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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재 Mar 21. 2024

자크 데리다 빠르게 이해하기

가당찮은 요약정리




  자크 데리다. 이상하기로는 다섯 손에 꼽는 철학자. 그럼에도 그의 사상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현대 철학의 큰 갈래 중 하나인 '후기 구조주의'의 선구자이기 때문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모든 것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기에 구조만 파악하면 전부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구조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후기 구조주의가 탄생하였고, 데리다의 개념들이 후기 구조주의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가 데리다는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구조주의와 대조적으로 '어찌 아는가?' 식의 논리전개를 구사한다. 특히나 '해체'가 유명하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데리다라면 자신의 이론을 '요약정리' 한다는 것에 강하게 반대하리라는 것을. 오해 없이 명시하기 위해서 먼 길을 빙빙 돌거나 때로는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것이 데리다이다. 어렵고 난해하게 쓰는 것이 데리다의 특성인데, 이를 요약해서 정리한다니 말 그대로 가당치도 않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러지 않고서는 이론에 접근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데리다의 생각들이 까다로운데 말이다.

  사실 내가 데리다에 굉장한 전문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에 대해 정리한 서적과 그의 저작을 조금 읽어봤을 뿐이다. 나는 그래도 내가 데리다를 조금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 철학을 공부할 때 넘어야 하는 고비가 데리다이기에 조금 아는 내가 약간이라도 쉽게 풀어서 설명해보고자 한다. 그러다보니 데리다의 본래 개념에서 조금 멀어질 수도 있지만 일단 데리다의 이론에 접촉해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좋겠다.


  데리다를 이해하는데 장벽이 되는 것들 중 하나는 익숙치 않은데다가 본래 의미와 다르게 쓰이는 그만의 개념들이다. 따라서 그 개념들을 키워드로 데리다를 요약해볼 것이다. 사실상 개념에 대한 요점만 알아가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념 키워드에는 볼드체에 따옴표에다가 밑줄까지, 아낌없이 강조했다. 그냥 밑줄 그어진 문장은 핵심적인 설명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데리다라면 당연히 '해체'부터 시작하는 게 옳겠다. 그에 따르면 모든 텍스트는 해체될 수 있고 해체되어야 한다. (이때 텍스트란 모든 저작물, 적혀있는 모든 것들이다.) 이때 해체란 다양한 의도·의미로 해석해본다는 뜻이다.

 데리다 식의 해체하기를 간략하게 예로 보여주겠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김선재(載)'는 성인 '김'에 이름인 '선재'를 더한 것이고, 한자를 소리나는대로 적은 음차이다. 한자 뜻을 풀면 성인 '쇠 금'에 '착할 선'과 '실을 재'를 붙인 것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성인 '김(금)'에는 어떤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이름의 뜻풀이인 '선함을 싣다'에 쇠는 포함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본래 성에는 혈통을 밝히는 용도가 있었으나 지금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으니, 성은 그저 동명이인을 구분하기 위함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혹은 성그 자체의 의미보다는 그것의 쓰임에서 목적을 찾아야 할까? 가령, 성을 붙이거나 붙이지 않는 것 자체로 의미가 발생하는가? "이봐, 김선재"와 "이봐, 선재"에서 발생하는 두 말의 의미의 차이는 무엇인가. 성에는 어떤 의도, 의미가 담기는가. 혹은 반대로, 아무런 의도도 의미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또한 한자 풀이인 '선함을 싣다'는 이름의 주인인 나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과연 이름이 앞으로 내 삶의 형태를 미리 선고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과연 '선함을 싣는다'는 이름의 참된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처럼 이름에 의미가 주어졌을 때 그것이 가지는 무게란 무엇일까? 그런데 사실 '선함을 싣는다'는 말에 엄밀한 목적지는 정해져있지 않으니, 선함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선함을 실고 가버려 제거한다는 의미로 읽힐 수 있지 않은가!

