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거 없이 나를 믿어줄 때 펼쳐진 마법

누군가 얘기했어, 한 번쯤 날개를 펴라고

by 채수빈

내면의 목소리를 듣기 쉽지 않은 때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휴대폰을 집어 드는 것이니까. 양치질을 하는 순간에도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습관처럼 알고리즘이 선정해 준 쇼츠를 넘긴다. 영상을 볼 때도 못 참고 댓글 창을 연다. 기발한 댓글들에 킬킬대다가도, 익명의 다수가 남긴 댓글 속에서 나도 모르게 내 의견을 검열하곤 한다. 다소 맥락 없는 비판과 칭찬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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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척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올해 본 뮤지컬 <위키드>에 어느 때보다 공감했는지도 모르겠다. <위키드>는 우리가 잘 아는 <오즈의 마법사>를 비틀어, '서쪽의 사악한 마녀'로 알려진 엘파바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준다.


초록색 피부로 태어난 엘파바는 그 자체로 낙인이 된다. 하지만 엘파바는 약간 까칠한 면이 있어도, 누구보다도 정의롭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물이다. 관객은 그녀가 끊임없이 억울하게 오해받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어떻게 진실이 왜곡되고 여론이 개인을 짓누르는지를 목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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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드>는 동화 이야기가 아니라 동화를 만드는 포퓰리즘의 이야기다. 포퓰리즘을 비판하면서 <위키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이다. 마법사의 수제자가 되고 싶어 하던 엘파바는 오즈의 실체를 마주하게 되고, 그가 사실상 확성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때 엘파바가 각성하며 부르는 넘버가 바로 <위키드>를 상징하는 "Defying Gravity"다. 엄청난 고음의 벨팅과 함께 계속해서 엘파바가 위로 날아오르며 쾌감을 선사하는 장면이다. 엘파바는 그동안 자신을 옭아매던 온갖 목소리 - 타인의 조롱, 가족의 냉대, 사회의 낙인을 하나하나 떨쳐낸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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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ying Gravity의 전율은 'leap of faith'를 시청각적으로 완벽하게 형상화하는 데에서 온다. 'leap of faith'는 철학자 키르케고르가 제시한 표현으로,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없음에도 기꺼이 자신을 믿음에 내맡기는 행위를 말한다.


키르케고르의 경우 신앙적인 개념에서 제시한 표현이었다. 초월적 존재에 대한 물질적 증거가 존재하지 않을 때는 믿기 위해 믿을 수밖에 없는데, 믿음에 나를 내던지는 실존적 행위를 '도약'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믿음에 대한 믿음'은 꼭 신앙적인 개념이 아니어도 인생 전반에 적용된다. 삶이 바뀌기 직전의 변곡점에서는 이러한 도약이 불가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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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개봉한 영화 버전 <위키드>에서는 이 도약의 순간을 더 자세히 묘사한다. 기존의 넘버를 구간별로 쪼개어 엘파바가 짧은 도약의 순간 무엇을 느꼈는지 보다 세세하게 그려낸다.


영화에서 엘파바는 날아오르는 순간 바로 추락한다. 죽기 직전의 위급한 순간, 그녀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그녀가 가장 구하고 싶었던 것이 눈앞에 나타난다. 바로 어렸을 때의 자신이다. 엘파바는 내면아이를 구원하는 순간 처음으로 마법의 흐름을 탄다.


나 자신에게 끝까지 솔직해질 수 있을 때,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그대로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삶에는 기쁨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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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엘파바가 날아오르는 장면에서 끝나지 않고, 빗자루를 타고 신나게 날아다니는 모습도 보여준다. 내가 어릴 적 많이 봤던 <해리 포터>가 연상된 부분이기도 했는데,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날 <해리 포터>를 보며 위로받던 어린 내가 떠올랐다.


어쩌면 판타지는'leap of faith'를 설명하기 위해 탄생한 장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판타지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인종, 신념, 피부색, 약자, 강자를 초월하여 인간의 보편적 믿음을 다루는 가장 강력한 장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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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어난 판타지 이야기 <위키드>를 여행하면 저절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나 자신을 믿어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진지하게 질문하게 된다. 나는 언제 내 목소리를 들어주었던가?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내가 스스로 증명해낸 경험은 무엇이었을까? 남의 평가가 아니라 나 자신의 믿음을 근거로 선택했던 순간이 과연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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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어도 중력처럼 이 땅에 나를 자꾸 붙들어놓는 것들이 있다. 본인의 절망으로 나를 비웃는 사람들, 현실적인 문제들, 포기해야 할 것들, 그러나 가장 무거운 중력은, 바로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자격지심이다.


마침내 마음의 빗장을 벗어던지고 날아오르는 엘파바, 그녀가 높이 올라갈수록 관객은 그녀를 우러러보며 함께 자유를 맛본다. 생각해 보면, 삶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언제나 근거 없는 자신감을 발휘할 때가 아니었을까. 남들이 이해하지 못해도, 심지어 나조차 두려웠어도, 조용히 들려오는 목소리에 응답하기로 결심하는 순간 말이다.


우리 모두에게 'leap of faith'는 한 번쯤 필요하다. 나에 대한 댓글 창을 확인하는 대신, 일단 내가 나에게 먼저 '좋아요'를 눌러주자. 누군가 얘기했지, 한 번쯤 날개를 펴라고.




*이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되었습니다.

#아트인사이트 #artinsight #문화는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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