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스(PACS) 제 1화 - 균열

나의 심장 어딘가에 균열이 생겼다.

by Loa

서울, 아침 6시.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지현의 눈이 떠졌다.

아직 창문 밖은 어둑하고,

아침으로 깨어나기 전의 적막한 고요가 집안을 가득 메운다.

지현은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머리를 하나로 묶고 운동복을 챙겨 입는다.

차가운 새벽 공기는 코 끝을 간지럽히며 지현의 하루 시작에 즐거운 긴장감을 준다.


헬스장에 도착하자 트레이너가 미소로 지현에게 손을 흔든다.

"지현 님, 오늘도 출석 성공이시네요! 이제 바쁜 시즌이라 하지 않으셨어요?"


지현이 러닝머신 위로 올라가며 웃는다.

"네. 이제 곧 감사시즌 시작이라 얼마 못 나올 수도 있어요. 미리 근육 적립해야죠"


트레이너는 수건을 목에 걸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 회계사님, 그때 말하신 그 '감사지옥'에 들어가는 건가요? 그동안 매일 나오셨으니 지옥에서도 빠져나올 체력은 되실 겁니다!“


지현이 이어폰을 끼며 웃으며 대답한다.

"네, 말씀 감사합니다."


러닝머신의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새벽의 고요를 천천히 밀어낸다.

운동을 마칠 즈음, 헬스장 창밖의 하늘은 옅은 분홍빛으로 바뀌고 있다.

천천히 번지는 서울의 아침을 한 번 바라본 뒤 지현은 다시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남편 민호가 신발을 신고 있다.

"어, 지현아 왔어?"


"응, 이제 출근준비 해야지. 지금 나가는 거야?"


"어어, 우리 글로벌 서버가 새벽에 다운됐대. 긴급 패치 들어가야 해서 먼저 나갈게."


현관문 밖으로 향하던 민호가 다시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며 속삭이듯 말한다.

"아, 지현아, 나 예약 성공했어."


지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예약?"


"네가 가고 싶다던 그 2주년 결혼기념일 레스토랑! 줄 서도 못 들어간다는 곳!"


지현이가 민호를 보고 씩 웃는다.

"역시 우리 미농이가 최고네. 주말 저녁으로 예약한 거 맞지?"


"그럼! 내가 누군데. 아, 그리고.. 오늘 저녁 아버지 생신 식사 잊지 않고 있지? 여의도니까 바로 오면 돼."


"오케이! 저녁에 봐."


지현은 간단히 씻고 정장을 갖춰 입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

하루가 시작되는 흐름 속으로 자연스럽게 발을 들였다.


여의도 출근길.

지하철 9호선에서 내리자 여의도만의 차가운 긴장감이 느껴진다.

바쁜 걸음, 컵홀더에 꽂힌 아메리카노, 핸드폰 통화로 업무 일정을 조율하는 목소리들,

지현은 도시의 아침 공기를 한 모금 깊게 들이마신 뒤,

익숙한 빌딩 숲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사무실 문을 열자 동료 은지가 의자를 돌려 지현을 바라본다.

"언니 그거 들었어요? 파트너 승진자! 박민경 이사님 파트너 되셨대."


지현이 대답한다.

"그럼 Big4(4대 회계법인) 중 최초 여성 파트너 아니야?"


뒤에서 현재가 고개를 불쑥 내밀고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근데 진짜 독해. 고객사랑 있을 때 소주병에 빨 때 꽂아서 코로 술 마신다는 소문 못 들었어?"


셋 다 웃음을 터뜨렸다.


은지가 말했다.

"근데 언니도 슬슬 파트너 트랙 들어갈 거 같은데? 시니어 매니저 중에 이번에 후보자 교육 들어간대. 심지어 시애틀에서!"


재훈이 커피 잔을 들며 말한다.

"아, 나도 시애틀 가보고 싶다. 시애틀에서 마시는 커피 맛은 다르겠지?"


지현은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지현이 컴퓨터를 켜자. 메일 알림 하나가 보인다.

[제목 : OO기업 CFO포지션 최종결과 안내]


지현은 숨을 멈추고 클릭했다.

[김지현 님의 최종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지현은 천천히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됐다. 진짜... 됐다."

지현은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벅차올랐다.

그동안 쏟아부은 노력들이 한 방향으로 모여 빛을 만드는 순간처럼 느껴졌다.


지현의 심장은 한동안 잔잔한 파동으로 흔들렸다.

그 감정이 완전히 가라앉기도 전에

회의와 전화, 보고서가 차례로 밀려왔다.

지현은 오늘의 기쁨을 가족들과 온전히 누리기로 한다.

조용히 숨을 고르고 오전 회의 자료를 집어 들고 회의실로 향했다.