  위의 예로 보듯 해체는 마치 장난과도 같다. 텍스트·언어를 해체하는 것은 일종의 유희인 동시에 전복을 가능케 하는 에너지이다. 정치 권력이나 법에 이러한 해체를 적용시키는 것을 생각해보면 전복의 에너지라는 것이 이해가 될 것이다. '민주'주의라니, 본인이 주인이라고 느끼는 국민이 얼마나 있다고 그런 이름을 사용하는가? 국민들이 정치에 얼마나 참정하고 있는가? 지금 정치제도는 민주주의 본론에서 한참 멀어진 것이 아닌가.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계속 쓸 수 있는가? 바로 이런 식이다. 방금 민주주의의 예시에서 알 수 있듯, 해체는 반성이자 뇌우침이며 깨달음이다. 어찌보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완전무결한 '정의'란 해체를 거쳐야만 달성될 수 있다. 법이나 정당이 스스로에 대한 해체를 중단하고 안주한다면 결코 정의로울 수 없다.

  이때 유의할 것이, 해체할 거리들은 우리가 텍스트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속에 이미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에 가깝다. 해체하는 것은 해체하는 행위자의 힘이 아니라 해체를 미리 내재하고 있는 텍스트의 힘이다.

  그리고 데리다의 이론들은 이미 존재하는 개념에 이러한 해체를 적용하는 것으로 만들어지고 구성된다. 즉 제일 기본이 되는 개념이라고 봐도 되겠다. 




  데리다에게 텍스트란 그것이 지시하는 의미대로 고정되지 않고 이상한 변수들을 가지는 개념이 된다. 데리다가 든 예시인 '쇼핑 목록'을 보자. (쇼핑 목록을 해체해보자) 목록을 작성하는 행위는 미래에 마트에서 장을 보는 자신이 구매할 상품들의 목록을 잊어버릴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잊음을 담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글쓰기는, 기억하는 것에 이로운 약이 되는 동시에 망각을 전제하는 독이다. 그런데 미래에 장을 보는 자신과 쇼핑 목록을 작성하는 지금의 자신이 엄밀히 말해서 동일한 사람일까? 그 사이에 어떤 사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어 내가 180도 다른 사람이 되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장담하는가? 게다가 미래란 기본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것이다. 내가 마트에 가는 길에 사망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내가 작성한 목록을 줍게 되면, 텍스트의 본래 목적이 달성되지 않음은 물론이고 발신인과 수신인이 일치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이런 불일치의 위험은 모든 종류의 글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책이나 인터넷 게시물은 물론이고, 개인적인 용도로 작성한 텍스트들도 다른 누군가 읽을 가능성을 내포하며 그 가능성에는 이처럼 저자가 부재할 경우도 포함된다.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도대체 글쓰기는 누구를 위한 행위인가? 글이 누구든 읽을 가능성을 가진다면, 앞으로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글을 쓰는 것은 미래를 위한 일이고, 글을 쓴 것은 신속하게 과거에 있던 일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글쓰기 행위에 '현재 시점'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현재를 위해 글을 쓰진 않는데다가 글 쓰는 현재는 찰나에 불과하다. 글쓰기에는 과거와 미래만 존재한다. 애초에 현재란 무엇인가?

  어려울 것 없다. 데리다는 오히려 '작성자의 부재를 전제로 할 때 텍스트라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이때 부재란 '작성자가 자신이 쓴 텍스트 안에서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개진하지 않음'과 '작성자의 죽음'을 동시에 의미한다. 어찌 생각해보면 당연한 말이다. 저자가 죽어서 텍스트의 의도를 설명해주지 못하더라도 텍스트는 텍스트여야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텍스트 속에 죽음의 가능성이 서려있다. 내가 죽더라도 쇼핑 목록이 누군가에 의해 읽힐 수 있어야만 그것은 텍스트로 기능할 수 있다. '현재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밑에서 답이 주어질 것이다.


