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어떻게 살지?

우리는 서로에게 악역이다.

by 범람



우리는 서로에게 악역이다.


단란하고도 구질구질했던 우리 가족은 곧 큰 변화를 맞이한다. 아빠가 교통사고를 당하면서였다.

아빠는 교통사고로 다리 한쪽을 잃었다. 절단은 아니었는데, 그러니까 정말 절단’은’ 아닌 수준이었다. 처음에는 침대에서만 생활해야 했고 나중에는 목발을 짚어야만 걸을 수 있었다. 잘라내지 않았을 뿐 기능을 하지 못했다.

사고를 당한 다리는 무릎 아래에서부터 붉은색이었다. 엄마가 인큐베이터에서 꺼내왔다가 무서워서 만지지도 못하고 다시 돌려보낸 나처럼. 겉껍질 없는 근육의 모양이 그대로 드러났다.

아빠가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면서 우리는 할아버지 집에 들어갔다. 그 시골 기와집에는 이미 할머니, 할아버지, 본부인, 이복형제 셋, 고모, 고모부, 사촌형제 둘이 살고 있었다. 우리 세 식구는 벌써 열 명이 살고 있는 그 집에 들어가 살았다.


그 집에서 엄마와 나는 악역이었다. 아들을, 남편을, 아빠를 뺏어간 죄인이었다. 그렇기에 함께 살아가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엄마는 새벽 다섯 시마다 일어나 할머니를 도우며 식사를 차려야 했고, 아빠는 사고 이후로 자주 이상해졌다. 끊었던 약에 손을 대고 자주 화를 냈다. 급기야는 위험한 약까지 손을 대면서 엄마를 떠나게 만들었다.

나는 그날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낡은 화장실 문지방에 서 있던 엄마의 뒷모습이 유독 쓸쓸해 보이던 때였다. 고작 여서일곱 살이었던 내 눈에도 그날 엄마는 참 슬퍼 보였다. 그래서 나가 놀기가 싫었다. 남동생이 자꾸만 바깥 축사에서 놀자며 불렀는데 발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지금 가면 엄마를 못 볼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날 엄마는 집을 나갔다.

그 전에도 엄마는 가끔 아빠를 떠났다. 잘못된 관계를 정리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빠는 엄마의 친구 집을 찾아가 유리창을 깨고, 친척 집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를 데리고 있는 이상 엄마가 완전히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내가 없었기에 엄마는 조금 더 멀리, 완전히 숨었다. 아빠도 그 전처럼 군인 아파트 담벼락을 넘고 들어가 창을 깰 만큼 건강하지 못했다.


시골에서 나는 <콩쥐팥쥐>의 콩쥐처럼 살았다. 몇 달 차이로 태어난 남동생은 세상 물정을 몰라서 나를 친구처럼 대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의 존재를 분명히 정의 내렸다. 군식구에 눈엣가시이고 사생아였던 나는 미움받기 적당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우리 엄마가 유부남인 걸 모르고 만났다고 해 봐야, 도망치려 해도 소용없었다고 해 봐야 누가 믿겠는가?

게다가 아빠는 나를 너무 예뻐했다. 다른 이복형제들과는 확연히 다르게 대했다. 그렇게 발을 절뚝거리면서도 나를 어깨 위에 올려서 목말 태워 줬고, 맨손으로 줄줄 흐르는 콧물을 닦아줬으며, 항상 나만 무릎에 앉혀 책을 읽어줬다.

그래서 나는 괜찮았다. 아빠만 없으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고, 울리고, 괴롭혀도 괜찮았다. 항상 나만 걸레질을 해야 하고, 등짝을 얻어맞고, 계란찜 한 숟갈도 못 먹게 해도. 정기적으로 보건소에서 받아야 하는 충치검사조차 못 받아 늘 이가 아파도. 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빠가 있으니까 다 견딜 수 있었다.


시골에서는 추석 즈음에 가장 경사 분위기가 난다. 그쯤 시내에서 무언가 일을 맡아했던 아빠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집을 나갈 때부터 오늘은 돌아오는 길에 선물을 사서 오겠다고 그랬다.

