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형체가 내 손을 잡으려 할 때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 아니. 난 더 이상 감당하고 싶지 않아."
그 순간, 그 윤곽이 찢어진다. 억눌러진 비명 같은 소리가 공간 전체를 울린다.
"도망치는구나..."
하지만 뒤돌아보지 않는다.
상자 속의 나가 조용히 손을 내밀어온다. 그 손은 싸늘하고 정적에 잠겨 있으나 이상하게도 편안하다.
그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그 순간 고통도, 기억도, 감정도 모두 빠져나간다.
몸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라 '내용물'이 빠져나가는 감각이다.
머릿속의 생각들이 하나둘씩 꺼지는 불처럼 사라진다. 이름도, 의미도, 과거도, 흐려진다.
빛의 형체는 마지막으로 외친다.
"너는... 텅 비게 될 거야...!"
하지만 그 말조차 의식에 닿지 않는다.
상자 속의 나와 천천히 합쳐진다. 둘의 형체가 겹쳐지고, 그의 정적이 심장까지 퍼져 완전히 침묵이 된다.
그리고 공간 안에 단 하나의 사물만 남는다.
숨 쉬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 기억이 없는 것. 아픔 없는 것. 방의 일부가 된 것.
사물이 된다. 그것은 이상하리만큼 편안하다.
.
.
.
.
.
그리고 그 후-
시간이 흐른다. 아니 흐르는 것 같다. 확실하지 않다. 세지 않는다.
방은 여전히 같은 방이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나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다.
창밖의 빛이 밝아졌다 어두워진다.
몇 번이나 반복되는지 모른다. 중요하지 않다.
배가 고프면 먹는다. 목마르면 마신다.
하지만 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기능이다.
씻는다. 잔다. 일어난다.
모두 기계적으로. 정해진 순서대로.
냉장고 소리가 들린다. 윙-. 멈춘다. 다시 시작한다. 윙-.
규칙적이다. 예측 가능하다. 편안하다.
전화가 온다. 몇 번이나 울렸다 멈춘다. 확인하지 않는다.
문자 알림이 온다. 화면이 켜졌다 꺼진다. 읽지 않는다.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거기 있어? 괜찮아?"
목소리가 들린다. 아는 목소리 같다. 누구였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할 필요가 없다.
대답하지 않는다.
발소리가 멀어진다.
다시 고요해진다.
먼지가 쌓인다. 책상 위에, 바닥에.
털지 않는다. 먼지도 나도, 이 방의 일부니까.
창밖의 나무가 변한다.
초록에서 갈색으로 갈색에서 하얀색으로. 다시 초록으로.
계절이 지나간다.
하지만 나는 변하지 않는다.
사물은 변하지 않는다.
어느 날, 또 누군가 온다.
문을 두드린다. 여러 번.
"안 열면 문 열고 들어갈 거야."
들어온다.
나를 본다 말을 건다.
"... 너 괜찮아?"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할 것이 없다.
손이 내 어깨를 흔든다.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게 살 거야? 계속?"
질문이다. 하지만 답이 없다.
그 사람이 한숨을 쉰다.
"알았어. 네가 준비되면 연락해."
문이 닫힌다.
다시 혼자.
시간이 또 흐른다.
계절이 또 바뀐다.
전화는 점점 줄어든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줄어든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완전히 멈춘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
아무도 부르지 않는다.
아프지 않다.
그립지 않다.
외롭지 않다.
편하다.
침대에 눕는다. 천장을 본다.
하얗다. 아무것도 없다.
눈을 감는다.
어둠.
고요.
완전한 침묵.
지금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사물은 아프지 않다.
사물은 무너지지 않는다.
나는 사물이다.
완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