  또한 텍스트에는 언제나 변형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작성자의 의도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전달하는 텍스트란 존재할 수가 없다. 오독의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있으며 작가는 자신의 글에서 벌어지는 오독들을 막을 수가 없다. 심지어 작가 자신도 과거에 자신이 쓴 글을 보고 다른 의미나 가능성을 뒤늦게 발견하기도 한다. 이 역시 엄밀히 따지면 과거 자신에 대한 오독이 아닌가. 또한 오독이 독자가 잘못 읽었기 때문인지, 저자가 잘못 썼기 때문인지 따지는 것도 또다른 문제가 된다. 이처럼 작가조차 자신의 글을 통제할 수 없으며 독자도 마찬가지이다. 즉 읽는 행위는 무조건적으로 작가가 집필할 때의 원래 의도를 벗어나는 행위지만 그게 핵심이며 텍스트란 그런 것이다. 텍스트의 순수함이란 불가능하다. 또한 이런 맥락에서라면 번역도 엄연히 원작과 다른 텍스트가 된다.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 본래 소설과 다른 창작물인 것만큼이나 원서와 번역은 다르다고 봐야 한다.

  이것이 바로 대리보충 개념이다. 읽히는 순간부터 모든 것들은 대리보충당하고 있다. 글이 매순간 오독당하고 변형되는 것은 필연적으로 대리보충당하기 때문이다. 대리보충이란 말 그대로 내가 지금 읽는 것이 내 정신 속에 이미 들어있는 다른 텍스트들(어디서 본 다른 글, 언제 나눴던 대화, 어제 본 영화, 나를 구성하는 지식과 상식 등등)에 의해 보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보충이란 글을 읽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의미들을 덧붙여나감을 뜻한다. 내가 이미 경험한 것들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새 텍스트를 읽을 수 없다. 우리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은 강제로 대리보충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길을 가다가 '계란 한 판 7천원' 이라는 전단지를 보았다. 가난한 자취생인 내 머릿속에는 전단지를 본 순간 계란으로 할 수 있는 간편한 요리들이 스쳐 지나가고, 동시에 싼 값에 먹을 수 있는 다른 요리들과 계란 요리들을 비교하기 시작한다. 계란 한 판 7천원은 비싸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나는 어릴 적 계란 한 판이 삼천원이었던 것을 생각하며 물가가 많이 올랐다고 생각한다.

  예시처럼 '계란 한판 7천원'이라는 전단지는 순간적으로 내가 알고 있는 계란 요리들과 다른 요리들, 내 형편과 지불능력, 예전 계란 한 판의 가격, 나의 간단한 사회경제지식 등으로 대리보충당하고 있다. 이것들은 전부 전단지에 적혀있지 않은 정보들이지만 전단지가 다른 텍스트를 강제적으로 호출한다. '계란 한 판 7천원'이라는 텍스트를 순수하게 그것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그런게 가능한 사람이 있다면 당장 발표하도록. 당신은 철학 역사에 큰 전환점이 될 것이다.

  또한, 텍스트라는게 애초부터 저자의 의도보다 언제나 더 말하거나 덜 말하고 있다. 위의 예시는 자취생이 '계란 한판 7천원'이라는 전단지를 보고 요리나 물가 등을 덧붙여서 '더 말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그 전단지에는 정확한 상품의 품질과 수량(어디서 어떻게 자란 닭인지, 계란이 몇 개 들어있는 것인지)과 계란을 판매하는 마트의 위치가 누락되어 있다. 누군가는 계란이 행복하게 사는 동물복지 닭이 낳은 건지도 알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면 전단지는 '덜 말하'고 있다. 텍스트는 과잉도 부족도 아닌 완전한 상태로는 존재할 수가 없으며 반드시 더 말하거나 덜 말한다. 즉 대리보충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순수하게 자기자신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들은 대리보충당하고 있다. 어찌 보면 모든 것들이 보충하고 보충당하며 '오염'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유는 이것이다. 세상에 단독적으로 떨어진 것이란 없으며 모든 것이 ‘문화’, 더 넓혀서 ‘세계’라는 거대한 컨텍스트(맥락)에 속해있다. 따라서 저자가 원하지 않음에도 그가 생산한 텍스트가 또다른 컨텍스트에 인용당할 수 있다. 모든 것은 맥락에 속하며, 모든 것은 대리보충당하고 있다. 그냥 계란이었으나, 그것은 더 저렴하게 배를 채우고 싶다는 맥락이나 동물복지를 준수해야 한다는 맥락에 속해있다. 그 예시에서 전단지를 본 가난한 자취생이 사실은 대학원생이어서, 후에 경제학과 교수의 자리까지 오른 뒤 자신의 수업에 그때 봤던 계란 한 판의 가격을 물가 변동의 예시로 들지도 모르는 것이다. 텍스트는 어떤 컨텍스트에도 열려있고 인용당하는 것을 스스로 막을 수 없기에 대리보충당하기도 하고 대리보충하는 것에 쓰이기도 한다.




