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뮤지컬 중 가장 충격적인 1막 엔딩

한낱 꿈놀이를 통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것에 대해 질문하다

by 채수빈

아직도 충격적인 1막을 맞이한 후 인터미션이 시작되자 그제야 숨을 몰아쉬던 나를 기억한다. 그리고 함께 관람한 고모와 몇 초간 말없이 눈빛을 교환했다. 방금 엄청난 걸 본 것 같다고, 우리는 말없이 동의했다.


국내 창작뮤지컬인 몽유도원은 초연임에도 믿기지 않는 완성도를 자랑한다. 이미 해외 진출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국내에서만 공연된다면 아쉽다 못해 억울한 심정이었으리라.


*아래는 <몽유도원>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형적인 사랑 이야기와 한국적인 정서가 만날 때


<몽유도원>은 삼국사기 도미 부부 설화와 최인호 작가의 몽유도원도를 바탕으로 펼쳐진다. 지극히 한국적인 이야기가 세계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국가와 세대, 성별을 막론하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원형적인 사랑 이야기에 있다. 사람이라면 품는 근원적인 감정을 건드리는 것이다.


백제의 왕 '여경'은 계속 그의 꿈속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본다. 여인과 모습이 꼭 닮아 있는 '아랑'이라는 여인을 현실에서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도미'와 행복하게 혼인한 사이다. 그들은 함락당한 목지국의 유민들로,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마을을 이루어 평화롭게 살고 있다. 왕은 도미와 바둑 내기를 해 아랑을 데려오고, 도미의 눈을 멀게 한 후 배에 태워 떠나보낸다.


2026 뮤지컬 몽유도원 공연 사진 (민우혁, 하윤주)_제공 (주)에이콤.jpg


여기까지가 <몽유도원>의 1막이다. <몽유도원>은 박진감 넘치는 전개로 1막 엔딩까지 달리며 관객에게 인터미션으로 충격을 잠시 진정시킬 시간을 준다. <몽유도원>은 거의 모든 장면이 하이라이트처럼 강렬하다. 그러니 1막 엔딩은 더 그렇다. 그래서 도미는 분량으로는 적지만, 작품 전체에서 가장 존재감이 크다. 줄거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적인 정서가 지닌 힘이 있다.


도미는 모든 것을 잃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고국 사람들, 두 눈을 잃었다. 심지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채로 배에 따라 떠내려가는 상황이다. 구슬펐던 그의 속삭임이 출렁이는 파도와 함께 “어떻게든 살겠지요”라는 가사와 함께, 생존의 노래로 치닫는다. 체념하듯 속삭였던 “어이해”가 말을 모는듯한 “하이야”로 들려온다.


5. 도미 이충주.jpg


도미가 비극의 정점에서 오히려 삶의 의지를 처절하게 다지는 반전은, 내가 지금까지 본 모든 뮤지컬을 통틀어 가장 충격적이었다. 온갖 국가적 고난을 어떻게든 극복해 왔던 한국인의 정신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자신이 이렇게 되었음에도 상대의 안부를 빌며 “부디 살아만 있어 달라”라고 노래한다.


4. 아랑 유리아.jpg


도미와 아랑은 다시 만나기 위해 수많은 것을 잃지만,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기적처럼 만나 다시 그들만의 도원을 세운다. 그렇지만 내게 2막의 주인공은 의외로 여경이었다. 1막까지만 해도 꿈속에서 본 것을 갖고 싶다고 생떼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던 여경의 상황을 좀 더 들여다보게 된다. 정치적 불안, 왕권의 위태로움, 깊은 고독 속에서 꿈속 아랑은 그에게 유일한 도원이다. 아무도 믿을 수 없던 그가 결핍을 채우기 위해 붙들었던 유일한 것은 자신을 사랑해 줄 누군가가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여경이 사랑이 아니라, 구원을 바란 인간으로 이해된다.


2. 여경 김주택.jpg


삶은 결국 누군가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이를 <몽유도원>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랑 이야기에 한국적인 정서를 더해 독보적으로 표현한다.



유일무이한 K-공연


공연 자체로서의 완성도 역시 훌륭하다. <어이해 이러십니까>, <아, 달님이시여>, <내 것이다> 등 인물별 대표 넘버를 확실하게 각인한다. 그러면서도 작품 내내 앙상블이 돋보여 뮤지컬 장르의 매력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몽유도원>을 보며 지금의 한국 문화가 얼마나 역동적인지 깨달았다. ‘퓨전’이라는 단어는 이제 한국 문화를 표현할 단어로는 다소 낡아 있다. <몽유도원>은 단순히 무언가를 섞어낸 것이 아니라, ‘지금의 가장 한국적인 것’을 마음껏 보여준다. 뮤지컬인 만큼 음악이 가장 큰 역할을 한다. 서양 오케스트라와 국악, 판소리 등이 하나로 어우러지며, 특히 목지국 비아가 노래하는 기원의 소리는 관객으로 하여금 함께 의식을 통과하는 존재로 만든다.


