'라는 사람은 생소하게 느껴짐을, 그래서 지금이 소중하다는 것을 고찰한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에 등장하는, 이제는 각자의 길로 갈라선 친구들은 그들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새삼 느끼며 각자 간직하고 있는 상처들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서로 건드리는 순간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동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조용히 목도한다.
백수린이 포착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면에서는 보편적이고 한 개인의 일생을 붙잡는다는 면에서는 특수한, 잊히지 않는 삶의 어떤 순간이다. '슬프다', '기쁘다' 등의 인상으로 파편화되고 숨고 말았을 그 순간들은 백수린은 집요하게 잡아, 짤막하고 인상적인 서사의 형태(단편소설이라는 형태)로 재구성했다. 그 순간으로 인해 소설 속 주체들은, 그것이 자신을 아무리 뒤흔들어놨더라도 끝내 안고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표제작에서 따오지 않고 작가가 지은 이번 소설집 제목의 키워드인 '봄밤'에 의미를 부여해 보자면, 그것이 주는 색감은 (책의 표지처럼) 뒤늦은 꽃샘추위처럼 서늘하지도, 꽃과 신록처럼 아주 따듯하지도 않은, 그 사이 어딘가의 달빛에 젖은 푸른 색이다. 물론 그들은 말하자면 아픈 기억이고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과거와 현재의 단절을 받아들임으로써 주체는 미래로 걸어갈 수 있다. 백수린은 인간 존재에 서린 어떤 불가능과 결여를 붙들지만 스스로 그것을 붙들어 사유해낼 수 있는 주체의 강인한 온기를, 그 회복력을 담아낸다.
유난히 시리고 아픈 느낌을 주었던 겨울이 끝난 이 시점에, 백수린이 선사하는 것은 말 그대로 '봄밤의 모든 것'이 아닐까. 일상을 어지럽히던 정치적인 이슈들이 해소되었기 때문이든 백수린 덕분이든 이번 봄밤에는 전에는 보이지 않던 소중함이 보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