  데리다는 텍스트나 언어가 행위수행적이라고, 즉 말로써 행동한다고 말한다. 말하는 것은 언제나 행동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언어로 쓰여진 모든 것, 텍스트, 문학, 법까지도 포함된다. 또한 말(의미)이란 언제나 하나의 '약속'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약속하지 않으며 말할 수 없으며 매 순간 말로써 무언가 약속한다. 이때 약속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무언가를 하리라고 고정해놓는 것까지 넓게 포괄한다. 러프하게 예를 들자면 어느 직장인의 "피곤하다"는 탄식에는 지금 당장 피곤하다는 것 외에도 당분간 쉬지 못해서 피곤한 상태가 계속되리라는 행동, 예상, 예언, 약속이 내재되어 있다.

  그런데 앞서 얘기했듯, 명확하게 자신의 의미인 텍스트란 존재하지 않는다. 컨텍스트 속에서 대리보충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은 무언가 약속하지만, 말 그 자체는 무언가를 명확하고 확실하게 지시할 수 없다. 가령 직장인이 "피곤하다"라고 말하며 탄식한 것을 그의 동료는 '날 좀 쉬게 해달라, 지금 부여된 일이 너무 많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러한 의미부여는 대리보충과 컨텍스트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다른 동료가 보기에 그의 일은 전혀 많지가 않고 그 동료가 하는 일에 비하면 오히려 여유로운 편이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은 동료는 기분이 불편해졌다. 그로서는 피곤하다는 말을 순수하게 무해한 정보로서 받아들일 수가 없다. "피곤하다"는 말은 '너보다 내가 일이 훨씬 많은데 너가 어찌 나보다 피곤하냐' 라는 말의 수취인의 생각에 의해 대리보충되고, 직장이라는 곳이 직설적으로 말할 수 없기에 언제나 의도를 숨겨 돌려말하게 된다는 컨텍스트 속에서 이해된다. 그렇지만 처음으로 돌아가보면 직장인은 그저 '피곤하다'는 한 마디를 입밖으로 꺼냈을 뿐이다. 어떤 상황의 개선이나 비판도 의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입밖에 내서 어떤 영향력을 이미 획득한 시점에서, 텍스트의 본래 의도를 따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끝도 없는 불일치가 발생한다. '피곤하다'는 말(텍스트)은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이 의미라고도 할 수 없고, 저 의미라고도 할 수 없다. 정확한 의미를 찾는 것은 영원히 지연당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두고 데리다는 '이중구속'에 갇혔다고 표현한다. 이런 상황제시까지 하지 않더라도, 텍스트는 순수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언제나 이중구속에 갇힌다. 또 이중구속은 텍스트가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처럼 어디에서나 발생한다. 말과 그것의 의미는 언제나 영원히 지연되는 것이다. 말의 정확한 의미는 파악되지 못하고 영원히 지연된다. 우리는 영영 '피곤하다'는 말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앞에서 말이란 무언가 약속한다고 하였다. 영원히 지연되는 것은 '약속의 달성'도 마찬가지이다. 앞서 얘기한 쇼핑 목록에서, 그것의 용도는 '구매할 물품을 잊을지도 모르는 미래의 자신의 기억을 일깨우기 위해서'로 약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미래는 모르는 것이다. 내가 급한 일이 생겨 다른 누군가에게 쇼핑 목록을 쥐어주며 장 보기를 부탁하더라도, 텍스트의 수취인은 미래의 자신이 아니기에 약속은 깨진 것이다. 내가 그 목록을 들고 장을 보러 가다가 사고를 당해 사망하고, 그 쇼핑 목록이 내 동생에 의해서 '미래에 대한 인간의 무지와 삶의 허망함'을 주제 삼는 시로 발표된다면, 마찬가지로 약속은 깨어진 것이다. 본래 의도가 지연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애초에 약속이 달성되더라도, 그것을 달성으로 간주할 수 있는지는 또 새로운 문제이다. 법이나 민주주의를 생각해보자. 이상으로서 최고의 법, 최고의 민주주의, 최고로 정의로운 상태란 가능한가? 아니, 현전할 수 없다. 최상의 상태, 달성된 상태라는 개념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최선에는 다음 최선이 있을 뿐이다. 달성에는 그것보다 더 완벽한 달성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실체가 정해져있는 확실한 대상이라고 굳게 믿는 법과 민주주의와 정의조차 실은 언젠가 이루어질 것으로 영원히 지연되고 있다.


