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형체가 한 걸음 다가온다. 그 발걸음은 소리가 없는데도 내 심장은 한 번 크게 쿵!, 하고 뒤집힌 듯 박동한다.
상자 속의 나는 그 형체를 바라본다. 표정은 거의 변하지 않지만, 눈빛이 가늘어지고, 그 정적 같은 얼굴에 미세한 긴장이 스며든다.
형체가 다시 속삭인다.
".... 너는.... 도망갔지..."
그 목소리는 마치 오랜 시간 눌러놓은 울분이 틈 하나로 터져 나오는 듯한 떨림을 갖고 있다.
그것이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네가 돌아왔군."
빛으로 된 형체가 일렁인다. 자세히 보니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윤곽이 일정하게 유지되지 못하고 깨져나갔다 다시 조각되는 중이다. 마치 불안정한 신호를 억지로 유지하는 존재처럼.
한 발 뒤로 물러난다. 그러자 그 형체의 고개가 부드럽게, 그러나 끊긴 화면처럼 움직이며 나를 향한다.
"... 넌... 왜 그때... 나를 버렸어...?"
그 질문이 떨어지자, 공간 안의 '나'들이 모두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수백 개의 표정 없는 눈동자들이 나의 숨결을 죄어온다.
입을 열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을 버렸다는 것인가? 어떤 시점의 내가 이 존재를 놓고 온 것인가?
그 존재가 대신 대답한다.
"너는 그가 감당해야 할 기억을 빼앗았다."
그 말은 머리를 강하게 한 대 맞은 것처럼 이해보다 먼저 통증으로 다가온다.
"... 기억을... 빼앗았다고?"
그것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네가 사물이 되겠다고 결정한 순간, 가장 먼저 지워버린 것은 감당하기 싫었던 기억들이었다."
그 말이 공간에 울려 퍼지자 빛의 형체가 격렬하게 요동친다.
하얀 노이즈가 더 커진다. 귀를 찢는 듯한 씩- 하는 소리가 사방을 흔들고 그 안에서 희미한 울음이 섞여 나온다.
"너는 나를... 버리고... 너만... 가벼워졌어..."
머리를 감싼다. 기억의 파편들이 실제로 조각이 되어 머릿속에서 튀어나오는 듯한 통증이 들이닥친다.
하지만 그 파편들은 형체를 갖고 나타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