2026 뮤지컬 몽유도원 공연 사진 (하윤주, 이충주, 홍륜희 외)_제공 (주)에이콤.jpg


많은 관객이 꼽는 백미는 여경과 도미의 바둑 대국 장면이다. 부부의 사랑이 말도 안 되는 내기에 시험당하는 장면을 현대무용으로 화려하게 풀어낸다. 승부가 흑과 백의 앙상블 군무로 확장되며 그들의 운명이 결정된다.


2026 뮤지컬 몽유도원 공연 사진 (김주택, 김성식 외)_제공 (주)에이콤.jpg


배우별 특색 있는 노래와 연기는 이 다채로움에 엄청난 시너지를 낸다. 내가 본 캐스트의 강점을 소개하자면 여경 역의 김주택 배우는 성악 전공자로, 마치 오페라의 유령을 연상시키는 삐뚤어진 왕을 압도적으로 표현했다. 아랑 역의 유리아 배우는 베테랑 뮤지컬 배우답게 서사를 밀도 있게 표현해, 노래만큼이나 연기가 몰입력 있다. 이충주 배우가 연기한 도미는 한이 서려 있다. 그래서 마치 창극을 보는듯했다.


2026 뮤지컬 몽유도원 공연 사진 (하윤주, 이충주 외)_제공 (주)에이콤.jpg


영상을 활용한 무대 연출도 눈에 띈다. 사실 영상을 활용한 연출을 볼 때마다 평면적으로 느껴져 아쉬울 때가 더 많았다. 그러나 <몽유도원>은 수묵화가 일관되게 넘실거리는 영상을 배경으로, 입체적인 세트들을 하나씩 내놓으며 영상의 기능을 적절하게 활용한다.


독특한 삼국시대의 의상, 상징과 색의 대비는 극에 몰입하기 쉽게 만들어준다. 욕망으로 이글거리는 여경은 붉은 해, 변치 않는 사랑의 주인공인 아랑과 도미는 푸른 달로 표현된다. 특히 불길한 개기일식에 억지로 아랑과 혼인하려는 여경의 심리가 표현된 핏빛 의상들이 강렬하다. 도미와 아랑이 만날 때는 '무릉도원'이라는 표현이 절로 생각난다.



국립극장의 정취를 느끼며


작품 내 목지국 사람들의 합창과 몸짓은 이 이야기를 개인의 사랑에서 공동체의 이야기로 확장시킨다. 윤호진 연출이 말한 이 작품의 핵심은 “변치 않는 진심”이다. 개인적으로는 이에서 더 나아가, "그러니 누구의 진심도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 또한 받았다. 도미의 비극은 사랑이 없는 이의 상처를 후벼 팠다는 점에서만큼은 충분히 스스로 초래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26 뮤지컬 몽유도원 공연 사진 (민우혁, 하윤주 외)_제공 (주)에이콤.jpg


<몽유도원>이 창작 초연임에도 호평이 자자한 것은 한국적인데도 닫혀 있지 않고, 단순한데도 진부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은 특별한 누군가의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게, 도미 부부 설화가 품은 원초적인 두려움과 믿음을 한 치의 타협 없이 끌어올린다. 그리고 지금의 가장 한국적인 예술로 봉합해 낸다.


<몽유도원>은 2월 22일까지 국립극장에서, 4월에는 샤롯데 시어터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샤롯데 시어터는 음향이 좋은 극장 중 하나이기에 기대가 되지만, 개인적으로는 국립극장에서 보길 권하고 싶다. 국립극장이 지닌 특유의 정취를 느끼며 보는 <몽유도원>은 훨씬 의미 있을 거라 장담한다.


2026 뮤지컬 몽유도원 공연 사진 (유리아, 김성식)_제공 (주)에이콤.jpg


‘모든 게 한낱 꿈놀이’라는 <몽유도원>의 로그라인은, 우리가 공연을 보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예술은 한낱 꿈놀이를 통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것에 대해 질문한다.


가장 아름다운 꿈은 무엇일까?

그저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주는 꿈일 테다.



*본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되었습니다.


#아트인사이트 #artinsight #문화는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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