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이 올라가는 걸 넘어 자존감이 되어 나가는 이야기
재작년, 영국 여행에서 처음 해본 것이 정말 많았다. 그중 하나가 혼자 뮤지컬을 관람하는 것이었다. 잠시 무대 위 이야기가 현실이 되는 경험을 한 후, 나는 그날 밤 숙소에 돌아와 우리나라에는 어떤 뮤지컬들이 있는지 밤새 인터넷을 서핑했다. 그러다가 김세정 배우의 <레드북> 클립을 맞닥뜨렸다. '슬플 때 야한 상상을 한다'는 발칙한 요약글을 읽고 더욱 호기심이 생겼다. 그때부터 <레드북>은 내가 제일 보고 싶었던 뮤지컬이 되었다.
아쉽게 그 해의 공연 기간을 놓쳤기에 2년을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올해, 4연으로 돌아온 <레드북>의 독자가 되었다. "난 뭐지? 뭐긴 뭐야, 나는 안나"라고 사랑스럽게 외치는 안나의 이야기를 보고 왔다. "나는 안나"라는 가사가 "나는 자존감"이라는 가사로 자연스럽게 변환되어 들려오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난 슬퍼질 때마다 야한 상상을 해"
신사의 나라 영국, 그중에서도 여성에게 가장 보수적이었던 빅토리아 시대. 약혼자에게 첫 경험을 고백했다가 파혼당하고 도시로 건너온 여인, '안나'.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첫사랑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하루하루 굳세게 살아간다.
어느 날, 그런 그녀 앞에 신사 중의 신사 '브라운'이 찾아오고 안나는 브라운의 응원에 힘입어 여성들만의 고품격 문학회 <로렐라이 언덕>에 들어가 자신의 추억을 소설로 쓰게 된다.
하지만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되던 시대, 안나의 소설이 담긴 잡지 '레드북'은 거센 사회적 비난과 위험에 부딪힌다.
(뮤지컬 레드북 시놉시스)
가장 궁금했던 것은 안나가 '야한 상상'을 하는 장면이 어떻게 표현될지였다. 안나는 '올빼미를 부른다'라고 표현한다.
딱딱한 이 바닥도 포근한 침대 같아
너와 있으면 나, 세상이 두렵지 않아
차가운 이 창살도 새하얀 커튼 같아
슬퍼질 때마다 야한 상상을 해
내 영원한 사랑
올빼미를 불러
레드북 넘버 <올빼미를 불러>
슬플 땐 야한 상상을 한다는 말은 뜻밖에 묘한 힘이 있다.
그런데 왜 '야한' 상상일까?
이 원초적인 상상의 본질은 '누군가와 순수하게 연결되고 싶은 본능'이다.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인간은 상상을 통해 누군가를 불러낸다. 외로움은 사랑을 원하는 신호다. 안나는 이 신호를 부정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면으로 응시하고, 글로 쓰고,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한다. 자신의 슬픔을 있는 그대로 껴안아주며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은 욕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타인과 연결되는 것'에 대해 <레드북>은 나름의 정의를 내린다. 바로 '끊임없이 변하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나를 고정된 무언가로 정의할 수 없듯이, 상대 역시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른 아침 온 세상에 안개가 자욱해도
오후에는 어느샌가 햇살이 눈부시죠
하루 종일 비가 내려 기분이 울적해도
언젠가는 맑게 개어 무지개를 만나죠
사랑은 마치 마치 오늘의 날씨처럼
흐렸다 환해지고 추웠다 따뜻해져
사랑은 마치 마치 노을 진 하늘처럼
노랗게 물들었다 빨갛게 피어나죠
레드북 넘버 <사랑은 마치>
상대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어도 현재의 우리를 받아들이며 앞날을 그려보는 것. 안나와 브라운의 관계는 바람직한 화해의 정석이다. 브라운과 안나는 서투르지만 함께 사랑을 조율해나간다. "이해할 수 없어도 좋아할 순 있는 거잖아요"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브라운의 대사는 꼭,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계속 읽고 싶은 책을 만난듯하다.
