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팬레터 - 아름답고 무서운 나의 히카루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글에는 힘이 있다

by 채수빈

글쓰기를 좋아하는 내게, 한 동료가 얄밉게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글은 말보다 훨씬 참거짓을 파악하기 어렵기에 자신은 글을 도통 믿을 수 없다고 말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었지만, 반박하기 어려워서 더욱 얄밉게 느껴졌다. 얄궂게도 어쩌면 그래서 내가 글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말이다. <팬레터>는 글로 지은 강한 희망이 무너지는 파멸을 보여줌으로써 글이 지닌 위대함을 말한다.


[팬레터] 공연사진_01 문성일_제공 라이브(주).jpg


1930년대 경성, 김해진 선생에게 팬레터를 보내며 본인도 작가의 꿈을 키우는 세훈. 요즘 사람들이 SNS 팬계정을 만드는 것처럼, 그는 '히카루'라는 이름으로 들뜬 마음을 남김없이 고백한다. 해진은 팬의 열렬한 마음을 받고 그만 여자가 쓴 것인 줄 오해하고 말며, 연정을 품게 된다. 이를 알게 된 세훈은 그를 달래보려 하지만 해진의 뜨거운 마음만 재촉할 뿐이다. 결국 세훈은 히카루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해진에게 답하며, 점차 해진과의 편지를 소설로 만들자는 욕망을 품게 된다. 점점 현실의 세훈과 해진이 아닌 히카루가 점령해가는 무대는 매혹적이고도 무섭다. 일제강점기라는 배경이 더해져 그들의 목숨을 건 글쓰기가 펼쳐진다.


[팬레터] 공연사진_02 김종구 이형훈 이한밀 손유동 송상훈_제공 라이브(주).jpg


<팬레터>는 발신인을 철저히 믿는 수신인의 아름다운 비극을 통해 관객에게 펜만이 가진 힘을 증명해낸다. 이야기를 쓸 때의 나는 다른 사람으로 얼마든지 둔갑이 가능하다. 글의 아름다움과 무서움은 상상력에 있다. 사람은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쓰는 존재라고 했다. 그것은 이야기만이 우리를 진실로 자유롭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누군가가 어떤 이야기를 진심으로 읽어버리는 순간 그 이야기는 더 이상 작가 혼자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너무도 사랑한 드라마의 결말이 엉뚱하게 끝나버릴 때 사람들의 원성이 빗발치는 것과 같은 이유다. 무언가를 열렬히 읽는 순간 그건 편지만큼 개인적이고 소중한 무언가가 되는 것이다. <팬레터>는 애초에 편지로 시작했으니, 그 비극이 더욱 두드러진다.


[팬레터] 공연사진_03 김종구 원태민_제공 라이브(주).jpg


세훈의 배려로 시작되었던 답장은 깊어지고 사실을 회피하다 못해 허구를 만들어낸다. 이른바 '최애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은 마음'이 사기꾼이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자신의 우상을 농락하는 것 같은 세훈의 모습에 분노가 치밀기도 했지만, 마지막에 자기의 마음을 저렇게 고백하게 된 세훈이 안쓰럽기도 하고, 오히려 그 마음이 너무 소중해서 생긴 비극이라는 점에 눈물이 나기도 했다. 편지를 쓸 때 단어 하나하나를 고르듯 가장 아름다운 것만 주고 싶었던 마음이 오염되어 버렸다.


[팬레터] 공연사진_04 원태민 강혜인_제공 라이브(주).jpg


히카루가 자신이었노라, 고백하는 세훈의 모습은 노래로 표현되지 않고 배경 음악 하나 깔리지 않는다. 가슴을 부여잡고 떨리는 단어 하나하나를 내뱉는 세훈의 모습이, 누군가에게 거짓말을 고백하던 나의 모습처럼 현실적이기 그지없다. 그 모습에서 자꾸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요즘 어떤 글을 적고 있는지, 어떤 상상을 하고 말하고 있는지.


'누가 나를 이렇게 봐줬으면 좋겠다'는 자의식이 가득 들어간 글은 꽤나 읽기 힘들다. 세훈도 히카루로 작정하고 썼을 자신의 글들을 읽으며 자괴감을 느꼈겠지. 반면 조금 어설프더라도 내가 이런 생각을 했고, 누구한테 나누고 싶어 참을 수 없다고 고백하는 글은 참 순수하다. 문학과 달리 편지만이 갖는 아름다움은 고백에 있다. 나의 경우 블로그를 한 지 5년 남짓 되었는데, 내 블로그 초창기의 글들을 다시 읽어보면 웃음이 나온다. 좋아하는 게 많은 어린 동생이 쓴 것 같이 느껴진다. 좋아하는 배우가 엄청 잘생겼다는 주접이 가득한 글부터 나름대로 고찰을 곁들여보려고 시도한 글들.


