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지 않은 길에 서다.
은은한 조명이 깔린 병원 초음파실
의사는 젤을 바르며 화면을 조정했고,
모니터에는 흐릿한 회색 덩어리가 서서히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여기 보이시죠?
아기가… 아주 잘 자라고 있어요.”
순간,
방 안을 가르는 선명한 소리가 들렸다.
두근. 두근. 두근.
짧고 규칙적인,
그 작은 심장이 뛰는 소리.
누군가의 삶이 지현의 몸 안에서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 한쪽에서 작고 따스한 불빛이 켜지는 것과 같았다.
민호는 놀란 듯 화면을 보다가
입가에 조심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는 어색하면서도 진심이었다.
지현은 화면 속 조그마한 심장 박동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의사를 향해 물었다.
“저…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안정기라는 게 있다고 들었는데… 언제까지를 안정기라고 하는 건가요?
임신 초기에는… 유산하는 경우도 있다고 해서요.”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계 위로 젤을 조금 더 발라 초음파 프로브를 움직였다.
“네, 그런 걱정 많이 하세요.
지금은 임신 초기라 아무래도 불안할 수 있죠.
보통 임신 12주—그러니까 첫 삼 개월이 지나면
유산 위험이 크게 줄어서 안정기라고 부르긴 합니다.”
화면 속 작은 심장 박동이
규칙적으로 깜빡였다.
의사는 조금 더 따뜻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초음파상으로 아기 심장 잘 뛰고 있고
지금까지는 아주 건강하게 자라고 있어요.”
초음파실 문을 열고 나오자
병원 복도는 낮은 조명 아래 고요하게 펼쳐져 있었다.
지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긴 숨을 내쉬었다.
민호가 옆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지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그맣게 말했다.
“아기 심장 소리… 생각보다 강하더라. 신기하네.”
민호는 잠시 말없이 지현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우리…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지현이 민호를 바라보며 손을 꼭 잡는다.
"그럼. 당연히 잘할 수 있지."
그리고 불현듯 무엇이 생각난 듯 지현이 민호에게 말했다.
"아... 민호야, 오늘 여유롭게 같이 점심 먹고 싶었는데,
오후에 고객사 미팅 있어서 서둘러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얼른 가봐. 나도 회사 가기 전에 잠깐 들를 데가 있어서 가볼게.
지현은 성급히 자리를 떠난다.
“그럼, 저녁에 봐!"
병원 근처 서점.
민호는 근처 서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출산 준비 책, 초보 아빠를 위한 가이드,
임신 출산에 대한 책을 천천히 고르며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딸일까..? 아들일까?.. ‘
부모님께는 안정기 이후에 말씀드리는 게 낫겠지?'
서점에서 구매한 책이 담긴 종이봉투를 들고
민호는 사무실로 들어섰다.
점심을 마치고 돌아온 민호의 동료 정우가 커피잔을 들고 민호에게 다가온다.
"어? 민호, 너 오늘 오전 반차 썼다며? 무슨 일 있었어?"
민호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임신출산 책을 꺼내 흔들며 자신의 책상으로 향한다.
"나, 내년에 아빠 된다."
정우가 민호 뒤를 따라가다가 팔로 민호의 어깨를 감싸며 말한다.
"이야, 너! 축하한다.
뭐야, 그럼 오전에 재수 씨랑 산부인과 다녀온 거야? 몇 주래?"
"야야, 커피 조심. 벌써 10주래. 이제 2주만 지나면 안정기라네."
"아, 그럼 어디 보자. 지금이 11월 중순이니까... 내년 여름쯤 나오겠구나. 육아동지가 된 것을 환영한다."
민호가 자리에 앉아 자신의 노트북을 켜며 말한다.
"역시 경력자는 다르군.
아 근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우는 민호 옆에 걸터앉아 대답한다.
"경력자로서 말하는데, 아빠가 된다는 건 책이 아니라 실전이다."
민호가 마우스를 움직이다 멈추고 정우를 바라보며 묻는다.
"아, 맞다. 너 지아 출산했을 때, 육아휴직 얼마나 썼었지? 예전에 인사팀에서 말하는 거 보니까,
우리 회사 그래도 외국계라 남자 육아휴직제도 좋았던 거 같은데."
정우가 민호를 잠시 바라보다,
민호 옆자리에 있는 의자를 끌고 와 가까이 앉은 후 민호에게 속삭이듯 말한다.
"내가 말했지. 아빠가 된다는 건 책이 아니라 실전이라고. 우리 육아휴직제도 인사팀 홍보용이지. 실제로 쓰는 사람 몇 안돼. 옆팀 태형님 봐봐. 승진은 물 건너가는 거야."
그리고 정우가 이어 말한다.
"이민호, 너 그리고 정신 똑바로 차려라. 지금이야 재수 씨가 전문직에 돈도 잘 벌고 막 날아다니지.
아이 낳잖아? 이게 우리나라 여성분들이 그런 전문직 커리어 이어 나가는 게 쉽지 않아요."
민호가 키보드를 두드리며 대답한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우리 회사만 봐도 주변에 맞벌이하는 부부들 많더만.“
정우가 천천히 의자를 등 뒤로 기대며 말했다.
"그래 초반엔 내 주변 동기들 양가 도움 받아서 어떻게든 맞벌이로 계속 버티더라고,
근데 애들 초등학교 입학하잖아? 이게 또 그때 가면 굉장히 어려워져요."
민호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정우를 바라본다.
그런 민호를 살짝 보다가 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한다.
"지금 네가 봐야 할 건, 임신출산 서적이 아니고 이거다. 깨톡으로 보낸다. 나 간다."
책상 위에 있던 민호의 핸드폰 진동음이 울린다.
그리고 민호가 확인을 하자 한 스크린샷 이미지가 채팅 창에 올라와 있다.
민호가 제목을 천천히 읽는다.
"프랑스 본사 디지털 전략팀 HIPO(High Potential Program) 지원자 모집?"
여의도 근처 한 카페,
지현은 바로 회사에 가지 않고
근처 카페에 들어왔다.
카운터로 다가가던 지현은 습관처럼 빠르게 말했다.
"아메리카노.. 하나-"
말끝이 무너졌다.
지현은 자신도 모르게 배에 손을 살짝 올린 후 다시 말했다.
"아, 아니요. 혹시 카페인 안 들어간 차 있나요?"
카페 직원이 웃으며 대답한다.
"그럼 루이보스 티로 드릴까요?"
"네.. 그걸로 주세요."
지현은 창가 쪽 빈자리에 앉아 코트를 벗고 천천히 의자를 당겼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한다.
지현은 휴대폰 화면을 켰다.
CFO 포지션 담당자 – 최종 제안서
문자를 지그시 본다.
지현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담당자의 번호를 눌렀다.
“네… 안녕하세요.
생각을 많이 해봤는데요…
이번 제안은 수락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
전화를 끊고 난 뒤
지현은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감사시즌이 4월에 끝나니까.. 육아휴직은 이쯤에 들어갈 수 있고..'
잠시 고개를 숙인 채 멈춰 있던 지현은, 마음을 정리하듯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익숙한 거리의 발걸음이 낯설게 느껴진다.
확신이 있었던 미래는 사라지고
앞으로 펼쳐질 여정은 마치 안개가 자욱한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