저녁 7시, 여의도 근처의 한정식집.


가족식사를 위한 작은 프라이빗 룸에는 따뜻한 조명과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반찬들이 놓여있다.


"아버님, 생신 축하드려요."

지현이 손수 준비한 선물을 내민다.


"우리 며느리, 고맙구나. 바쁘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시간 내어 함께 식사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 “

아버지는 행복한 듯 가족들 얼굴을 빙 둘러본다.


민호가 눈빛으로 신호를 보낸다.

“이제 말해!”


지현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말했다.

"그리고... 좋은 소식이 하나 있어요."


그 말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본다.

기대감이 가득한 눈빛.

마치 오래 기다려온 답을 듣는 사람처럼.


아버지는 미소를 띠며 물었다.

"좋은 소식? 그래, 어떤 소식인데?"

어머니도 환하게 웃었다.


지현은 기쁨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OO기업 CFO 포지션에 최종 합격했어요. 다음 달부터 새로운 회사에서 임원으로 일할 것 같아요!"


순간, 테이블 위 공기가 멈췄다.

어머니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고,

아버지 역시 미소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어머니가 가장 먼저 말했다.

"아... 그래? 정말 잘 된 일이구나. 축하해야겠네."


"우리 며느리에게 정말 잘 된 일이긴 한데 말이야... “


아버지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제 결혼한 지도 꽤 됐는데 가정도 조금씩 생각해야 하지 않겠니..?"


지현의 미소가 아주 조용히 흔들렸다.


어머니가 부드럽게 말을 덧붙였다.

"아니, 아버님의 말은 지금도 바쁜데 너무 큰일만 맡으면 몸이 상하지 않을까 해서 그래."


직접적으로 표현하시진 않았지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했다.


이제는 아이를 생각할 때다.

너무 일만 앞세우지 마라.


민호가 서둘러 말했다.

"아버지, 지현이 정말 많이 노력했어요. 이번 기회가 얼마나 힘들게 온 건데."


"그건 알지."

아버지가 말을 잘랐다.

"하지만 가족일에도 다 때가 있는 법이야. 여자가 너무 일에 올인하면 가족의 중요한 시기를 놓치는 것도 순식간이야."


테이블 위에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지현은 억지로 미소를 잃지 않으려 했지만 속에서는 작은 금이 스르륵 생겨나는 느낌이 들었다.


식사가 끝난 뒤

지현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무거워졌다.

기쁜 하루였지만,

어딘가 선명하지 않은 감정이 가슴 한쪽에 남았다.


민호가 조용히 차 문을 열어주었고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집을 향해 달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 안은 조용했다.


민호가 운전대를 잡고 말을 꺼내려다가 다시 삼키는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지현아.. 아까 그건 그냥 부모님 입장에서.."

"알아."

지현이 빠르게 말을 끊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밤공기처럼 차갑게 떨렸다.


지현은 창밖을 바라봤다.

가로등 불빛이 차창을 스쳐 지나가며 규칙적으로 지현의 얼굴을 비추고 사라졌다.


"근데.. 오늘 만큼은 그냥 잘했다 한마디 듣고 싶었어."


민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을 감고 있던 지현은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는 듯 묻는다.

"오늘.. 며칠이지?"

그리고 휴대폰을 들어 달력 앱을 열어 날짜를 확인했다.


그 순간,

지현의 심장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하자 지현이 말했다.

“먼저 올라가 있어. 나 잠깐 편의점 좀 다녀올게.”


집 근처 편의점에 도착한 지현은 조용히 생리대가 진열된 매대로 향했다.

그 아래쪽, 눈에 잘 띄지 않는 위치에

작고 하얀 상자들이 정렬돼 있었다.


‘임신 테스트기.’


하얀 패키지에 적힌 그 단어가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


지현은 손을 뻗어

상자를 하나 집었다.

포장지의 비닐이

살짝 삭삭거리는 소리를 냈다.


갑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

작은 떨림이 밀려왔다.


집으로 돌아온 지현은

욕실 문을 닫고

테스트기를 꺼냈다.


심호흡을 하고,

조용히 기다렸다.


하얀 스틱 위에

색이 번지기 시작했다.


한 줄.

그리고 천천히—

또 한 줄.


두 줄.


지현은

기쁨인지 혼란인지,

어딘가 뜨거운 감정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 걸 느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한꺼번에 가슴 깊은 곳에서 일렁였다.

기쁨과 두려움, 설렘과 슬픔이 서로의 경계를 잃고

하나의 커다란 파도처럼 그녀를 덮쳐왔다.


서로 다른 감정들이 한순간에 뒤섞이며

지현의 심장 어딘가에

아주 조용한 균열이 생겼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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