안나가 쓴 소설은 질타를 받게 되고, 그녀는 처벌을 면하려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고 자신을 부정해야 되는 상황에 놓인다. 그녀가 걱정되는 브라운은 거짓말을 할 것을 권한다. 그러나 안나가 차마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은 자신의 독자다. 타인과 연결되는 욕망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가 받고 싶은 사랑'을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어서 안나는 자신의 첫 번째 독자가 자신이라는 걸 문득 상기한다. 그녀는 사실 처음부터 답을 알고 있었다. "뭐긴 뭐야, 나는 나지, 나는 안나!"라고 뮤지컬의 아주 첫 번째 넘버에서부터 외쳤던 안나.
난 늘 궁금했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난 늘 기다렸어
날 이해해 줄 알아봐 줄 한 사람
사실 다 알고 있는데
답은 내 안에 있는데
자꾸 되물어 봤어
나를 믿을 수 없어
애써 모른척했어
혼자 자신이 없어
계속 외면해 왔어 나를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레드북 넘버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안나는 제1의 독자인 자신을 위한 결정을 내린다. <레드북>이 멋진 이야기라고 느낀 것은, 이것이 '치유'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만나서 지금은 다 괜찮아졌다'는 식의 러브 스토리도 아니고, 안나가 이야기를 쓰면서 트라우마를 극복한 이야기도 아니다. 외로움에서 나오는 욕망을 아름답다 말한다. 이에 대해 수치심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외로움은 사랑을 향한 신호이자 영감이 되며, 우리의 본질을 바라보게 한다.
첫 번째 넘버 <난 뭐지?> 속 “난 뭐지? 나머지!”라는 가사는 언어유희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 이야기는 안나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세상이 정한 중심에서 밀려나 ‘나머지’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장 남자 '로렐라이'의 사연이 그렇다. 나는 처음엔 <킹키부츠>의 드랙퀸 롤라처럼, 여성성을 사랑하는 사람을 상징하는 인물로 로렐라이가 제시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2막에서 상상도 못한 사연이 공개된다. 사실 그는 로렐라이라는 이름의 여자를 사랑했었다. 로렐라이 역시 안나처럼 욕망에 있어 솔직한 인물이었다. 즐겁게 자신을 노래하던 로렐라이는 그녀의 자유로움을 미워한 이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는 그녀를 기리기 위해, 그녀의 인생을 대신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여성 문학회 '로렐라이 언덕'을 만들어 로렐라이의 꿈을 대신 이뤄준다. 자신을 이야기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적인 이들이 생기지 않도록, 서로의 무조건적인 독자가 되어주는 곳을 만든다.
이렇듯 <레드북>은 '첫 번째 독자'들이 등장하는 장면들에서만큼은 어쩐지 눈물을 자아낸다.
개인적으로 가장 눈물이 고였던 장면은 안나가 바이올렛 할머니를 만났을 때를 회상하는 장면이다. 안나는 바이올렛의 욕망을 투영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준다. 그러자 바이올렛 역시 그녀에게 목소리를 되돌려준다. 안나야, 너는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이야 - 너는 이야기를 쓰기 충분한 사람이야, 너는 이걸 정말 잘하는 사람이야,라고 확인시켜준다. 안나는 처음으로 자기효능감을 느끼며 삶의 충만함을 느낀다.
바이올렛 할머니가 안나에게 ‘이야기를 써보렴’이라고 할 때 안나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안나, 이야기를 들려주렴>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넘버가 되었다. 안나가 글을 쓰는 이유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대한 이상 때문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독자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존감은 혼자 생기지 않는다. 타인의 눈, 타인의 언어, 타인의 따뜻한 반응이 내 안의 답을 일깨운다.
<레드북>은 귀여운 농담들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브라운의 친구들이 "풀어줘 브라운!" 하면서 속옷 고리같이 우산을 겹치는 장면이라던가, 은근한 언어유희들, 안나의 소설 속 내용을 살짝 엿보는 장면들에서 관객들은 배우들의 재치와 사랑스러움에 깔깔 웃게 된다.
