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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재 Mar 26. 2024

「오펜하이머」에 대한 회고

「오펜하이머」의 플롯에 대한 고찰과 비평



  사실 내가 이 글을 1차 완성한 것은 2023년 8월 28일, 한참「오펜하이머」가 상영중일 때였다. 그때 극장을 나오며 지인에게 '이건 틀림없이 올해의 영화다.'라고 장담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실제로 이 영화는 81회 골든글러브에서 다수의 상을 받았고 96회 아카데미는 상을 쓸어갔다.「오펜하이머」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장대한 커리어 중에도 최고의 영화들 중 하나로 꼽힐 것이다. (이 정도 영화가 그의 필모그래피 중에선 '최고들 중 하나'인 게 놀라울 뿐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조연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인종차별적인 행동으로 영화에 오점이 남은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뒤늦은 리뷰는 「오펜하이머」에 내가 개인적으로 보내온 찬사들이, 마침내 놀란 감독의 손에 오스카 상이 쥐어짐으로써 증명된 것을 기념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다시 보수, 점검하여 업로드하는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96회 아카데미에서 벌어진 일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님을 덧붙인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오판하고 실수를 저지르는 하나의 인간이고, 내가 찬사를 보내는 쪽은 스크린 속 '루이스 스트로스'와 그를 인물로서 전개되는 영화 그 자체일 뿐이다.




  영화는 크게 칼라로 그려지는 오펜하이머의 맨해튼 프로젝트와 청문회 ‘핵분열’(원자폭탄)과, 흑백으로 그려지는 스트로스 제독의 청문회 ‘핵융합’(수소폭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핵분열이 보여주는 오펜하이머의 인생은 트리니티 실험에서 최고점을 찍고 그의 보안 승인이 거부되는 청문회에서 곤두박질친다. 청문회에서 그가 공격당하는 것은 어느 특정한 지점이 아니라 그의 인생 전반이다. 검사 로저 롭은 집요하고 추잡스럽게 오펜하이머의 인생 전체를 걸고 넘어진다. 이는 오펜하이머의 인생이, 그리고 이를 보여주는 영화 ‘오펜하이머’의 플롯이 원자폭탄의 작동원리와 마찬가지로 연쇄반응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연쇄되는 꼬리들 속에서 결과는 무언가의 원인으로 이어지기에, 어느 한 지점만을 짚을 수 없다. 소재인 원자폭탄과 소재를 다루는 플롯의 구조가 일치하는 흥미로운 구성이다. 영화는 오펜하이머의 일대기를, 즉 연쇄적인 반응들을, 즉 원자폭탄을 보여준다. 원자폭탄의 아버지인 오펜하이머의 인생은 원자폭탄이었다.

  스트로스 제독의 청문회를 다루는 ‘핵융합’ 파트 역시 핵분열 파트가 원자폭탄의 원리를 따른 것처럼 수소폭탄의 원리를 따르고 있다. 수소폭탄의 작동 방식은 1차적으로 핵분열을 일으켜 원자폭탄이 폭발하여, 2차적으로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스트로스의 청문회 ‘핵융합’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오펜하이머의 청문회 ‘핵분열’이다. 단순 통과의례라고 생각했던 청문회는 스트로스가 오펜하이머에게 개인적인 원한으로 가한 복수, 오펜하이머가 겪은 청문회의 전말이 드러나며 스트로스의 장관 임명 실패로 끝난다.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이 서로의 챕터에서 서로를 파멸시키는 구조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펜하이머의 불공정한 청문회를 구성한 것은 스트로스였으며, 스트로스를 거꾸러뜨린 것은 그가 오펜하이머에게 벌인 일들이었다.

  스트로스와 오펜하이머의 관계를 영화를 보는 내내 고민하였다. 영화의 제목이 '오펜하이머'이고 극작품의 모든 곳에 그가 녹아들어가있다. 하지만 스트로스는 어떠한가? 플롯 구조상 두 파트 중 ‘핵융합’의 주연인 스트로스는 제 2의 주인공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 그는 명백히 오펜하이머보다 덜 다뤄지고 덜 중요하게 비춰진다. 그럼에도 그가 주인공의 위상에 있기에 나는 그 이유를 찾으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구조를 영화가 취하는 이유는,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의 대립이 ‘비범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의 대립이기 때문이다. 오펜하이머는 명석한 천재이지만 스트로스는 오펜하이머의 말대로 ‘미천한 구두 판매원’로 시작한 평범한 인간이다. 천재는 범인(凡人)을 깔보고, 범인은 천재에게 열등감을 가진다. 둘은 처음부터 갈등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있다. 이러한 갈등은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이 대화를 나눈 후 아인슈타인이 스트로스를 무시하고 지나가며 심화된다. 열등감에 휩싸인 범인 스트로스는 치밀하고 끈질기게 판을 짜 번뜩이는 천재 오펜하이머를 거꾸러뜨린다.

