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하다 떠오른 사람들 1] 전도서와 <엑시트>, 그리고 1970년대
저는 매일 아침 성경 필사로 하루를 시작(하려고 노력) 합니다.
비록 망했어도 필사 노트를 만들어 팔던 출판사 사장으로서 마지막 자존심이랄까요. 편집은 끝냈지만 망해서 세상에 빛을 못 본 '전도서 필사 노트'에 그날도 필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10장 13절에서는 흥미롭게도 어떤 사건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작은 성이 큰 왕의 공격을 받아 초토화되기 일보 직전인데, 성읍 내 어느 가난한 자의 지혜로 전쟁을 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아니, 배은망덕하게 목숨 구해준 은인을 기억 안 한다고? 응?은인 기억? 순간 어떤 얼굴들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영화 <엑시트> 산악동호회 출신 백수 용남이. 그리고 까맣게 잊고 있었던 1970년대 흐린 기억 속의 아저씨들.
아니야. 내 삼촌 아니라고
시간이 남아도는 용남은 오늘도 열심히 놀이터 철봉에서 체력 단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 친구들과 놀이터에 근접하던 지호는 저 멀리 철봉대에서 온갖 기술을 부리고 있는 남자가 삼촌임을 알아채고 부끄러워집니다. 친구들을 다른 쪽으로 유인하려 하지만, 이미 온갖 소문이 무성한 '진격의 철봉남'의 철봉 퍼포먼스에 푹 빠진 친구들은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지호야! 삼촌이 마실 거 사줄까?" 지호는 내 삼촌 아니라면서 도망칩니다.
집에서 2시간 거리 위치한 구름정원. 어머니의 칠순 잔치임에도 아들 용남은 백수라는 이유로 기를 못 핀 채 잔치 내내 겉돌고 있습니다. 용남에게 유일한 위안은 구름정원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동아리 후배 의주를 만난 것. 의주와의 재회도 잠시, 도시를 장악한 유독가스로 인해 상황은 재난으로 치닫습니다. 건물의 잠긴 옥상으로 대피하는 상황이 되자, 용남과 의주는 과거 산악 동아리 시절 갈고 닦은 온갖 기술과 안전 지식을 발휘하여 우왕좌왕하는 가족들과 우연히 발견한 학생들을 구조시키는데 성공하지만, 정작 둘은 지독하게 따라붙는 유독가스를 피해 건물과 건물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알아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나 바라는 거 없는데 이번 한 번만 도와주세요
아무리 체력단련을 매일 했었어도, 고층 건물을 로프 없이 클라이밍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입니다. 건물의 장식물을 최대한 활용했지만 마지막 관문은 맨손 클리이밍입니다. 용남의 오른팔에 용남과 가족들의 목숨이 달려있습니다. 영화를 보면 그런 장면들이 가끔 나옵니다. 모든 노력을 다하고도 극복하지 못할 때 주인공은 여지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 번만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용남은 아마도 사람에게는 소원권 한 장이 있을 거라 생각했나 봅니다. 아마도 접수가 잘 되었는지, 용남은 살아남아 옥상 문을 엽니다.
올 일이 아예 없는 구름정원에 그날 그 시간 기가 막히게 (모르고) 맞춰 온 용남은 의주에게 귀인이 맞겠지요? 산악동호회 에이스 출신 의주 역시 용남과 함께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는 신들린 팀플레이를 선보였습니다. 용남이 하는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가족들, 삼촌 아니라며 도망가던 조카 지호, 사귀자는 고백을 거절했던 의주까지 영화의 마지막이 되면 사람들은 용남이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동안 용남을 무시했던 누나들, 매형들, 조카 등 온 가족들이 혼비백산한 모습과 대조적이니까요. 우리 주변에는 평시에는 무력해 보이지만, 위기에는 순식간에 문제를 해결한 후 순순히 사라지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근데 저 아저씨 누구지
1970년대 어느 소도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제게는 몇 가지 인상적인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 시절 우리는 발이 닿는 모든 곳이 놀이터였던 그런 시절입니다. 그날은 왜 그랬는지 공사가 끝난 건지 시작하려는 건지 알 수 없는 공간에서 친구들과 맨발로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었어요. 뭔가 발바닥에 퍽 박힌 느낌 받고 돌아보니, 폐목에 박혀있던 못이 제 발바닥에 박힌 것이었어요. 감당이 안 돼서 울음이 터지려는데, 어떤 아저씨가 갑자기 등장해서는 폐목을 휙 잡아빼고 횃불을 가져와 오락가락 하며 제 발바닥을 빠르게 구웠습니다(순식간이라 감각이 없더라고요).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건가 하는 사이에 횃불은 드럼통으로 들어갔고, 아저씨는 말했습니다.
파상풍 걸려. 죽을 수 있어
다행히 파상풍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아저씨의 빠른 응급처치가 아니었다면 제 인생 어찌 되었을지 알 수 없었죠. 정신이 돌아왔을 때 이미 아저씨는 온데간데없었습니다. 어느 날은 자전거 체인에 손가락이 박혔을 때, 지나가던 아저씨가 급하게 자전거포 아저씨를 불러와서 순식간에 손가락을 빼주었습니다. 더 이상 아프지 않아 돌아보니 역시 사라지셨습니다. 엄한 동네에서 길 잃고 어리둥절해있을 때, 때마침 자전거를 타고 저를 수색 중이던 옆집 아저씨의 눈에 띄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미아가 될 뻔한 무서운 기억입니다. 제 수명을 늘려주고, 장애를 입지 않게 해주고, 미아가 되지 않게 해 준 이름 모를 어른들 덕분에 건강하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용남의 위험천만한 맨손 클라이밍 점핑 덕분에 어린 지호의 미래가 열렸습니다. 어린 지호도 어른이 되면 아마 그렇게 누군가의 미래를 열어주지 않을까요. 전도서 10장에서 가난한 지혜자의 묘안 덕분에 큰 왕의 침공에서 벗어나 목숨을 부지하게 된 성읍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자 지혜자를 기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그 지혜자를 기억하지 않은 것보다, 성읍 사람들이 지혜자가 되지 않는 게 더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혜입니다. 비록 그 성경적 지혜와 세상적 지혜는 다른 말입니다만, 공동체를 위기에서 구하는 지혜, 타인을 구하는 지혜, 그리고 내가 받은 지혜를 기억하고 내가 지혜자가 되는 것이야말로 정말 고귀한 가치가 아닐까요. 우리는 모두 사라진 용남들으로부터 덤 인생을 선물받은 지호들이 아닐는지요. 어학 능력이나 자격증보다, 지혜 스펙을 쌓는 사람이 인정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