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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경용 Oct 22. 2024

"오빠창꽃 따줘~

세 살에 하늘로 올라간 여동생~

제목의 "오빠창 따줘~"는

유언이 되어버린 64년생 여동생 ~

 추억으로 남았고

나와 처음 만났을 때 가장 행복한 웃음을 지으면서

나를 사랑해 주었던 첫말이고

마지막말이 된다~

이 말은 내 눈물이고 동생의 눈물이고

배 아파 낳으셨던 울 엄마 눈물을 삼베적삼옷고름으로 훔치시던 눈물이 되고야 말았다~

몇 줄 못 나간 내 말이 슬프다

마음이 저려온다

 올해 나이 예순한살 어린애가 나를 따랐다

아니 내가 동생을 따라다닌다

66년 봄에도

뒷산깃대봉자락에는 진달래가 많이도 피었나 보다

아버지가 맨손으로 땅을 파고서 일구시던 땅이 아니라 산을 파셨던  그 밭옆으로 걸어가는 내내

창꽃이라고 하면 진달래꽃을 우리는 그때는 그렇게 불렀다

동생의 고사리 같은 손을 좀 더 컸던 내손이 지긋이 잡아준다

"그래 가자~"

그 말 한마디씩이 그날의대화가  되었고

지금껏 그 말만을 되풀이하는 동생이

가끔씩 찾아든다  

분명 그날 진달래는 따주었는데도

자꾸자꾸 졸라대는 동생의 모습은 없다

희미하게라도 있다면 몽타주처럼 그려낼 수도 있겠다 싶지만 모습은 까맣게 보이는데

하얀 소복을 했다

밤새 손바느질로 지으시던 동생의 수의는 새벽녘에야 끝을 보았고~

"아가 할아버지 모시고 오니라"

나에게 말씀하시던 엄마의 말씀에 단호함이 보였다

낳은 자식 이제갓 시살인데 죽었다

삶과 죽음의 엄정한 경계 앞에서 연하고도 단호한 모습으로 마주하엄마 앞에서 동생은 그렇게 내 곁을

떠났다

내가 따준 창꽃을 잠자는 내내 손에서 놓지 않으려고

뒤척이는 순간에도 꽉 쥐고 있었다

그때는 진달래밖에는 없었던 것 같다ㅡ이글에는진달래와 창꽃이 섞여져 있다 어쩔수가 없다 기억되는 동생의 말은 분명 "오빠 창꽃따줘"

였다 지금생각하면 어찌 그리 야발시럽게 말도

잘했는지 의아하다

그리고 너무 아깝다

만2년의 동생의 일생이 추억이 왜 이거밖에는 없냐고

"오빠 창꽃 따줘"

봄에피는 창꽃이 꼴보기가 싫다

창꽃 피지 말았으면 했다

그런 내마음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내가따준 창꽃을 들고

요즘내가 걷고 달려보려는

그길가에서 시시때때로 마중나와있다

내가 보고싶다고 하지않아도~

어른이 되어서 왔으면 좋을것도 같다

기억으로만 오는 사람이다

아직어른이 안된 동생이 가여워도

보내야한다

"가그라 좋은세상으로~그리고 아프지말그라~"

할수있는 말이 그거밖에 없음도 슬픈 세살의 이별이기 때문일것이다

그때 깃대봉자락에는 창꽃이 흐드러지게도 피던해였다고 기억하고싶다

그러고는 다른 꽃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아니다~우리집 몇 개의 장독들이 어울려서 있던 자리 앞에는

분명 칸나가 있었다 키 큰 칸나옆으로 올망졸망한 이쁜 꽃들이 울 엄마처럼 보인다

울 엄마 칸나바보였다

언제나 칸나가 우리 집장독대를 장식하고

장독대 제일 큰 항아리 위에는 정화수 한 그릇이 아침마다 비벼대는 엄마의 손을 만났다

엄마의 기도는 손이었고 정화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화수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지만~

박하잎 찧어 작은 병에 넣어 보리를 떼 얼굴로 덤벼드는  깔따구를 몰아내는 특효약은  필수품이 되었다 그 박하잎도 우리 집장독대의 식구가 되었었다

"할아버지 엄마가 오시래요~"

얼마 전에 홍역이 동생을 침범했다

그때는 홍역으로 죽은애들이 한집건너 한집이 있었으니 지금의 홍역과는 격이 다른지 모른다

의학의 발달이 오늘을 만들어 요즘은 홍역 병도 아니다~

그때는 낳은 지 근삼연간은 호적도 없고 이름도거의 없다

납실이라는 이름이 갑자기 기억난다

아니 언제부터인가 어릴 때부터 입력된 이름은

아마도 나보다 세 살 아래 여동생일 것이다

물어보면 금방 알 텐데 물어보지 못한다

혹시 이동생이 납실일까?