  두 챕터는 병렬적으로 진행된다. 별개인 듯한 두 청문회는 사실 서로 꼬리를 물고 있고, 재판이 아님에도 재판처럼 임하는 두 사람은 각자가 각자의 원인으로서 파멸로 치닫기에, 시간순이 아니어도 완벽하게 맞물려 들어간다.


  오펜하이머가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과학자들과 자신의 사이를 갈라놨다며 분개하는 스트로스의 이성을 잃은 듯한 모습은 다소 충격적이며 비호감을 자아낸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와 같은 평범한 사람으로서 그를 이해할 수 있다. 아니, 명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주로 오펜하이머보다는 스트로스의 상황에 처해진다. 우리는 종종 돌아가는 거대한 판에서 우리가 소외되었다고 느낀다. 프린스턴에서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이 나눈 대화는 스트로스가 예상한 ‘평범한 스트로스를 향한 두 천재의 험담’ 따위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었으나, 그에겐 그런 대화에 끼어들어 그들이 나눈 대화가 사실 무엇인지를 알게 될 일말의 자격도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가 가질 수 있는 것은 노골적인 조롱들 뿐이다. 그가 오펜하이머의 멸시대로 ‘미천한 구두 판매원’에서 시작해 평생을 노력했음에도 말이다. 그 나이 대에 오펜하이머는 수석에 일가견이 있는 전문가로 강당에서 강연을 하거나 어린 나이에 박사학위를 따고 있었을 것이다.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이 호숫가에 서서 인류의 중대사를 얘기하는 동안 스트로스는 평범한 사람의 위치에 서 그들을 바라본다. 양복과 직함을 벗겨놓아도 아인슈타인은 아인슈타인, 오펜하이머는 오펜하이머이지만 스트로스는 그냥 일개 개인이 된다. 귀하고 무거운 우라늄(핵분열)과 달리 스트로스는 흔하고 가벼운 수소(핵융합)이다.

  하지만 때로는 몇 배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영화 내내 오펜하이머는 (스트로스와 로저 롭, 에드워드 텔러 등에 의해) 그의 모순적인 태도를 지적받는다. 그는 이미 트리니티 실험에서 가젯의 위력을 눈으로 보았고 충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폭탄을 일본에 투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에는 다시 태도를 바꿔 수소폭탄 개발을 저지하려고 애쓴다. 이는 그의 청문회에서도 공격당하는 부분이며 스트로스는 그를 선택적으로 후회하는 인물이라고 비판한다.

  그의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적인 부분으로, ‘대기 연쇄 폭발’의 가능성에 대한 오펜하이머의 뒤바뀌는 태도를 언급하고 싶다. 영화 초반에 동료 물리학자가 언급한, 원자폭탄 폭발 시 대기가 연쇄적으로 폭발해 지구를 뒤엎을 가능성을 오펜하이머는 진지하게 고려한다. 확률은 0에 가깝지만 분명 없는 것이 아니기에 아인슈타인까지 찾아가 조언을 구한다. 그러나 이후 트리니티 실험 장면에서는 그로브스 장군이 대기 폭발의 가능성에 대해 걱정하자 오펜하이머는 0에 가깝다며 그를 안심시키려 한다. 확률은 변하지 않았다. 전에나 그때나 ‘0’에 가깝다. 과학자는 0을 바라보는 시선이 일반적인 대중들과 다르다. 그들은 어떤 현상이나 이론의 가능성에 100 혹은 0을 대입하지 않는다. 가장 널리 알려진 진화론마저 ‘정설일 확률이 매우 높은 이론’이라고 하지 의심의 여지없는 100% 진실이라고 절대 말하지 않는다. 100과 0을 논하는 것은 정치에서 하는 일이다. '확률이 0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그로브스 장군은 그 순간 오펜하이머보다도 학자에 가깝다. 그로브스 장군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당시의 오펜하이머는 변했다. 에드워드 텔러는 트리니티 실험 전에 오펜하이머에게 ‘과학자가 아니라 정치가가 되었다.’고 말한다. 대기 연쇄 폭발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그로브스를 달래는 그 당시의 오펜하이머는 정치가인 것이다. 정치가이기에 0에 가까운 확률을 무시할 수 있고, 종전을 목적으로 일본에 폭탄을 투하할 수 있다. 그는 인생에 걸쳐 과학자와 정치가를 오가는 인물이다. 정치가로서 조국을 위해 수십만을 죽일 수 있지만, 과학자로서 자신이 낳은 무기를 두려워하고 저지른 짓을 후회할 수 있다.

