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의 처연함

외로움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발버둥

by 채수빈

뮤지컬을 좋아하게 되기 전이었다. 메가박스에서 엘리자벳 실황 영화를 상영하는 걸 보고, ‘이게 수요가 맞을까?’라고 갸웃하던 나를 기억한다. 왜냐면 ‘공연 녹화본’이 재미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첫 경험이 중요하다고 했지. 웨스트엔드에서 처음으로 뮤지컬을 내돈내산 해서 본 후, 뮤덕의 길로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아르코예술기록원 공연영상화사업의 일환으로 TV에서 방영해 준 창작뮤지컬 <에어포트 베이비>의 '녹화본'을 보았다. 그리고 영화보다 더 몰입해서 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때부터 실황 영상도 충분히 집중해서 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던 것 같다. 화면 너머로도 배우의 호흡과 무대의 느낌이 전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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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실황 영상의 매력은 ‘원테이크 영화’ 같다는 점이다. 올해 개봉한 <프랑켄슈타인 : 더 뮤지컬 라이브>는 정말 독특한 경험을 안겨주었다. 실황 영상 그 이상이었다. 말 그대로 실황 '영화'다. 인물의 감정선에 따라 클로즈업이 되고 넘버에 따라 구도를 달리해서 찍는다. 특히 프랑켄슈타인 뮤지컬의 구조가 1인 2역이다 보니 이러한 영화적 연출이 굉장히 잘 어울린다. 그럼에도 상영관을 나오면 포토존과 캐스팅보드가 있는 것, 중간 인터미션이 있다는 점은 진짜 공연 못지않은 느낌을 준다.


나의 경우, 책이 아닌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을 처음 접하는 것이기도 했다. 소위 '파멸극'이라는 정보만 안고 갔다. 사실 나는 인간의 광기, 잔혹한 복수극을 그리는 이야기보다는 감정선이 전반적으로 따뜻하고, 진부하더라도 도덕적인 극을 선호하는 편이다. 영화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을 보고 나서는 복잡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분명 내가 좋아할 극이 아님에도, 왜 이토록 울컥했을까.



회상을 통한 액자식 구조


프랑켄슈타인의 주된 전개 방식은 '회상'에 따른 액자식 구조다. 모든 인물들이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하는 회상 장면이 있다. 관객들을 목격자처럼 법정에 세운 다음, 각 인물들이 변호사처럼 내가 몰랐던 사실을 들려주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사건의 전말이 하나씩 드러날수록 관객은 인물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


1막과 2막은 모두 기승전결의 '전'에 해당하는 장면을 먼저 보여준다. '전'부터 보게 되니 '기', '승'에 대한 호기심이 저절로 생긴다. 1막의 시작은 빅터가 실험을 감행하다 달아나는 장면이다. 그는 어떤 실험을 하고 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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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은 프랑켄슈타인 박사 '빅터'의 이야기가 주가 된다. 그는 어릴 적 어머니를 흑사병으로 잃고, 죽은 자를 되살릴 방법에 집착한다. 그는 전쟁 중 만난 신체 접합술의 대가 '앙리'의 목숨을 구해주며 자신과 함께하자고 제안한다. 처음엔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는다며 고개를 내젓던 앙리였지만, 그는 곧 빅터의 비전에 반해 함께하기로 한다.


둘은 장의사에게 시체를 구해 실험을 진행하기로 한다. 그러나 계획이 꼬여 빅터가 살인자로 몰리게 되며, 앙리는 빅터를 대신해 희생하기로 마음먹는다. 결국 앙리는 사형에 처해지고, 빅터는 앙리의 신체를 가져다 실험을 감행한다. 1막에서 봤던 장면이 그것이다. 그 결과 생명은 창조되었으나 앙리는 되살아나지 못했다. 빅터는 그가 창조한 괴물을 외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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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이 흐른 후, 괴물이 빅터를 찾아온다. 1막이 빅터의 이야기였다면, 2막에서는 괴물이 빅터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빅터가 괴물을 버린 후, 괴물은 숲을 헤매다 격투장을 운영하는 마담의 눈에 띄어 끌려갔다. 인간에게 비웃음, 배신, 혹사를 당하며 그는 자신이 창조된 이유를 계속 알아내려 애쓴다. 결국 괴물은 희망을 잃고 어느덧 세상이 바라보는 그대로의 존재, 진짜 '괴물'이 되어 빅터를 찾아온 것이다.


괴물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빅터를 두려움에 떨게 한다. 그러나 괴물은 멈추지 않고, 빅터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씩 죽이겠다고 예고한다. 그리고 사실상 3막처럼 느껴질 만큼 숨 막히는 2막의 최후반부는 괴물과 빅터, 둘만의 고독한 대면이다.



존재의 이유를 묻는 존재


도파민이 가득할 거라고 생각했던 프랑켄슈타인은 오히려 무척이나 철학적이고 슬픈 이야기였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마주치게 되는 '외로움'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외로움이 왜 '집착'을 만드는지에 대해서도 다룬다.


외로움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존재의 이유를 찾아 헤맨다. '나는 어떤 이유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지? 나는 왜 태어났지? 나는 왜 저주받았지? 왜 나만 외로운 거지?' 이 질문에 분노를 품을 때 우리는 괴물이 된다.


작품의 후반부, 괴물은 어린 꼬마를 호수에 밀어 죽이는 냉혹함을 보인다. 이 장면에서 숨을 들이켰는데, '정말 그가 괴물이 되어버렸구나'를 느낌과 동시에 괴물이 자신의 상상 속에서 어린 빅터를 죽인 걸까,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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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은 메리 셸리의 고딕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원작으로 하는 국내 창작 뮤지컬이다.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시체를 이용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다는 줄거리는 같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앙리 뒤프레'라는 인물이다. 뮤지컬에서 앙리는 빅터가 실험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제시된다.