별달리 오락거리가 없는 시골에서는 9시면 다 함께 누워 잠을 잔다. 그 사실을 아빠가 모를 리도 없는데, 그날따라 귀가가 늦었다. 나는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아서 자꾸 뒤척거렸다. 모두가 잠든 밤인데 왜 아빠는 안 올까. 그런 생각을 한참 하던 때에 전화가 울렸다.

할머니가 받았다가 할아버지를 바꿔 주었다. 두 사람이 숨죽여 속삭이는 소리가 범상치 않았다. 경악이나 슬픔이 드러나지 않는 그저 웅얼거림에 불과한 말인데도 나는 이상하게 섬뜩했다.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날 아빠는 계단에서 굴러 사망했다. 뒤로 넘어지는 바람에 머리가 깨졌다고, 고작 여덟 살이던 내게 누가 설명해 주었더라…….


열 가구도 살지 않는 시골 마을에 꽃상여가 돌았다. 휘황찬란한 장식을 매단 관이 멀리서부터 덩실덩실 걸어왔다. 마당에 있다가 집 안으로도 들어와 제사를 했던 것 같다. 나는 그날 아침부터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다. 그야 정말로 내게는 어느 세계가 사라진 것 같은 절망이었으니까.

그런데 큰오빠나 큰언니는 그렇게 울지 않았다. 조금 훌쩍이는 것도 같았지만 우는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오죽하면 엉엉 우는 나를 팔꿈치로 쿡 찌른 큰오빠가 그런 말을 했었다. 야, 그만 좀 울어.


장례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열 밤만 있으면 데리러 오겠다고 해서 나는 하루하루 달력 앞에서 엄마를 기다렸다. 할아버지가 애를 데려가지 않으면 고아원에 보내겠다고 해서인 줄은 모르고, 그냥 신이 났다.


엄마를 태운 삼촌의 차가 마당 길을 가로질렀던 순간이 기억난다. 나는 그때 너무 들뜨고 기뻐서 방긋방긋 오르는 광대를 숨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참 곤혹스러웠다. 나는 이 집을 벗어나면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 생각인데, 아무리 나를 괴롭히던 사람들이라고 해도 이별의 순간에 웃을 수는 없지 않은가? 고작 여덟 살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차에 탄 나는 억지로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이려고 했다. 내가 울 때까지 괴롭히다가 울면 왜 울고 난리냐며 등짝을 때리던 고모도 한껏 슬픈 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장단을 맞춰야 하는데 너무 좋아서 침울한 표정을 짓지 못했다. 대신 나는 눈을 내리깔고 손톱만 매만졌다.


드디어 차가 출발했다. 가는 길에 휴게소에 들렀을 때, 엄마는 롯데리아에서 햄버거를 사 줬다. 뭘 먹고 싶냐고 물었을 때 내가 라이스버거가 먹고 싶다고 해서.

TV로만 보았던 햄버거는 맛이 없었다. 양미라가 찍은 새빨간 CF 속에서 햄버거를 너무 맛있게 먹기에 당연히 괜찮을 줄 알았는데. 천상 시골 입맛에 할머니 음식을 먹고 자란 나에게 패스트푸드는 너무 이상했다. 불량식품 같았다. 그래서 두 입만 먹고 버리지도 못한 채 들고 있자니 엄마가 대신 버려주었다. 먹기 싫으면 먹지 말라는 말이 너무 신기했다. 그래도 엄마는 내 편이야. 그런 생각을 했다.

너무 신이 나서 차 안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섹시가 뭔지도 모르는 나이에 ‘섹시한 남자’를 불렀다. 악당의 소굴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해방감과 행복이 나를 마구 흥분시켰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 역시 해방감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어린 나이에 핍박받고 자란 불쌍한 콩쥐였지만, 동시에 어느 날 대뜸 나타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식비를 거덜 내는 사생아였다. 심지어 우리 엄마와 아빠는 더욱 뻔한 악역이었다. 본부인과 이복형제를 배신하고 가정을 깨트렸으며, 무책임하고 경솔했다. 더 엮이고 싶지 않은 쪽은 오히려 그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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