   놀란 감독이 보여주려고 한 것도 이런 지점일 것이다. 스트로스의 ‘선택적으로 후회하는 인물’이라는 비판은 비록 그 맥락속에서는 정당하더라도, 이중적이지 않은 사람이란 불가능하지 않은가? 모순적이지 않은 사람은 없으며 사람이란 자신의 속조차 모를 때가 더 많다. 오펜하이머와 같은 최고의 지성일지라도 말이다.


  그가 견딘 모욕적인 청문회를 함께 겪고 지켜본 아내 키티는 ‘왜 맞서지 않느냐’며 오펜하이머에게 화를 낸다. 이때 오펜하이머의 무력한 태도는 프로이트가 얘기한 마조히즘의 원리가 작동하는 방식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마조히즘은 강력한 죄의식에 의해 발생한다. 자신이 죄를 지었음에도 아무런 벌을 받지 못한, 혹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충분한 벌을 받지 못한 자아는 합당한 벌을 받고 마침내 죄를 씻기를 원한다. 그렇기에 자아가 고통 받고 치욕을 견디기를 원하는 것이다. 오펜하이머에게 청문회에서의 언사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사람들에 대한 속죄의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행동은 밖에서 보기엔 동료 라비박사가 말한 것처럼 ‘순교하려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영화 중간에 누군가가 ‘J. 로버트 오페하이머. J는 무슨 뜻이지?’라는 대사를 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의 J는 ‘줄리어스’였다. 율리우스라면 당연히 카이사르가 연상된다. 카이사르와 오펜하이머는 둘 다 다방면에서 뛰어난 천재였고, 사생활에 문제가 많았으며 (심지어 오펜하이머와 아내 키티의 관계처럼 카이사르는 수많은 유부녀들과 바람을 피웠다고 한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이 사주한 암살자들에 의해 피습당하고, 오펜하이머는 스트로스가 사주하여 판을 깐 청문회에서 파멸을 맞는다.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 장면, 프린스턴의 호숫가에서 오펜하이머가 아인슈타인에게 ‘원자폭탄을 만들 때 얘기했던 핵분열의 연쇄반응을, 우리가 현실로 만든 것 같다.’고 말하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대사이다. (이 장면에서 나는 극장에서 혼자 일어나 기립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연쇄반응은 사실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오펜하이머가 아인슈타인을 만나기도 전에, 맨해튼 프로젝트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과학자 오토 한에 의해 핵분열로 가공할 열과 에너지가 발생함이 밝혀지고, 물리학자 실라르드의 설득으로 아인슈타인이 핵무기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편지를 당시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쓴 시점부터 필연적으로 핵무기의 개발은 촉진되었다. 어느 누군가, 어느 국가가 핵무기 개발에 착수한 이상 다른 국가들 역시 이에 대항할 힘을 가지기 위해 핵무기를 만들 것이다. 시작한 이상 멈출 수 없는, 전체의 멸망을 담보로 하는 소모전이다. 핵무기가 서로 협의 하에 억제력으로서만 작용한다면 모르지만, 인류가 역사적으로 현명했던 적은 손에 꼽는다. 핵무기를 개발하는 모두는 대의와 명분을 앞세웠다. 상대국(나치)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하려고 했다는 것이 정당한 이유가 되는가? 맨해튼 프로젝트를 촉발한 편지에 서명을 한 것은 아인슈타인이고 원자폭탄을 완성시킨 것은 오펜하이머이다. 핵무기의 가능성을 연 실험(핵분열)을 한 것도 과학자 오토 한이었다. 당시 과학계의 권위자이자 한 명의 인간으로서, 프린스턴 호숫가의 두 사람은 깊은 책임을 통감했을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발사된 수많은 핵무기들이 자아낸 비행운으로 수놓아진 하늘의 환영을 보았다.

