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굴욕 리스트를 공개합니다

책 <굴욕>을 읽고

by 채수빈

<굴욕>에는 너무 솔직한 글에서 만나는 당혹스러움이 있다. 2011년 처음 출간된 <굴욕>은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푸가(fugues)' 형식의 에세이로, 파편화된 생각의 모음집이다. 에세이라기엔 ‘의식의 흐름’ 같아 보일 정도다. 마지막에는 옮긴이 후기가 있어서, ‘내가 뭘 읽었지’ 싶을 무렵 다시 정리해 주는 기능을 한다.


저자는 모든 굴욕에 세 가지 핵심 당사자가 있다고 한다. 피해자, 가해자, 그리고 목격자다. 그리고 이중 우리는 목격자의 역할을 그토록 즐길까? 작가는 미디어, 특히 인터넷의 속도와 바이러스처럼 퍼지는 전염성 때문에 일종의 '광적인 연료'가 더해져 속도가 빨라졌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마을에서 평판이 망가지면 옆 마을로 이사 가면 그만이었고, 소문이 퍼지는 데 한 세대가 걸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말 그대로 ‘즉시’ 전 세계가 알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이 이미 본보기가 되었거나, 신화화되었거나, 후광을 입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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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의 예시로 알몸, 토, 포르노(마조히즘), 티비 스타들의 까발려짐, 매 맞는 것 등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이중 내가 공감했던 것은 ‘토’이다. 고등학생 이후로 토를 해본 적이 없다. 나는 토를 하고 나면 늘 울었다. 생리적으로 눈물, 콧물이 함께 나는 순간 갑자기 서러움 또한 치밀었다. 토가 다른 감정까지 끄집어냈다.


이 지점에서 ‘카타르시스’라는 개념이 떠올랐는데, 재미있게도 카타르시스 역시 ‘정화’, ‘청소’, ‘배설’이라는 뜻을 지닌 어원에서 유래했다. 우리는 슬픈 영화를 보며 오열하거나, 오랜 시간 묵혀둔 분노를 터뜨린 뒤에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이때의 후련함은 나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독소'를 배출하는 행위다. 감정의 응어리를 밖으로 끄집어내어 직면하고 흘려보냄으로써, 혼란스러웠던 내면은 비로소 질서를 되찾는다.

정서적 안정과 평온을 회복하려면 굴욕적 카타르시스가 필수적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굴욕을 당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쓸모 있는 인간임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끔찍한 굴욕 뒤에 찾아오는 기묘한 고요함이다. 일종의 '바닥을 쳤다'는 감각이며 ‘퇴행적 자유’이다. 작가는 자신의 가장 굴욕적인 순간들을 돌아볼 때, 뜨겁고 차가운 전율과 함께 기묘한 생리적 역설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모든 가식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모든 지지대들이 산산조각 났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는 여전히 남아 있다. 모든 것이 끝났지만,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으며 이제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듯 극도의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굴욕은 역설적인 탈출구가 되기도 한다.


코스텐바움에게 있어 굴욕이 매혹적이면서도 불편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동시에 가장 깊은 지점에서 우리를 연결하기 때문이다. 그는 Humiliation(굴욕)은 ‘to be made humble(겸허해지다)’를 의미하고, ‘to be made human(인간다워지다)’라는 뜻도 되지 않을까 제안한다. ‘Human(인간)’과 ‘Humiliation(굴욕)’은 어원적 뿌리가 같지는 않지만, 라틴어에서조차 두 단어(humanus와 humiliatio)는 암시적으로 같은 접두사를 공유한다고도 말한다. 그는 누군가가 굴욕당하는 것을 볼 때, 설령 그 사람이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할지라도 친절을 베풀라고 독자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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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이 의미 있는 것은, 옮긴이의 말에서 인용된 주디스 버틀러의 말처럼 우리는 폭력이 너무 만연해진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굴욕의 욕망’에 시달리고, 생산한다. 심지어 교육에도 어느 정도 굴욕이 포함된다. 의도치 않게 몇몇 학생을 무시하거나, 응답하지 않거나, 수치심을 느끼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몹시 고통스러울 타인의 경험을 더 굴욕적이지 않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저자의 고백처럼 나 또한 나의 ‘굴욕 리스트’를 나열해 보겠다.

(*읽으면 같이 민망해질 수 있으니 주의하시길.)


1. 이름이 잘못 불리거나 까먹을 때

2. 소위 말하는 ‘긁힐 때’(정곡이 찔릴 때)

3. 소개팅 애프터가 오지 않을 때

4. 누가 내 앞에서 방귀를 뀌며 지나갈 때

5. 화장실 물이 넘쳤을 때 혹은 이를 목격할 때

6. 화장실을 못 참을 때

7. 체크카드 승인이 안될 때, 현금이 없을 때, 돈을 빌려야 할 때

8. 술 취한 이들을 볼 때 느껴지는 불쾌함, 알코올 냄새를 맡을 때

9. 나를 중국인으로 착각할 때

10. 발표를 시켰는데 문제를 못 풀 때, 그래서 내가 기대와 다른 사람임이 까발려질 때.

11. 생리혈이 샜던 순간

12. 쓰고 나니 내가 이런 것들로만 이루어진 사람 같아서 민망해지다.



* 본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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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0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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