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린, 『봄밤의 모든 것』
비평을 공부하고 또 시도하려 애쓰는 사람으로서, 짧은 기간이지만 나름의 자책이 있다면.... 글을 충분히 음미하지 못하고 기능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비문학을 읽더라도 이 책이 내 사유와 앞으로 써나갈 비평에 도움이 될지 따지게 되고, 읽은 소설이 좋다면 왜 좋은 것인지, 좋은 걸 넘어서 어떤 사회 정치적 흐름과 연결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판단하게 된다. 물론 소설을 읽고 감상에 젖어 들 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금방 이해타산적인 생각으로 넘어가게 된다. 특히 내가 참여 중인 독서 모임에서 다른 멤버들이 '느낌이 좋은 소설'을 '느낌이 좋아서' 호평한 적이 있는데, 나는 그에 맹렬히 반대 의사를 비쳤다. '저자가 느낌 좋은 것을 노골적으로 노렸고, 또 내세울 것이 그것밖에 없어 보인다.'고 말하며.... 물론 여전히 나라는 독자에게는 그 소설이 싫은 그러한 이유가 충분히 납득할만하다고 생각하지만, 문학인으로서 나의 자세는 얼마나 문학적인지 고민이 될 때가 있다. 또 문학적인 감수성을 잃어버렸나 싶을 때가 있다. 싸패 요즘 들어 좀처럼 좋아하는 작가를 찾지 못하는 것에는 이러한 이유도 있을까. 작년 한 해, 나는 김기태밖에는 찾아내지 못했다....
그렇기에 더욱 백수린은, 그리고 그의 소설 중 「아주 환한 날들」은 내게 아주 각별하게 다가온다. 나는 이 소설을 2022년 김승옥 문학상 수상 작품집에서 처음 접했다. 나는 도마뱀 몇 마리를 기르고 있었는데, 질병으로 인해 두 마리를 떠나보냈다. 긴 싸움이었지만 끝내 막을 수 없었고 나는 상심에 잠겼다. 그로부터 두 달 정도 지나 완전히 정념에서 벗어났다고도, 이제는 극복했다고도 말할 수 없는 애매한 시기에 이 소설을 읽었다. 너무 큰 위로를 받았다. 그게 지금의 나로서는 이 소설에 '면밀히 보기'를 수행하기 어려운 이유이며, 앞으로도 특별한 소설로 기억할 이유이고, 백수린의 단편집『봄밤의 모든 것』을 다루기 전에 이 소설만 따로 할애해 감상적인 후기를 남기는 이유이다. 소설과 소설가에게 감사를 전하기 위해서. 그래서 이 글은, 리뷰라고 제목은 달지만 나름의 분석이나 해설, 비평에 가까웠던 다른 글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개인적인 리뷰다운 글이고 또 짧을 것 같다.
소설은 화자인 할머니가, 이제는 가정을 꾸린 딸의 식구들로부터 앵무새 한 마리를 부탁받는 이야기이다. 작고 부슬부슬하며 개구쟁이인 앵무새와, 기력이 쇠하고 규칙적이며 가능한 변화를 피하려는 할머니라는 우스운 한 짝. 처음엔 애지중지하던 병아리를 치워버린 자신을 원망하던 딸에 대한 기억 때문에 억지로 승낙했지만, 할머니는 점차 앵무새와 보내는 일상에서 기쁨을 느낀다.
지금은 익숙해져 있곤 하지만, 반려동물을 들이는 기쁨이란 그런 것이다. 당연히 불편할 수밖에는 없는 일이다. 내가 오롯이 나에게 투자하던 시간을 다른 존재에게 할애해야 한다는 것은. 부지런해야 하고 섬세해야 하며 각종 정보에 밝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해나갔을 때, 그래서 반려동물이 탈 없이 무럭무럭 크고 또 드물게 나에게 신뢰를 표할 때,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보람과 효능감과 함께 환희를 느낀다(특히나 내가 기르는 파충류는 공감과 소통이 어려워 작은 제스쳐에도 크게 의미 부여를 하게 된다). 이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누릴 수 없는 기쁨이다. 나만이 이 존재의 순간들을 함께하며 이것에게는 나밖에 없다는 기쁨. 화자가 처음의 무뚝뚝한 태도와 달리, 앵무새를 돌려보낸 후 함께 산책하던 천변을 한동안 나가지 못한 것도 그런 기쁨을 알게 됐기 때문일 것이다. 딸과의 관계에서는 관계의 모든 가능성이 두 사람에게 동시에, 예측 불가능성으로 달려있다. 어머니의 행동에 대해 딸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어머니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이고, 심지어는 사소한 행동이 미래에 원망의 이유가 될 수도 있다. 반려동물과의 관계에서는 관계 형성의 주도권이 좀 더 나에게 있다. 동물의 의사와 감정을 무시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되지만 성실하다면 긍정적인 관계를 이룰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나와 반려동물 사이에는 오직 서로뿐이다. 특히나 환경 조성이 교감보다도 중요한 파충류나 어류를 기른다면, 그들에게 주인은 세상 그 자체와 다름없다. "그러고보면 그 시절, 그녀에게는 틀림없이 앵무새가 전부였다. 앵무새에게도 그녀가 전부였고."
그 시절 나에게 닥친 것은 순전히 슬픔이었다. 스트레스를 주지 않기 위해 손 위에 자주 올리지도 않던 아이였다. 그렇게 4년간 쌓은 신뢰를, 싫다는 약을 억지로 먹이고 수술을 받게 하며 허물어뜨렸다. 그렇게라도 살기를 바랐으나, 내가 느낀 것은 그동안의 기쁨들을 전부 덮을지도 모르는 서러움이었다. 그때 나에게 「아주 환한 날들」은 작은 구원처럼 다가왔다. 화자가 수필 쓰기 수업을 한 달 넘게 들으면서도 아무것도 쓰지 못한 것은, 글 쓰는 것이 힘들기보다는 글쓰기에 선행되어야 하는 일이 어렵고 무서웠기 때문이다.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세요." 그녀는 앵무새를 보낸 것이 고통스러우면서도 문장을 쓰기 시작한다. '앵무새가 가버렸다.' 평생을 자기 마음으로부터 도망쳐온 그녀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들은 떠났다. 도마뱀도, 앵무새도. 그러나 어두운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들이 한 구석에 남기고 간 반짝이는 자리가 틀림없이 보일 것이다. 그것이 부재한 지금의 날카로운 슬픔은 그것과 함께한 찬란한 순간들이 정말이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도 종종 슬픔이 찾아오곤 한다. 그래도 나는 대체로 괜찮다. 여전히 반려동물을 기르고 있다. 그들이 주는 기쁨에는 언젠가의 슬픔도 약속되어 있음을 알지만, 그들을 사랑하고 또 그들로부터 사랑받는 일을 멈추기가 힘들다. 모든 관계가 그렇지 않을까. 삶을 공유하는 동안 이별의 가능성은 망각되는 것이 아니다. 훗날의 상실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은, 그 앞에 수 놓일 "아주 환한 날들" 역시 선명함을, 역으로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는 이별의 아픔을 살아낼 용기가 있으며, 그 용기는 그들과의 만남과 동행이 가져다준 것임이 분명하다.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 상실한 이후의 고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되고 마는데 나이를 먹는 일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주 환한 날들」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