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존재선택

by dy


천천히 손을 내밀어 빛의 형체의 손을 잡는다.



손이 닿는 순간, 눈앞에서 하얀 노이즈가 폭발하듯 번져나간다.

귀는 찢어지는 듯 울리고, 머릿속은 뜨거운 액체를 부은 듯 진동한다.


그리고- 그 모든 고통이 내 몸 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잊었던 기억들이 끊어진 필름처럼 이어지며 한 장면씩 눈앞을 지나간다.


거부했던 눈빛. 내가 지나쳤던 손. 입을 열지 못했던 말. 돌아보지 않은 순간들. 누군가가 내게 했던 울부짖음. 내가 스스로 외면한 상처.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모두 여기에 있었다 그는 그것의 총합이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워지지만- 이상하게도 도망치고 싶지 않다.


빛의 형체가 내 가슴속으로 완전히 녹아들자 상자 속의 나가 희미하게 깜박이며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제 너는 존재로 돌아가는구나."


그의 목소리가 묘하게 안도와 두려움을 함께 품고 있다.


묻는다.


"... 넌... 사라지는 거야?"


그것은 잠시 나를 바라본다. 비로소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 '감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떠오른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 말과 함께 그의 몸은 먼지처럼 흩어져 내 안으로 스며든다.


공간이 무너지는 듯 흔들리고- 눈뜬 순간 현실의 방에 서 있다.


냉장고의 소음. 창밖의 빛. 방바닥의 질감. 모든 것이 또렷하고 무겁고 그러나 생생하다.

처음으로 '완전한 존재'가 되었음을 느낀다.

.

.

.

.

.

그리고 그 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눈을 뜨자 방은 여전히 같은 방이다. 침대, 책상, 서랍 하나도 바뀐 것이 없다.

하지만 다르게 보인다.


냉장고 소리가 들린다. 윙- 하는 기계음. 예전에 그저 귀를 막고 싶은 소음이지만, 지금은 이 공간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진다.


창밖의 빛도 다르다. 예전에 그저 눈부신 빛이었지만, 지금은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세계가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천천히 일어난다. 몸이 무겁다. 예전처럼 사물의 무게가 아니라, 존재의 무게. 살아있는 것의 무게.

책상 위에 전화기가 놓여 있다.


며칠 동안, 아니 몇 주 동안 손대지 않았던 전화기.

화면을 켠다. 읽지 않은 문자들이 쌓여 있다.


"괜찮아?"

"연락 좀 해줘."

"걱정돼"

"화났으면 말해."


그리고 마지막 문자.


"더 이상 연락 안 할게. 네가 필요할 때 연락해."


가슴이 조여 온다. 아프다.

하지만 이번엔 그 아픔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손가락이 떨린다.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다.

변명? 사과? 설명?


아무것도 충분하지 않다.

그래도 쓴다.


"미안해. 한동안 힘들었어. 이제 조금 괜찮아. 얘기할 수 있어."

문자를 몇 번이나 지우고 다시 쓴다.

그리고 마침내- 전송 버튼을 누른다.


'전송되었습니다.'


그 짧은 문장이 사라지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천천히 녹아내리는 것을 느낀다.

답장이 올까? 안 올까?

두렵다.

하지만 기다린다.


몇 분이 지난다. 화면은 여전히 조용하다.

그래도 괜찮다. 지금 당장 답이 오지 않아도. 이미 첫걸음을 뗐으니까.


창문을 연다. 찬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온다. 차갑다. 아프다.

하지만 살아있다는 느낌이다.


방을 나선다. 복도를 걷는다. 계단을 내려간다.

한 걸음 한 걸음 무겁다. 다리가 떨린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몇 번이나 든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밖으로 나간다.



햇빛이 눈을 찌른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시끄럽다. 차 소리가 귀를 울린다.

모든 것이 너무 강렬하다. 너무 생생하다.


사물이었을 때는 이 모든 것이 흐릿하게 걸러졌었다.

하지만 이제는 온몸으로 받아낸다.


아프다. 무겁다. 두렵다.

그러나 존재한다.

완전히.


주머니 속 전화기가 진동한다.

심장이 쿵 하고 뛴다.

화면을 본다.


"괜찮아. 천천히. 내가 기다릴게."

눈물이 난다.

이번엔 참지 않는다.


길 한가운데서, 사람들 사이에서, 그냥 운다.

부끄럽다. 이상하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존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