  이런 것들, 언젠가 도래할 것들더러 데리다는 괴물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도래할 것들이 어떤 모습으로 도래할지 아무도 알 수 없으며, 당도한 그것은 괴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이때 괴물성이란 단순히 '다르다고 느껴지는 무언가'를 뜻한다. 꼭 괴물같은 모양새를 할 필요는 없다. 장을 보기 위해 쇼핑 목록을 작성한 그 당시의 나에게, 시로서 발표된 쇼핑 목록은 어처구니 없는 괴물성을 지닌다. 혹은 무섭도록 정확하게 자신의 소임을 당하는 쇼핑 목록도 괴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나는 장을 보러 가는 사이에 다른 마실 것을 얻어서, 목록에 썼던 우유는 살 필요가 없어졌다. 그런데 장을 보다가 목록에 적은 '우유'라는 텍스트를 발견하고 무언가 강요받는 느낌, 그럼에도 우유를 사야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쇼핑 목록은 괴물처럼 다가온다.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외국인은 나에게 괴물성을 띤다. 어떤 현대 소설은 전혀 이해할 수 없고 난해하기에 괴물성을 띤다. 1984년의 사람이 2024년의 민주주의를 경험하면 괴물성을 느낄 것이다. 나는 데리다 서적을 처음 읽으며 괴물성을 느꼈다. (뭐 이런 미친 사람이 다있어) 사실 지금도 괴물 같다. 데리다 전공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의미, 가치, 문학, 법이나 사상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엔 익숙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시로서 발표된 쇼핑 목록은 성공적인 현대 시의 형태로 안착할지도 모른다. 앞집 사는 외국인도 결국엔 내 이웃이 될 것이다. 따라서 괴물이 괴물임을 인지한 순간 그것은 괴물이 아니게 되는 이중구속이 발생한다. 괴물성조차 영원히 지연되는 것이다.

  영원한 지연, 이것은 지연인 동시에 차이이다. 달성되지 못하고 끝없이 지연되는 것은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재와 미래, 약속하는 것과 약속이 달성되는 것, 아는 것과 괴물인 것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고 그 차이가 좁혀지는 것은 영원히 지연된다. 데리다는 차이와 지연을 종합하여 디페랑스(차연)이라고 정리했다. 앞집 사는 외국인과 나는 친한 이웃이지만, 또 어느 순간에는 그가 나와는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자랐다는 것을 반증하는 순간들과 마주한다. (우리집 거실에 신발을 신고 들어온다거나) '내가 그 외국인을 완전히 이해하는 순간'이란 영원히 지연된다. 즉 디페랑스이다.