  두 번째 연쇄반응은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이 대화를 나누는 그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오펜하이머의 일생을 바탕으로 한 그 연쇄반응의 결과로 스트로스는 오펜하이머의 목을 조른다. 그러나 연쇄적인 반응이 의도하는 대로만 흐른다는 보장은 없다. 폭발은 쉬지 않고 이어져 결국은 스트로스 역시 끌어내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일어날 모든 일들을, 영화 시작과 동시에 오펜하이머가 아인슈타인에게 예지한 셈이다.


  그 마지막 대사를 하고 오펜하이머는 눈을 질끈 감는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다고 믿고 주도적으로 원자폭탄 개발에 착수한 것, 전쟁을 막기 위해 일본에 폭탄을 투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과 수소폭탄의 개발을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 더 개인적인 일들로는 진 테트록과의 불륜과 그녀의 자살, 사회주의 사상을 향한 호기심, 천체물리학을 향한 애정을 접고 양자역학을 택한 것까지. 어둡고 피곤한 눈꺼풀에 일생의 후회와 회한이 전부 덮인다.




  깔끔하게 플롯 얘기만 하려고 했는데, 개인적으로 너무 인상적이게 봤던 연출들에 대해 다루지 않고 넘어가기는 아쉬운 것 같다. 딱 두 장면만 언급하려고 한다. 첫 번째는 트리니티 실험에서 ‘가젯’이 폭발하는 순간. 두 번째는 ‘리틀 보이’와 ‘팻 맨’을 투하한 후 오펜하이머가 로스앨러모스에서 연설을 하는 장면이다.

 먼저 트리니티 실험에서 연출은 두 단계로 나뉜다. 가젯이 폭발한 후 섬광만이 번쩍이는 고요한 순간. 그리고 몇 킬로미터 밖에서 폭탄이 폭발한 음파가 바람과 함께 도착해 폭음이 들리고 돌풍에 나무가 꺾이는 장면이다. 저 멀리 폭발과 함께 먼지구름이 치솟고 하늘이 하얗게 번쩍이는 동안, 극장에 앉은 우리의 귀에 들리는 것은 고조된 긴장감 속에서 몰아쉬는 숨소리뿐이다. 그 숨소리는 오펜하이머의 것이다. 혹은 지금은 당신의 것일지도. 그 장면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이 관중들을 오펜하이머의 1인칭 시점에 앉혀놓기 때문이다. 잠시 뒤 들리는 폭발음은 오펜하이머와, 오펜하이머가 된 관중들의 귀와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는다. 놀란이 언제나 CG보다 직접 구현하는 것을 선호하는 건 카메라의 구조가 마치 사람의 눈과 같기 때문이다. 장면을 그대로 구현하여 필름에 담는 것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다. 그는 극장에 앉은 관객이 폭발을 직접 눈으로 보고,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일부 물리학자들만큼 그로 인해 충격을 받기를 원한다. 그렇기에 이 장면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감독의 신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연출이다.

  연설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불편하게 묘사가 되어있다. 카메라는 어딘가 기울어진 앵글로 오펜하이머를 비추며, 연단에 서있는 오펜하이머의 배경은 불쾌하게 움직이고 점등한다. 오펜하이머의 말에 호응하는 관객의 벅찬 웃음소리는 기묘함의 정점을 찍는다. 그 순간에 오펜하이머가 스스로에게 느꼈을 역겨움을 영화는 전달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자책하고 괴롭히듯 ‘폭탄이 일본이 아닌 독일에 떨어졌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는 등의 말을 하고 관객은 동의하듯 환호하며 그의 괴로움을 심화시킨다. 결국 그들이 발 울리는 소리, 웃음소리는 가젯의 폭음과 동일시된다. 




  물리학에 내가 관심이 있는 것과 별개로,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인생이 영화화하기 이전부터 원래도 드라마적인 것과 별개로, 이 영화는 너무도 훌륭하게 만들어졌다.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의 몰락을 두 챕터로 나눈 것과 그것을 병렬적으로 전개한 것은 탁월했으며, 그것들이 각각 자신들이 대표하는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의 성질을 띄고 있다는 설계는 독창적이었다. 그 두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져, 한 이야기의 끝이자 한 이야기의 시작인 호숫가에서의 대화 장면은 방점을 강렬하게 찍는다. 극장에서 두 번 본 것이 후회된다. 세 번 볼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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