<레드북>의 초연부터 함께한 아이비 배우의 '안나'는 배우와 매우 닮아 있다고 느꼈다. 사실 나는 아이비 배우를 '유혹의 소나타' 때도 아니고, <시카고>의 '록시'도 아닌, 네이버 파워블로거 ‘곰언니’로 좋아하기 시작한 사람이다. 노래든 춤이든 글이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고, 다재다능하면서도 유머러스한 그녀와 안나가 닮아 있다고 느꼈다. 매사에 진지하지만 따뜻한 마음을 지닌 변호사 '브라운'을 연기한 지현우 배우와의 케미스트리도 정말 좋았다. 작중 꼿꼿한 신사로 브라운을 소개하고 있지만,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예전 공연들의 클립들에 비교하면 더 귀엽고 소심한 브라운이다. 무대에 여러 번 오르면서 캐릭터가 더 사랑스럽게 발전된 게 느껴진다.
또한 <레드북>은 '친절한' 뮤지컬이다. 개인적으로 창작 뮤지컬들에서는 후렴구가 강한 넘버를 찾아보기 힘들어 어렵게 느껴진 경우가 많다. 그러나 <레드북>은 따라가기 무척 쉽다. 그리고 국내 창작 뮤지컬인 덕분에 저작권에 있어 좀 더 자유로워, 넘버가 공개된 게 많다. 관극 전 미리 들어볼 수 있어, 멜로디들이 더욱 반가웠던 것 같다.
첫 넘버에서 관객과 다른 등장인물들이 '나머지'인 이유는 이건 안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보고 나면 자연스레 관객은 ‘나도 안나와 같은 이야기를 쓸 거야'와 같은 식의 생각을 하기 쉽다. 레드북은 이에 고개를 젓고 "너만의 이야기를 쓰라는 얘기였어!" 하고 모두가 펜을 드는 장면으로 끝난다.
나는 글을 쓸 때 스스로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글에 부합하지 않아서 발행하지 않은 적이 무수히도 많다. 그렇지만 제일 재밌는 글은 글 너머의 사람이 보이는 글이다. 가끔 잠이 오지 않을 때 내 블로그를 다시 읽곤 하는데, 블로그 초기에 썼던 글들은 미숙하지만 아직도 나를 웃게 만든다. 코로나19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을 때 블로그를 시작했었다. 아무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서 내가 나를 향해 쓴 이야기는 참 솔직했다.
요즘 내 글은 살짝 초조해 보인다. 살짝 '글태기'를 겪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레드북>은 글 쓰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듯, 계속해서 글을 쓰는 안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즐기며 새로 쓸 것을 찾고 있는 안나의 모습으로 끝난다.
전용 극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드는 극들이 몇 개 있는데, <레드북> 또한 그런 극이다.
자존감이 올라가는 걸 넘어서, 자존감이 되어서 나가는 극, <레드북>의 오연을 기다린다.
<작은 아씨들>
<레드북>은 19세기 런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작은 아씨들>은 19세기 미국 매사추세츠에 사는 4자매의 이야기로 당대 여성의 삶을 그린다. 메그, 조, 베스, 에이미가 각자 다른 가치관으로 당당하게 삶을 개척해나가는 이야기. 특히 2019년 영화 버전은 <레드북>을 연상하게 하는 장면들이 많다. 둘째 조는 자신의 이야기를 적은 원고를 묶어 붉은 표지의 책으로 세상에 내보낸다. 그리고 '지금까지 쓰여지지 않은 이야기'의 소중함을 말하는 막내 에이미의 대사 또한 <레드북>을 보고 나면 더욱 가슴을 울릴 것이다.
조: 누가 가정의 고민과 기쁨 따위에 관심을 갖겠어? 그런 건 아무런 중요성도 없어.
에이미: 우리가 그런 걸 중요하게 보지 않는 건, 아무도 그것에 대해 쓰지 않기 때문일지도 몰라.
조: 아니, 글이 중요성을 부여하는 건 아니야. 이미 중요한 걸 반영할 뿐이지.
에이미: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글로 쓰는 순간, 그건 더 중요해질 거야.
*본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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