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 위에 희미한 형상이 떠오른다.
어두운 방. 침대에 앉아 있는 누군가. 얼굴 보이지 않지만 어깨가 떨리고 있다.
울고 있다.
그리고 문 앞에 서 있는 나. 손이 문고리에 닿아 있다.
열어야 한다.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나는 돌아선다.
"지금은 힘들어. 나중에."
문을 닫는다. 신발을 신는다. 나간다.
그 사람의 울음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온다. 하지만 나는 듣지 않는다. 듣고 싶지 않다.
계단을 내려간다. 점점 멀어진다.
울음소리는 여전히 들린다.
하지만 나는 걷는다.
빠르게.
'나중에 해결하면 돼. 지금은 나도 힘들어.'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한다.
하지만 나중은 오지 않았다.
그 장면이 공중에서 천천히 부서진다. 유리가 깨지듯, 산산조각이 나며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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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조각이 떠오른다.
카페. 창가 자리.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다.
한 명은 말하고 있다. 열심히, 절실하게.
"나 요즘 너무 힘들어. 너라도 이야기 들어줬으면 좋겠어."
다른 한 명은 나다. 커피 잔을 바라보며 시계를 본다.
"응, 그렇구나."
대충 듣는다. 마음은 다른 곳에 있다. 빨리 끝나기를 바란다.
"너 지금 듣고 있어?"
"응 듣고 있어."
거짓말이다. 한 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사람이 말을 멈춘다. 한숨을 쉰다.
"알았어. 바쁜가 보네. 미안."
일어선다. 가방을 든다. 나를 한 번 본다. 실망한 얼굴로.
"괜찮아지면 연락할게."
문이 닫힌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든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뭐 별일 있겠어'
커피를 마신다. 식어버린 커피
그 장면도 천천히 흩어진다. 담배 연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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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조각.
전화기 화면. 문자 메시지가 떠 있다.
"내일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중요한 얘기가 있어."
읽었다. 하지만 답장하지 않는다.
며칠이 지난다.
"연락 좀 해줘. 부탁이야."
또 읽었다. 또 답장하지 않는다.
"너 화난 거야? 내가 뭘 잘못했어?"
읽기만 한다.
일주일이 지난다.
"알았어. 괜찮아. 혼자 해결할게."
마지막 메시지.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는다. 안도한다.
'귀찮은 일이 해결됐네.'
하지만 가슴 한구석이 무겁다. 그 무게를 무시한다.
나중에 알게 된다. 그 '중요한 얘기'가 무엇이었는지.
너무 늦었다.
그 장면은 문자처럼 한 글자씩 지워진다. 백스페이스를 누르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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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조각.
출구 앞, 비가 내리고 있다.
누군가 나를 붙잡는다.
"가지 마. 우리 얘기 좀 하자."
나는 손을 뿌리친다.
"지금은 안 돼. 피곤해."
"언제나 피곤하잖아. 나랑 있을 땐 항상 피곤해."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할 말이 없다.
"나한테 관심 없는 거지?"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 뭐가 문제야?"
침묵.
"... 그냥 혼자 있고 싶어."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그 사람의 얼굴이 무너진다.
"알았어."
돌아선다. 빗속으로 걸어간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본다.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너무 귀찮다. 너무 힘들다. 그냥 혼자가 편하다.
그 사람이 비에 젖으며 멀어진다.
나는 우산을 접는다. 돌아선다.
나중에 후회할 거라는 걸 안다. 하지만 지금은 편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장면은 빗소리처럼 흐려지며 사라진다.
.
.
.
네 개의 기억이 모두 사라지자 무릎이 꺾인다.
바닥에 손을 짚는다. 숨을 쉴 수가 없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다.
모든 기억이 동시에 터져 나온다. 지웠던 것들, 외면했던 것들, 잊으려 했던 것들.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모두 여기 있었다. 모두 그 안에 있었다.
빛의 형체가 더 가까이 다가온다. 그 안에서 모든 얼굴이 보인다. 울던 사람, 떠난 사람, 기다렸던 사람. 실망했던 사람.
모두 나를 바라본다.
"... 돌아와야 해... 끝내지 못한... 나를 데려가..."
그 형체는 손을 내밀어온다. 이번에 나를 향해서.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친다. 하지만 공간은 확장되지 않는다. 벽이 따라붙고, 바닥이 밀려오고, 그림자 같은 '나'들이 사라질 틈도 주지 않는다.
상자 속의 나가 조용히 말한다.
"그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너는 여기서 나갈 수 없다."
그것을 바라본다.
"... 너는 왜 그를 거부하는데?"
그것은 아주 짧게 눈을 깜빡인다. 그것만으로도 정적 같은 표정이 미세하게 떨린다.
"나는 너의 버린 것들을 모아 만든 껍데기다. 그와 합쳐지면... 나는 사라지지."
잠시 침묵. 그 침묵 속에서 빛의 형체는 한 걸음 더 다가온다.
그 걸음마다 공간 전체의 '나'들이 파동 친다. 그들의 그림자도, 표정도, 윤곽도 함께 물결처럼 이곳을 뒤흔든다.
"... 날 받아들여... 그러면... 너는 다시 하나가 돼..."
이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이상하게 압축되는 느낌이 든다.
두 개의 나. 하나는 버려진 나. 하나는 버린 나.
그리고 둘 중 무엇이든지 한쪽을 향해 움직이지 않으면 이 공간은 영원히 닫히지 않는다.
그 그림자 같은 존재가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조용히 말한다.
"그와 합쳐서 '존재'가 될 것인가."
"아니면 나와 남아 '사물'이 될 것인가."
그리고- 빛의 형체가 마지막으로 속삭인다.
"... 나는 네가 버린 고통이다. 나 없이는... 너는 완전해질 수 없어..."
그 말이 공간의 중심에 떨어지자 모든 것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한쪽은 밝고 파손된 노이즈의 문, 다른 쪽은 어둡고 깊은 정적의 틈.
그리고 그 두 갈래가 천천히 나를 조여 오는 한가운데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