[팬레터] 공연사진_05 원태민 강혜인_제공 라이브(주).jpg


그렇게 소소하게 쓰던 블로그 글이었는데 어느 날 한 포스트가 쉽게 표현하자면, '터졌다'. 조회수가 처음으로 하루 만에 3000을 돌파하며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눌러준 그 글은, 어렸을 때 내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이들의 표정을 지켜봤던 짜릿함과 비슷했다. 이 짜릿함을 잊지 못해 지금도 글을 쓰고 있는 걸지 모른다.


'터졌던' 글은 내가 진심을 담아 쓴 글이었다. 나에게도 세훈의 해진, 해진의 히카루가 있었다. 가장 사랑하는 무언가에 대해 쓴 글은 힘이 있다. 이렇게 마음을 담아 쓴 글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독자 또한 하나둘씩 늘어가며 나는 어느 순간 최애와 일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다. 꼭 일하는 산업이 겹치지 않아도, 어떤 분야의 최고가 된다면 스쳐갈 기회가 늘어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에 열심히 임했다.


예를 들어 그가 도자기 그릇을 의뢰하고 싶은데 내가 최고의 도예가라면? 집을 짓고 싶어 최고의 건축가를 찾는다면? 내 분야에서 분명히 명함을 내밀 수 있을 정도가 되면 한순간은 스쳐 지나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가 의뢰하거나 찾지 않더라도 내가 초대할 자신이 생기는 순간 말이다. 블로그를 넘어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를 시작한 것은 이 때문이다. '팬입니다'라고 가볍게 말할 만큼의 마음이 아니었기에, 당신의 작품을 보고 이런 변화가 있었다고 증명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이 그 사람에게 큰 힘이 된다면 그것만큼 역으로 내게 힘이 되는 것이 없을 것이다.


[팬레터] 공연사진_06 김지철_제공 라이브(주).jpg


아이러니하게도, 글을 쓰기 힘든 순간도 그 때문이다. 처음 블로그를 시작했을 때의 순수함을 잃었기 때문이다. 히카루로 시작된 자존심이 나를 지배해버릴 때다. 반면 히카루가 자신에게 와주었으면, 매일 꿈꾸는 사람이 해진이다. 히카루는 세훈에게는 정체성이지만 해진에게는 뮤즈다. 세훈이 작가의 윤리를 생각해 보게 하는 사람이라면, 해진을 보면 '작가의 현실'을 깨닫게 된다. 내 꿈을 위해 나는 어디까지 내어줄 수 있는가?


청초한 작가의 모습과 달리, 글 쓰는 과정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과정과 결과가 이렇게 다른 것도 없을 것이다. 체력과 정신력이 무시무시하게 요구되며 등은 굽고 손목이 아파진다. 그럼에도 해진은 마치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처럼, 현실에서 글로 진입하는 그 한순간을 위해 처절하게 피를 토해가며 쓴다.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그저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몽둥이라도 들고 찾아 나서야 한다."라는 말을 남긴 잭 런던의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누군가는 처절한 해진의 모습이 미련해 보일 수 있지만, 마찬가지로 '히카루'를 갈망하는 사람으로서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팬레터] 공연사진_20 소정화_제공 라이브(주).jpg


희망이 파멸이라는 아이러니를 상징하는 인물, 히카루. 히카루는 글의 뮤즈를 넘어 내가 꿈꾸는 사람, 사랑, 이상, 그 모든 것을 대표하는 존재 같았다. 내가 만들어내는 존재이면서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히카루는 그 누구보다 활발하게 움직이고 살아있었다. 나에게 자유를 주지만 동시에 얽매이는 존재. 히카루의 이름 없이 세훈은 글을 쓰지 못한다. 해진 역시 히카루를 갈망하며 하루하루 연명한다. 그리고 히카루는 글의 결말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글이 완결됨으로써 히카루는 죽었고, 그로서 영원히 살아있게 되었다.


순수함이 지닌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다루는 <팬레터>는 나라가 위급하던 상황에도 순수문학을 했던 문인들을 이해하게 한다. 예술은 형체가 없기에 누가 지키지 않으면 쉽게 잃어버리고 만다. 지금 내가 예술의 전당에서 이 뮤지컬을 볼 수 있었던 건, 소극장에서 <팬레터>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이 공연을 알아보고 지켜와준 팬들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담으로 <팬레터>의 모티브가 된 김유정, 이상의 실제 일화들은 막상 제대로 찾아보면 매우 충격적이다. 이 역시 글과 상상력이 무섭다는 반증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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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을 나오니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밟지 않은 눈으로 덮인 길이 한 자도 쓰지 않은 원고지처럼 하얗게 보였다. 나의 히카루... 중얼거리며 돌아왔다. 무섭지만 아름다운 히카루. 내가 사는 히카루. 나에게 가장 순수한 사랑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작품이었다.



팬레터를 재미있게 보았다면


<팬레터>를 재미있게 보았다면 편지로 얽히는 또 다른 이야기들을 추천한다.

편지가 예기치 않은 결과를 낳은 <디어 에반 핸슨>과, 다른 이로 고백해 이루어진 사랑을 다룬 <시라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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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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