  이쯤에서 데리다의 유령성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지금까지 나온 개념들을 생각해보자. 텍스트에는 알 수 없는 미래를 지시한다는 점에서 죽음이 서려있고, 그것은 대리보충 되고 있다. 모든 것들은 서로 인용하고 있고 이중구속에 갇혀있다. 또한 글쓰기를 포함한 모든 행위에 정확한 의미에서의 '현재'란 존재할 수 없다. 수행되는 그 순간부터 현재였던 것들은 신속하게 과거로 밀려나간다. 다만 현재였다는 흔적만 존재할 뿐이고 우리는 그 흔적만을 붙들 뿐이다. 대리보충도 마찬가지다. 텍스트는 대리보충당하기에 순수할 수가 없지만 우리는 텍스트가 그것 자체로 존재한다, 즉 순수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결코 순수할 수 없기에 우리는 순수성의 흔적만 붙들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유령성이 발생한다. 유령성이란 지연당하는 것들의 흔적을 느끼는 것이다. 어떤 것이 대리보충당하는 순간을 포착할 없다. 현재가 과거가 되는 순간을 포착할 없다. 다만 그것들이 이미 지연되고 나서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고, 그 흔적의 느낌이 바로 유령성이다.

  달리 생각해본다면 유령성은 우리가 느낄 수 없는 것들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준다. 여태 봤듯이 사방으로 미친듯이 날뛰는 '텍스트'라는 개념을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면서도 분열을 느끼지 않는 것은 유령성 덕분이다. 일상에서 쇼핑 목록은 쇼핑 목록일 뿐이다. 우리가 짧은 찰나에 존재할 뿐인 '현재'라는 것에 스스로를 고정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유령성 덕분이다. 그것들을 해체해야만 이중구속과 차연을 느낄 수 있고, 굳이 그러지 않는다면 희미한 유령성만을 느끼고 넘어갈 뿐이다. 심지어는 이중구속과 차연도 유령성으로서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그럴 것이다.

  즉 역설적으로, 유령성이란 '존재한다'고 믿을 수 없는 것들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게끔 해주는 원천이다. 내가 무언가 한마디 말할 때, 그 말이 즉각적으로 청중들에 의해 대리보충됨으로써 오해가 발생하고 그로 인해 내가 비난당하거나, 궁극적으로는  말할 때마다 그런 일이 벌어져 결국 어떤 존재와도 진정으로 소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오싹한 유령성을 느낀다. 하지만 그 대리보충, 오독, 오해가 벌어지는 그 순간은 알지 못하고 다만 흔적만 느낄 수 있으므로, 나는 어쨌거나 일단은 말할 수 있다. 현재가 과거가 되어버리는 순간들을 일일이 느낄 수 있다면 나는 미쳐버릴 것이다. 그저 유령성을 안고서 살아갈 뿐이다.

  유령성은 사실 데리다의 모든 개념들에 서려있다. 그렇다고 데리다를 읽다가 '여기에 유령성이 있다!'고 포착하듯이 말하면 잘못 사용한 것이다. 유령성은 이미 지나간 것의 흔적을 느끼는 것이다. 아는 순간 이미 늦었다. 한참 데리다의 개념을 설명하다가 중간에 불쑥 유령성에 대해 논하는 것도 그 까닭이다.




  다시 텍스트로 돌아가보겠다. 어떤 문학, 어떤 텍스트가 다른 문학과 구분되는 것은 그것이 그것만의 어떤 단독성, 대체불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들은 당연히 자신의 작품에서 그런 단독성을 획득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서 단독성이란 불가능하다. 그것이 정말 단독적으로 존재한다면 누가 그것을 독해할 것인가? 정말 단독적이라면 그것을 쓴 저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어야 한다. 단독성에도 이렇게 이중구속이 존재하는 것이다. 게다가 작품에는 언제나 인용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인용되고 사례가 되는 순간 단독성을 읽어버린다.

