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는 화사하게 피고 장미는 순결하게 지네"
내가 정말 어렸을 때 TV에서 방송했던 만화 중에 '베르사유의 장미'라는 만화의 주제가 소절이다.
주인공인 오스칼은 명문 귀족의 자제로 프랑스 왕비의 신임을 받아 근위대장까지 올라갔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결국 평민들의 비참한 현실을 알게된 후, 혁명군에 가담하여 바스티유 습격을 지휘하다가 총탄에 맞고 사망한다.
누구보다도 화려한 길을 걸었지만 순결한 선택으로 인생을 마감한 오스칼에게 어울리는 단어가 바로 '장미'이다.
NBA에는 수많은 스타 플레이어들이 부상으로 제 기량을 유지하지 못하고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랜트 힐, T-Mac, 브랜든 로이, 페니 하더웨이 등 수많은 스타들이 떠오르다가 부상으로 은퇴하거나 혹은 그 이상의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저니맨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전 세계 농구팬에게 누가 가장 비운의 스타인가 혹은 최고의 "what if" 선수는 누군인가라고 물어본다면, 오직 단 한명만 꼽을 것이다.
바로 NBA 신인왕 및 역대 최연소 MVP이자 이름부터 장미인 '흑장미' 데릭 로즈이다.
데릭 로즈는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출신으로 마이클 조던 이후 암흑기를 걷고 있던 고향 연고지팀인 시카고 불스에 2008 NBA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입단한다. 입단 첫 해부터 올해의 신인상을 탈 만큼 시대의 아이콘이 될 준비를 갖췄었다.
로즈의 플레이를 보면 농구를 모르는 사람들도 인간이 저렇게 빠르고 탄력적일 수 있구나라는 것을 느낄만큼 매우 역동적인 플레이 스타일을 구사했다.
흔히 기어를 바꾼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드리블에서 시작되는 가속도가 리그 최정상급으로 빠른데 거기다가 최정상급의 스피드로 방향을 전환하기 때문에 수비수의 시야에서 일순간에 사라지는 효과로 보이기도 했다. 수비수를 제친 후 림으로 달려들어가 덩크 혹은 더블클러치 등 화려한 기술로 득점을 마무리하는 득점 마무리까지 가능했던 로즈는 공격형 가드의 선구자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MVP 출신 러셀 웨스트브룩은 데릭 로즈를 수비했던 시절을 이렇게 평가했다.
"빠른 선수들을 많이 상대해봤지만, 눈앞에서 사람이 사라지는 것은 처음이다"
이러한 화려한 플레이를 기반으로 많은 명장면을 만들어냈던 로즈는 결국 데뷔 3년만에 마이클 조던 이후 단 한번도 달성하지 못한 동부 리그 1위로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하며 리그 최연소 MVP를 수상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이 MVP 수상이 더 높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동부리그에 패권자 Miami Heat를 꺾고 정규시즌 우승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당시 Miami Heat는 르브론 제임스, 드웨인 웨이드, 크리스 보쉬의 Big 3 최전성기 시기였으며, 만약 이 해 르브론이 MVP를 수상하였더라면 2009~2014년까지 5년연속 MVP라는 대기록을 기록하였을 것이다. 르브론은 로즈가 MVP를 수상한 2011년을 제외한 나머지 4개년도의 MVP이다)
하지만 신은 공평하다고 했는가, 신은 그에게 엄청난 운동능력과 스피드를 주었지만 몸의 내구성은 주지 않았다. 2012년 그는 십자인대를 크게 다치며 전성기의 기량을 잃게 되면서 점차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고 구단은 지미 버틀러라는 공수겸장을 중심으로 팀을 재편하며 로즈는 시카고에서 나와 뉴욕 닉스에서 커리어를 이어나간다.
다만 폭발적인 운동능력을 기반으로 했던 로즈의 플레이는 운동능력을 상실하면서 점차 비효율적이게 되고, 3점슛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로즈에 대한 기대치는 점점 더 낮아지면서 저니맨으로 전락하게 된다.
하지만 로즈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하여 슛을 개선하였으며 더 이상 MVP 시절의 화려했던 자신보다는 점차 팀에게 필요한 선수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2018-2019 시즌 미네소타 팀버울브즈 소속으로 로즈는 유타 재즈를 상대로 커리어 하이인 50점을 기록한다.
50점은 로즈가 전성기 시절에도 달성하지 못한 기록이었으며 운동 능력을 기반으로 득점이 대다수였던 전성기 시절과 다른 슛팅 위주의 득점으로 달성한 기록이었다. 로즈는 50점을 기록하며 마지막 수비까지 완벽하게 한 뒤에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경기 후에 50득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냐는 질문에 로즈는 울면서
"정말 죽으라고 노력했습니다. 이 팀과 구단, 그리고 팬들을 위해 해낸 결과입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이런 퍼포먼스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이후 로즈는 다시 저니맨으로 여러 구단에서 뛰다가 결국 2024년 9월 26일 SNS를 통해 은퇴를 발표한다.
데릭 로즈의 은퇴를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먼저 제일 머리속에 든 생각은 시간이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다는 것이다.
내가 학창시절에 동경했던 농구선수들이 하나씩 은퇴하는 것을 보면서 시간이 너무 빠르다고 생각했다.
코비 브라이언트, 샤크 오닐, 팀 던컨, 드웨인 웨이드, 카멜로 앤서니 등 내 20대의 최소 반을 차지하고 있던 그들이 하나씩 떠나가는 그 순간은 항상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씁쓸함이 남았었다.
데릭 로즈도 마찬가지였다.
데릭 로즈를 처음 본 순간은 내가 캐나다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을 때였고, 로즈가 50점을 기록할 시기에는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있었다.
사회 생활이 처음이라 너무 힘들어서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가를 고민하고 있을 시기에, 지하철에서 퇴근길에 로즈의 50점 경기를 유튜브로 봤다. 최연소 MVP로 리그 정점에 섰던 그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면서도 죽을만큼 노력을 하면서 결국 다시 화려한 장미를 피우는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솔직하게 로즈의 퍼포먼스와 인터뷰를 보고 나니 눈물이 많은 편이 아닌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중에 sns를 찾아보니 전세계 사람들도 나와 같이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얼마나 죽으라고 노력했을까? 다시 옛날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처절하게 남아서 노력하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쳤을까? 과연 나는 로즈처럼 죽을만큼 처절하게 발버둥 쳐봤는가?
이러한 생각들이 들면서 나 자신에게 노력하라는 동기부여를 줬던 기억이 난다.
그의 이름답게 데릭 로즈는 화려한 장미답게 커리어를 마무리 했다.
커리어 전성기에는 누구보다도 화려한 장미였고, 이후에는 살아남기 위해 최선의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모습으로 팬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면서 순결하게 지는 장미.
그의 인생 제 2막에 행복이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