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자신의 이름으로 살고 싶은 모든 이에게
11월 말의 아침.
파리의 거리는 하루가 다르게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화려하게 변하기 시작했고 거리에는 차가움과 따뜻함이 동시에 묻어나 묘한 셀렘을 주는 분위기로 가득했다.
흐린 하늘 아래, 파리시청 앞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줄 서고 있었다. 돌바닥은 밤새 내린 비로 반짝였고 지현과 민호는 두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은 채 나란히 서있다.
민호가 하품을 하다 지현을 바라보며 말한다.
"뭐 막상 오니 기분이 좀 이상하네. 세상에 우리처럼 이혼하고 다시 이런 계약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지현은 시청 문 안으로 들어서며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우리 인생은 우리가 결정하는 거지. 꼭 누가 먼저 해야지 하나?"
시청 안으로 들어가자 따뜻한 공기가 추위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Bonjour. Vous êtes venus pour le PACS?" (안녕하세요. PACS 계약 때문에 오셨나요?)
지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Oui. On a un rendez-vous à 10h. (네. 저희는 10시에 약속을 잡았어요.)
직원은 미소 지으며 두 사람의 서류를 받았다.
민호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결혼할 때는 결혼식장이며 드레스며 별난 게 참 많았는데 팍스는 심플하네."
지현은 창밖을 바라보며 그동안의 기억이 스친다. 축복 속에서 시작할 것만 같은 결혼이 정작 두 사람을 멀어지게 하고 있었다는 걸.
"이번엔 아무도 없어도 돼. 이건 축복받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다시 시작하는 거니까."
시청직원이 두 사람을 작은 상담실로 안내했다.
책상 위에는 PACS 계약서가 얆은 종이 두 장으로 놓여있다.
민호는 그걸 보고 중얼거렸다.
"이게.. 다야?"
지현이 웃으며 대답한다.
"응. 결혼보다 훨씬 간편하지?"
직원은 계약서 문구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 서명하시면 됩니다. 두 분이 서로 파트너로 인정하고, 재산과 생활에 대한 기본 규칙에 동의한다는 내용이에요."
지현은 펜을 들었다. 서류에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적는 순간, 알 수 없는 떨림이 느껴진다.
민호도 옆에서 천천히 서명했다.
직원이 일어나며 말했다.
"Félicitation. Vous êtes désormais pacsés." (축하합니다. 이제 두 분은 PACS 관계가 되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민호와 지현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결혼식도 없었고,
반지 교환도 없었고,
축하해 주는 가족도, 지인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둘 사이에 아주 조용한 온기가 흘렀다.
민호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혼 도장 찍을 때 보다 할만하네. 김지현 씨 저의 동거인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현이 코웃음을 뱉으며 대답한다.
"이민호 씨, 남편에서 다시 나의 남자친구가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민호가 지현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장난 섞인 말투로 말했다.
"가자. 오늘 파리에서 PACS 시작한 날인데 우리의 기념일을 위해 크로와상으로 파티해야지."
둘은 가볍게 시청 계단을 걸어 내려가며 파리 거리로 걸어 나갔다.
차갑고 반짝이는 공기 속에서,
완벽한 끝맺음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 펼쳐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