  결국 문학작품의 고유한 의미란 지연된다. 그것은 단독성을 가지고자 한다, (아니면 왜 문학을 쓰겠는가) 하지만 단독성은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문학 작품의 목적 중 하나인 '의미의 전달'은 달성된다고 전제 할 수가 없다. 애초에 지연은 문학의 속성이기도 하다. 예로, 제목에 '살인'이 들어가는 소설이라면 우리는 언제 살인이 일어날지 기다리며 소설을 읽는다. 살인은 제목을 읽는 순간부터 지연되고 있는 것이다. 의문들이 곧바로 해소되는 소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문학에서 벌어지는 지연들이 문학을 가치 있게 만든다. 어째서 그런가? 단독성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개념이지만, 우리는 문학 작품을 읽는 동안에라도 단독성이 달성되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즉 문학이란 '불가능한 대체불가능성'이 달성되는 경험이고, 달성할 수 없는 대체불가능성에 대한 욕망이 이루어지는 경험이다. 문학이란 불가능한 것들이 가능해지는 일종의 꿈이자 약물인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시인 이육사의 「절정」에는 '강철로 된 무지개'라는 문학적인 표현이 있다. 이 시가 진정으로 단독성을 획득했다면 우리는 '강철로 된 무지개'가 무슨 의미인지 깨닫지 못해야 한다. 그것은 시과 시인만이 공유하는 비밀이다. 하지만 독자들은 역사적인 배경과 이육사라는 개인의 배경, 그의 다른 시들을 컨텍스트 삼고 대리보충하여 시를 이해한다. 이해된 순간 단독성은 깨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절정」을 단독성을 획득한 위대한 작품이라고 느낀다. 이것이 문학의 힘이다.


  위에서 '약물'이라고 하였다. 글쓰기와 문학은 불가능한 경험을 체험시킨다는 점에서 약물이다. 현재 사회에서 약물, 마약이란 주로 부정적이고 퇴폐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데리다는 약물 개념에도 해체를 수행한다. 지금 약으로 쓰이는 것들은 과거엔 독이었을지도 모르고, 지금 독인 것이 앞으로 약이 될지도 모른다. 예로 모르핀은 사용자에게 쾌락을 주고 강한 중독성을 가지는데, 적절하게 사용하면 환자의 심한 고통을 달래는 약으로 쓰이지만 의존성과 중독성으로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며 과하게 투여하면 사망에 이르는 독이 된다. 그러므로 '약물'의 정의는 이 모든 가능성을 포괄할 수 있도록 더 넓은 의미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데리다는 ‘모든 환상을 보게 하거나 꿈꾸게 하는 것들'을 약물이라고 새롭게 정의한다. 이 관점을 따른다면, 마약은 물론이고 사상, 이념, 연설, 문학도 약물이 될 수 있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 내면서부터 변화를 일으켜 환상을 보고 꿈 꾸게 하지 않는가. 애초에 모든 것에 약물의 가능성이 열린다. 만약 축구 경기를 보는 것이 나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과 꿈을 다시 불러온다면, 축구는 나에게 약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약물은 쓰기에 따라 이롭기도 하지만 독이 될 수 있는 '파르마콘'으로써 다뤄진다. (파르마콘은 플라톤이 사용한 개념으로 약인 동시에 독인 것을 가리킨다) 예로 축구 보는 것에 몰두한 나머지 매일 밤을 지새워 일상을 망친다면 축구라는 파르마콘은 독으로 작용한 것이다. 쇼핑 목록을 작성하는 것은 목록을 잊어 장을 보지 못하는 일을 막기에 이로운 약이다. 그러나 매번 목록을 작성하니 기억할 필요를 못 느껴 목록에만 의존하고 기억력이 감퇴하면 독이 된 것이다.