이쁜 이름인데 요즘 그런 이름 한 번도 못 들었다

납실~~

항상 쓰면은 엇나가는 나의 글은 천방지축이다

그것이 나의 결정적 단서이면서도

나만의 장점으로 늘 다듬어나가는 작업이 나의 삶의

과정이다

서호리 깃재 고개를 오십여 미터 남겨둔 오른쪽

길에서 십여 미터 잔솔나무가 듬성듬성 서있는 곳

에 세워진 짚으로 엮어진 초분은 동생의 집이다

바작을 얹은 지게는 소복을 입은 동생의 상여였다

바작에 누인 하얀 소복의 세살배기 어린동생의

마지막 길을 할아버지가 지고가시는 지게가 함께 갔다 그리고는 항아리에 세워 넣고 볏짚으로 엮은 삿갓을 씌우므로 동생의 장례는 끝이났다

키만 한 항아리에 서있을 동생이 슬프게 달려왔다

"오빠창꽃 따줘~"

한동안 그렇게 항아리 안에서 짚으로 감싸진 집에서

서있어야 했다 그리고는 살들의 수분이 빠져나가고 난 자리에는 육신을 받치던 기둥 같았던 여리디 여린 뼈들이 이제 앉을 시간을 만든다

이제야서 있던 동생이 앉았다

"힘들었지"

학교가 파하고 나는 인사처럼 동생을 만나러 다녔다

지금 같았으면 진달래가 아니라도  꽃을 들고 라도 갔을 터인데 ~

뻐꾹새가 울고 호방새가 딱딱딱 나무를 구멍 내던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동생은 그렇게

살과 피를 말리는 기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것을 낙근이라고 했다

그렇게 낙근 된 뼈들은 일구던 우리 밭 옆길 한가운데에 아버지와 나의 손으로 묻어줌으로

모든 절차를 마무리하고 정확하지는 않지만 근방을 지나갈 때에는 어김없이 생각으로 만나

하늘에서는 아파하지 말고 잘 있어~ 말을 하고 지나간다

"상천아~누가 네 동생 초분에 돌을 던져 갖고 항아리가 깨져서 흑헌 옷이 보여브러야~~"

재너머 친구가 나에게 일러주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눈물이 났다 울분이 솟았다

흑헌 옷이 보여분다는 말을 듣는 순간

동생의 귀한 육신이 보호받지 못했음에 서러웠다

지키지 못했던 여린 주검이 세상의 친구들에게

적나라하게 돌멩이라는 도구로 무참하게도

훼손되는 수모 앞에서  내가 참아야 되는 명분은 손톱만큼도 없었고 처절한 복수만이 철저한 응징의

방법만을 생각하느라 잠도 설쳤다

동생을 때렸다는데 참을 수는 절대로 없었다 하물며 죽은 동생을 때렸다니 원통하고 분했다

저절로 주먹이 쥐어지는 분개함이 온몸을 다스리니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다음날 나는 학교의 주번이었다

오 학년에 주번을 했다는 게 지금도 사실일까?를 의심해 보지만 동생 세 살 때 하늘 간 건 사실이니 맞을 것이다

일곱 갠가 여덟 개의 계단 아래 동생의 몸을 훼손하고 돌멩이를 던진 1년 후배가 등교한다

마지막 올라오는 두 번째 계단이 나의 응징장소였다

나는 발로 차고 주먹으로 치고 넘어뜨렸다

넘어진 그놈의 얼굴에 뜨거운 내 눈물이 떨어졌다

"왜 우리 동생초분을 깼어!" "이 개 **야!!!"

말리는 주번들이 없었다면 그놈은 그날 죽었을 것이다

사실 죽이고 싶었으니까~

58년 지난 지금은 후배한테 미안한 마음 전한다

"홍역에는 토끼똥과 가재가 특효라고 해야~"

엄마가 내게 명령처럼 말했다

그 말을 들어야만 했던 긴박함을 어린 나도

알았다 화롯불처럼 달궈진 동생의 부은 얼굴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한계를 보았다

가잿샘으로 갔다

그날따라 가재가 한 마리도 없다

잡아서 내놓으면 그것으로 동생에게 약을 먹이는 엄마가 일말의 희망의 끈이라도 잡으실 텐데

실망스러운 엄마의 표정이 싫었다

마냥 뛰어 깃대봉으로 달렸다

깃대봉은 나의 놀이터나 다름이 없었다

우리 집이 가장 가깝게 있었다

본동네와는 가장 멀리 떨어진 우망매 거기에 우리 집이 있었다

그래서 매봉이라고도 하는 깃대봉이 가장 가깝다

한달음에 올라가서 창포바다 푸른 물에 원고지를 외쳤던 곳이다

외삼촌의 열네 살에는 그곳 꼭대기에서

인민군을 퇴치하는 미군 비행기에 하얀 천을 흔들어

대던 곳이기도 하다

토끼를 찾았다

아니다

토끼는 아니고

똥이다

똥이 약으로 인식되든 시상에 있었다

불과 육십 년 전에 말이다

없다 토끼가 분명히 살고 있고

토끼몰이도 했다고 기억된다

똥이 없으니 약을 해줄 수 없다

찾아 나섰던 내가 미안했다

엄마의 얼굴에서 실망을 보이지 않으려는

강직함을 내게 들키고 만다

이것 보통 슬픈 일 아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나를 차라리

엄마의 간곡한 부탁을 이행하지 못한 나를

차라리 혼내셨더라면 혼난 기억 속에서  동생의 죽음으로 인해서 슬퍼진 어린 내 마음은 비밀처럼 숨어서 밖으로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을 터인데

엄마는 그래도 괜찮다를 대답하신다

올해 한갑인 나의 여동생이 인제는

진달래꽃으로 올봄에도 동생의 초분에 찾아들었다

잊히려야 잊히지 않는 기억 속에만  있는 동생이

나를 맞아줄 시간들이 다가오는 때에 즈음한

나의 끄적거림에는 브런치의 글쓰기 때문이다

발행을 엄두 내지 못하는 편안함과 환갑의 나이의 하늘에 살고 있는 동생에게 더 아름다운 진달래를 따주고 싶은 칠순의 오빠가 만나는 장이 되어주심에 무한감사드리며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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