그래서 앙리라는 인물은 짧게 등장하지만 굉장히 중요하다. 빅터를 유일하게 지지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빅터를 대신해 희생했기에 그는 빅터의 죄의식이자, 빅터가 괴물에게도 강제하게 되는 원죄가 된다. 즉, 앙리는 '존재의 이유'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결혼식 축가로도 많이 쓰이는 프랑켄슈타인의 넘버들이 있다. <너의 꿈속에서>, <그곳에는>은 작중 인물들이 미래를 꿈꾸며 부르는 넘버다. 서로의 존재의 이유를 미래에서 찾는다. 그러나 빅터는 사랑하는 이가 없는 미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어릴 때 어머니의 죽음으로 느낀 외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앙리가 죽은 후에도 마찬가지다. 그는 유한함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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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빅터가 그토록 원한 '생명 창조'는 결국 또 다른 유한함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괴물은 자신의 창조주를 북극으로 끌어들여 자신과 똑같은 고독 속에서 죽게 만든다. 그는 복수해서 후련하다기보다 빅터를 동정하는 듯 보였다. 창조주에게 주고 싶었던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산다는 건, 살아남는다는 건


'회상'이 프랑켄슈타인의 가장 큰 테마인만큼, '시선' 또한 중요한 테마가 된다. 특히 2막에서 그렇다. 괴물의 시선으로 본 사람들을 구성할 때, 1막에 등장했던 배우들이 모두 1인 2역을 맡아 괴물의 회상 속 인물들을 연기한다. 아마도 의도한 것이겠지만, 주요 특성이 반대되는 인물들을 한 배우가 연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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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의 인물에 대한 시선은 <지킬앤하이드>와 매우 닮아 있다. 1인 2역이 극에서 중요한 장치로 쓰이는 것, 무책임한 실험이 낳은 희생자들 등의 요소들이 그렇다. 특히 줄리아와 까뜨린느는 지킬앤하이드 속 이분법적으로 구분되는 여자 주인공 엠마와 루시를 연상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켄슈타인은 지킬앤하이드에서는 못 느꼈던 감동이 있었다. 모두를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존재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까뜨린느의 솔로 넘버는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넘버였다. 까뜨린느와 괴물의 관계성은 <웃는남자>도 생각난다. 바닥에 있는 인물들이 서로 연대하며 잠시 희망을 노래한다. 모든 인물들이 '따져보자면' 할 말이 너무나 많은데, '감정적으로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안아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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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아쉬웠던 점 두 가지는가 있다. 첫 번째는 사운드다. 뮤지컬 영화인만큼 사운드가 정말 중요했는데 돌비 시네마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연장 특유의 뻗어나가는 소리는 결국 잘 전달되지 못했다. 이 점은 결국 프랑켄슈타인이 어디까지나 실황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점이 아쉽기는 했지만, 만약 다른 캐스트 버전의 프랑켄슈타인이 동시개봉했다면 분명 그것도 보러 갔으리라. 그만큼 공연장의 '분위기'는 완벽하게 담아냈다.


두 번째로 아쉬웠던 점은 앙리의 희생 장면이다. 이 장면은 프랑켄슈타인이 5연을 성공리에 올린 뮤지컬임에도 아직도 불충분한 설명으로 남아 있다. 앙리가 희생하기까지의 장면을 단순히 극적 장치로만 쓴다. 30초짜리 그림자 애니메이션처럼 짧고 빠르게 끝난다. 관객은 얼떨떨하게 앙리가 갑자기 빅터를 대신해 희생하는 것을 보게 된다. 차라리 완전한 우연성이 더 낫지 않았을까? 둘 다 술에 취해 우연한 사고를 당하는데 앙리가 빅터 대신 죽게 된다거나 하는 식의.


이렇게 평행 시나리오까지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앙리의 엄청난 희생을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내게는 앙리와 빅터의 우정이 그렇게 깊어 보이지는 않았다. 빅터가 앙리의 목숨을 구해주긴 했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에 앙리가 희생한다고? 술 한잔 하며 우정을 다지는 장면으로도 당연히 불충분하다. 앙리가 빅터의 신념에 감탄하는 모습을 좀 더 보여줬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 장면은 따로 넘버를 만들던지, 어떤 식으로든 보충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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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서사의 비약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감정선이 탄탄했던 것은, 외로움과 집착이라는 두 주제를 잘 엮어낸 덕분이다. 또한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다. 박은태 배우의 연기에는 특유의 우아함과 진솔함이 있다. 그는 마치 예수가 희생하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순수하고 고결한 앙리의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괴물에게 앙리는 원죄가 된다는 느낌을 받은 것도 있다.) 매드 사이언티스트 빅터를 연기한 규현의 연기에도 감탄했다. SM엔터테인먼트의 메인 보컬이었던 만큼 노래는 당연히 잘할 것 같았지만, 연기를 이토록 잘할 줄은 몰랐다. 빅터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고 박은태 배우와의 케미스트리도 엄청났다.


창조되면 외로움이라는 심연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인간. 우리는 모두 한 번쯤은 '내가 왜 태어났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하게 된다. 질문을 계속해서 던짐에도 아무도 답하지 않을 때, 외롭다는 자각만 점점 강해진다. 그리고 분노하고,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어딘가에 계속 나를 믿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지도 함께 보여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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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 영화 역시 개봉했다. 두 영화를 보면 외로움을 견디는 인간을 동정하는 순간이 온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실험이자 창조물처럼 세상에 던져졌다. '원조 SF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원작으로 하는 이 두 영화들을 연말 영화로 추천한다. 연민과 인류애가 아이러니하게도 충전될 것이다.




*위 글은 아트인사이트에도 기고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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