  문학 (그중 특히 시)은 약물인 동시에 '선물'이다. 그런 꿈과 환상의 체험을 저자가 독자에게 선물한다.  그런데 선물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데리다에 의하면, 선물 역시 '텍스트의 단독성'처럼 영원히 지연되며 달성불가능한 조건이다. 어째서 그런가? 선물은 순수하게 주는 행위로서 받는 이에게만 만족감을 주어야 한다. 주는 이 역시 만족감을 느낀다면 받는 이는 이용당한 것일 뿐, 선물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선물이란 주는 이에게 반드시 나르시시즘적 만족감을 발생시킨다. 예를 들어보자. 그매 겨울마다 목도리를 만들어 지인에게 선물한다. 난로를 쬐며 직접 목도리를 짜는 것과 친구들의 행복함 표정을 보는 것은 그에게도 기쁨이다. 그렇다면 선물을 받는 것은 친구들인가 그인가?

  그러므로 진정한 선물이란 주는 이도 받는 이도 그것이 선물임을 몰라야 하는 것이다. 선물에서도 이중구속이 발생한다.

  문학은 독자에게 저자가 주는 선물처럼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위의 논의에서 본 것처럼 결론적으로 선물로서 문학은 불가능하다. 문학을 읽을수록 독자는 이를 깨닫는다. 어떤 문학 작품의 진정한 의도는 독자로서는 추측할 뿐 결코 알 수 없으며, 저자는 그러거나 말거나 작품을 선사한다는 만족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런 이중구속을 경험하는 것이 문학의 힘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문학을 요청하는 이유이자 계속 나아가게 되는 원동력이 여기에 있다. 문학은 불가능한 선물 받음의 경험을 체험시켜주는 약물이다.




  이쯤에서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소개한 데리다의 모든 개념들, 해체, 대리보충, 이중구속, 디페랑스, 유령성, 파르마콘 등은 어찌 보면 이음동의어의 나열이라는 것이다! 그 자리에 다른 것을 집어넣어도 말이 된다. 그것들은 모두 같은 ‘느낌’을 준다. 데리다의 개념들은 해체를 통해 무언가를 전혀 다른 개념으로 바꾸며 전복시키고, 너머에 유령적인 ‘느낌’을 불러온다. 그렇게 해체하여 사고하는 방식을 키우는 것이 데리다가 자신의 철학을 개진해나가는 이유일 것이고, 데리다가 생각하기에 현대 사회를 살아가며 주체가 가져야 하는 힘일 것이다.

  해체는 세상에 대한 데리다의 대답이기도 하다. 데리다 이전에 주도적이었던 구조주의는 세상과 사회를 구조로서 명료하게 설명하지만, 그 구조에 들어맞지 못하는 개인들에게는 끝없는 분열과 고통을 선사한다. 해체는 이러한 구조의 억압에 맞서, 현대인이 스스로를 긍정하는 방법이자 건강한 문제제기의 방법이다. 누구도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않는다. 완벽한 상태를 추구하지만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완벽이라는 것 자체가 '영원히 지연되고 달성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데리다는 말한다. 고전 철학이 진짜와 가짜를 나눈다면, 데리다는 전부 다 가짜라고 말한다. 완벽에 대한 느낌만 가지고 살아갈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괴로워 할 필요가 없다.


  휴, 이렇게 정리를 마치겠다. 데리다의 핵심은 애초부터 '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란 없다는 것이다. 데리다가 제기한 문제들, 데리다의 철학들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명확하게 체험할 수도 없다. 결국 데리다 철학은 '느낌'으로 귀결된다. 그러니 어려울 수밖에 없다. 보기 쉽게 도표로 정리해볼까? 하지만 데리다의 유령, 데리다가 내 글을 굽어본다는 어떤 '느낌'이 그런 행위까지는 차마 하지 못하게 만든다. 데리다는 영원히 달성되지 않고 지연되는 어떤 '느낌'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확신에 차서 데리다를 설명하는가? 당신은 이미 끔찍한 이중구속에 빠져있다…. 

  위의 이 정신나간 소리를 이해하거나, 혹은 데리다 식으로 해체해버리고 비판할 수 있다면 이 글을 읽은 당신도 데리다를 꽤 알게 된 것이라고 본다. 어려운 헛소리를 여기까지 읽느라, 참으로 수고가 많은 여러분에게도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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